#35
처음에는 CCTV에 잡힐 정도로 어설펐던 그들의 도둑질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져 갔다. 저택을 경비하는 경비팀의 인원까지 매수당해, 저택을 오가는 외부 업체의 차에 훔친 물건들을 싣기도 했다.
고작 손님 한 명 앞으로 배정된 예산이라고 하기엔 베르무스 가문의 명성이 지나치게 드높았다. 한 분기에 사용되는 액수만 해도 사용인 열의 연봉을 합친 것과 맞먹었기 때문이다.
그간 이 저택에 오는 오메가를 아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추후 계약에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변호인단의 조언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아무래도 썩 바람직한 계약은 아니었으니까.
입을 다무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대가가 필요한 법이다. 라일은 그들의 모든 계좌를 추적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증거를 찾아낼 작정이었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자들은 결국 적극적인 방조자였다.
라일 그 자신을 포함해서.
“선처는 없어. 그까짓 증언은 중요한 것도 아니니, 어쭙잖은 헛소리는 전부 쳐내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그는 해진을 법정 소송의 전면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소송의 당사자가 된다는 건 좋든 싫든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해진을 만나 의향을 물어보기는 하겠으나, 과연 그가 기꺼이 이런 일을 승낙할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일단은 녀석의 존재를 최대한 숨긴 채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들의 죄는 차고 넘쳤다.
“로펌 드림K에 일을 맡겼습니다. 저택 내부의 횡령만 혐의로 잡더라도 상당수의 인원이 법적 책임을 질 것이라 자신하고 있습니다.”
비서가 언급하는 로펌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큰 대형 법무법인이었다. 베르무스 가문의 전문 변호인단도 있으나 다뤄야 할 소송이 많았기에 개별 사용인들에 대한 것은 그쪽에 맡겼다. 관련된 모든 이가 즉각 해고 처리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빠르게 결과를 볼 수 있게 전달하겠습니다.”
빈틈없는 조치이지만 라일은 왠지 성에 차지 않았다. 보고를 듣는 내내 해진의 파리한 안색이 떠올랐다. 텅 빈 그 시선은 마치 그를 나무라듯 한구석에서 존재감을 뿜고 있었다.
이제는 가슴에 푹 박혀 버린 차가운 분노가 조금 더 녀석의 고통을 신경 쓰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아니. 빠르게 진행하지 않도록 전달해.”
“네?”
“소송을 걸고 시간을 최대한 끌어. 최소한 5년은 법적 문제로 고통받을 수 있게.”
이제 고작 이틀밖에 안 굶은 놈들이, 적어도 밥은 줘야 할 것 아니냐며 새로운 경호팀을 향해 난동을 부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러니 새빨갛게 달아오른 시야가 아직도 본래의 색을 되찾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다른 대형 로펌에 연락을 돌려.”
“더 진행하실 사안이 있으십니까?”
“아니. 베르무스가 이 소송들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고 전해. 머리가 좋은 놈들이니 알아듣겠지.”
사실상 사용인들이 개별적으로 변호사를 구할 수 있는 길을 막아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이 도시에서 베르무스의 반대편에 선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너무 일찍 끝나 버리면 안 되니 물밑으로 손을 써. 적당한 변호사가 여러 번 붙었다가 빠질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이제야 최소한 5년이라는 단서가 그저 내뱉은 말이 아닌 걸 알아들은 비서는 신중하게 메모를 작성했다. 비밀로 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일이 원하는 건 단순한 처벌을 넘어 법적 소송을 진행하며 얻는 고통 그 자체였으니까.
마치 해진이 이 저택에서 오래도록 고통받았던 것처럼.
“그런데 이렇게 계속 가둬 둘 수만은 없습니다.”
“알아.”
비서의 염려 섞인 말에 라일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파티 홀에서 죄다 굶어 나자빠지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이목이 지나치게 쏠려 있었다. 그의 저택은 분명 도시의 외곽에 붙어 있지만, 사람들의 시선까지 피하지는 못했으니까. 게다가 사용인과 경호팀까지 싹 다 물갈이가 되는 실정이니 의심을 사지 않을 리가 없다.
“일단, 전 집사를 데려와.”
잠깐 비서가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사이 라일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생각에 빠졌다.
‘왜?’라는 의문은 줄곧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처음엔 해진에게, 그다음엔 저택의 인원들에게.
당연하지만 그의 가문에서 일하는 이들은 높은 연봉을 받는다. 해진에게 배정된 액수가 아무리 더 많아도 그들이 고액 연봉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며 범죄 행위를 한 이유가 무엇일까.
기록된 CCTV를 전부 검토하며 라일은 해진이 어쩌다가 이런 늪에 빠졌는지는 어렴풋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만만한 손님이었으리라. 실수해도 언성 높이는 법이 없고, 확연한 불합리가 저를 덮쳐도 따지지 못하는 그런 손님.
그리고 무엇보다 저들의 주인이 무신경하게 방치하는 사람.
해진이 절실함에 점점 입을 다무는 사이 인간의 악의는 조금씩 커졌다. 종래에는 저택을 전부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욕심으로. 저들이 받는 많은 연봉이 고작 만만한 오메가 하나에게 들어가는 돈보다 적다는 게 못내 질투가 났을까.
그건 절대 해진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기회가 왔을 때 쉽게 인간성을 저버리는 놈들의 문제였다. 제 것이 아닌데 감히 탐하는 놈들의 잘못이다.
“데려왔습니다.”
고작 이틀 사이에 상당히 초췌해진 집사가 경호원의 거친 손속에 서재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기름진 그 머리칼을 보며 라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느라 굴러가는 눈알을 보니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주, 주인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짓을 한 거지?”
차가운 분노와는 다르게 한없이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그걸 보고 뭐라 오해했는지 전 집사의 얼굴은 금방 화색을 띠었다.
“이게 다 주인님과 이 저택을 위해서였습니다.”
놈은 오해라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마 같이 파티 홀에 억류되어 있다가 불려 나간 운전사가 온몸에 멍을 달고 돌아갔을 때 직감했으리라. 아주 많은 것들이 들통났다는 걸.
실제로 운전사는 고작 발길질 몇 번에 미주알고주알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털어놓았다. 가령 집사 놈의 더러운 취미가 오메가에게 억지로 이런 약물을 먹이기도 한다는 사실 따위의.
다른 사용인의 증언에 의하면 놈이 저 더러운 손으로 해진을 잡아끌었다고 했다. 히트 사이클이 와서 저도 모르게 막대한 페로몬을 뿜어내고 있었을 해진을 말이다.
그 장면만 생각하면 이상하게 라일은 혈관에서 바늘이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열성 따위가 저택에 머무르는 건 아무래도…….”
“그걸 왜, 네놈이 판단하지?”
멱살이 잡혀 파리하게 흔들리던 해진의 얼굴까지 떠올리는 순간 라일은 더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제어에서 풀려난 그의 페로몬이 살의를 가진 채 전 집사에게 달려들었다.
“컥, 커헉!”
페로몬으로 타인을 조종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가끔은 야만적인 동물이라도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 순간 라일은 본능에 저를 맡겼다. 고작 저따위 거짓말 때문에 그렇게 해진을 겁박했던 놈에게.
숨이 막히는 듯 금방 보랏빛 얼굴이 된 집사는 바닥으로 엎어졌다. 카펫 위로 질질 흘러내리는 타액을 보니 역겨움이 솟는다.
“내가 가만히 두고 본다고, 대신 이 저택의 주인이라도 된 것 같았나?”
이번에 물갈이된 사용인 대부분은 선친이 죽기 전부터 일하던 이들이었다. 당시 자진해서 그만둔 사람들을 제외하면 라일은 그들을 그대로 계속 고용했다. 연봉 또한 상당 수준 올려 주었다.
그건 일종의 입막음 겸 특별대우였다. 정원에서 치욕스럽게 죽어 버린 부모의 치부를 숨기려고. 무엇보다 이 저택 따위를 아끼는 마음이 없었기에 귀찮았다.
“커, 사, 살려…….”
페로몬으로 놈의 숨통을 남김없이 틀어막으며 라일은 조소했다. 그 특별대우를 받고 단체로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저들을 쉽게 내치지 못하리라 착각이라도 했을까. 베르무스의 큰 약점이라도 쥐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무리를 쥐락펴락하며 전 집사는 마치 이 저택의 주인이라도 된 양 착각을 키워갔으리라. 겉으로는 라일을 위하는 척 온갖 말도 안 되는 핑계로 합리화를 하면서.
그때와는 라일이 쥐고 있는 힘이 달랐다. 기고만장하게 주인의 자리를 넘볼 놈들이라면 뿌리까지 뽑아내야 할 때였다.
“그리고 입을 조심해. 앞으로 네놈의 처우는 진에게 달려 있을 테니.”
집사에 관한 건 다른 로펌에 맡기지 않고 그의 변호인단이 직접 처리할 것이다.
라일은 저를 피해자라고 묶을 생각은 없었으나, 이번 일에 이용당한 것도 사실이었다. 약물을 사용해 오메가에게 강제로 히트 사이클을 일으키는 건 중대 범죄였다. 그런 오메가를 겁간하는 건 물론, 거기에 다른 알파가 휘말리게 계략을 짜는 것도 중대 범죄다. 고작 횡령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무거운 형량을 안겨 주리라.
어쩌면 집사는, 라일이 이번 일을 또 덮으려고 해진을 압박하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또다시 베르무스가의 약점을 손에 틀어쥐고 싶어서.
놈이 이걸 의식하고 행동했는지, 진심으로 이따위 짓이 그를 위함이라 착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허흑, 컥!”
과연 그 형량으로 집사의 죄를 갈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라일은 이 일을 절대 쉽게 끝낼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