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치워.”
놈의 변명은 예상 그대로라서 더 들어 볼 것도 없었다. 그의 차가운 명령에 경호원이 들어와 전 집사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냈다. 마찬가지로 알파인 그는 라일의 막대한 페로몬에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불쾌한 페로몬이 코를 스치자 라일은 습관적으로 해진을 떠올렸다. 겨울 공기 같은 옅은 그 내음에 다가가고 싶어 몸이 달아오른다. 그러나 라일은 방을 뛰쳐나가는 대신 천천히 얼굴을 가리며 의자에 깊숙하게 기댔다.
애초에 놈이 저렇게까지 행동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라일이 그렇게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리라. 자신이 지난 5년간 해진을 그렇게 다뤄 왔으니까. 마음껏 휘둘러도 아무런 탈이 없을 것처럼 사용했으니까.
놈과 자신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라일은 못내 끔찍했다.
***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브라이트 씨.”
“…….”
사근사근한 말투의 사용인이 해진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며 물었다. 그 간질간질한 음색이 어색한 해진은 그대로 시선만 내려 음식을 살폈다. 환자에게 적당한 묽은 수프와 샐러드가 보인다.
지금은 이조차도 아직 버겁다. 부어올랐던 목구멍은 가라앉았으나 식욕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곁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용인의 시선이 버거웠다. 밥 먹는 걸 감시하던 눈길들이 잊히질 않는다.
해진도 사정은 전해 들었다. 얼굴이 익숙한 비서가 찾아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잃기 전 라일을 본 기억은 있었으나 자는 사이 이렇게 상황이 변할 줄은 몰랐다.
창밖에는 확연하게 많이 늘어난 경호 인력들이 짝을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저택의 분위기가 급변한 셈이다.
물론 가장 변했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 전부 새로 물갈이된 사용인들의 태도였다.
“…….”
가까스로 한숨을 삼킨 그는 겨우 스푼을 들어 올렸다. 물론 새 사용인들이 예전처럼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곁에서 그를 감시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못 먹는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라고 해 주었다.
그리고는 해진이 뭔가를 먹을 수 있도록 수시로 트레이를 들이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방법이 더 부담스러웠다.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몇 숟갈 뜨기도 전에 토기가 올라오지만 참았다. 지금 그를 지켜보고 있는 건 그때의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해진이 보기에도 퍽 걱정스러운 눈길이었다.
그런데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만…….”
“네. 무리하지 마세요. 나중에 또 가져오겠습니다.”
입을 가린 해진은 숨을 참느라 대꾸하지 못했다. 안쓰러운 눈길이 피부에 박히니 비참했다. 저택에서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감정이었으나 오늘따라 퍽 울렁인다. 저 사근사근한 말투가, 시선이.
그 사람들은 이제 없다고 했는데.
트레이를 수거한 사용인이 방을 나서자마자 해진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습관적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심코 라일이 앉아 식사하던 장소에 내리쬐는 해를 발견한 해진은 기이한 충동에 시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흠칫 놀라며 문을 바라보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새로 바뀐 이들은 무턱대고 그의 방문을 열어젖히지 않았다.
그걸 알지만, 해진은 잠긴 목소리로 밖을 향해 대답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저 노크 소리가 다시 울리고 말 테니까.
“브라이트 씨. 실례합니다.”
그러나 곧 노크 소리를 견디지 않은 걸 후회했다. 집사 옷을 입은 이가 들어오자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네. 괜찮아요.”
이불을 끌어 올리며 해진은 시선을 피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센 새 집사는, 이전 집사와는 다르게 노신사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다.
눈가는 웃음길을 따라 인자하게 주름져 있었다. 조용조용한 말씨는 언제나 부드럽게 방 안을 흘러 다녔다. 무엇보다 베타였기에 알파 특유의 불쾌한 페로몬이 없었다.
그런데도 해진은 그 검은 집사 옷 때문에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오늘은 모처럼 해가 나는군요. 안뜰 정원에서 시간을 가져 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티가 나게 위축된 해진을 안쓰럽게 보며 노신사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얼마 전 불미스러운 일로 해고된 집사의 전임 집사였다. 라일의 부모를 모시던 그는 그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회의를 느껴 집사 자리를 내려놓은 바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저택에 긴급하게 집사 자리가 비어 버렸고, 라일의 끈질긴 요청에 잠시 돌아오기로 했다.
다만 오자마자 너무나도 뜻밖의 손님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 집사의 만행을 간추려 들었을 땐 참담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해고된 전 집사는 그가 키워 낸 제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제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요.”
“그럴 리가요. 저택 내부에서 브라이트 씨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도련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알파이나 열성인 탓에 늘 열등감을 품에 안은 제자가, 노신사는 늘 안쓰러웠더랬다. 그래서 빠르게 집사 자리에 승진하려는 그의 욕구를 차라리 바람직한 욕망의 표출이라 이해했다.
마침 라일의 선대가 그렇게 가 버리는 바람에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조금 비뚤어진 그 열등감이 마음에 걸렸지만 잘 헤쳐 나가리라 믿었는데. 대체 어쩌자고 그런 나쁜 짓을 했단 말인가.
전해 들은 바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였다. 노신사는 더는 그 열등감을 이해하고 싶지도, 변호하고 싶지도 않았다.
주름진 시선이 다시 이불을 꽉 쥐고 있는 해진의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라일 도련님은, 어쩌다가 이렇게 사람을 아프게 만들었는가.
“…….”
분명 라일의 명령을 그대로 전했음에도 해진의 눈에는 금방 경계심이 깃들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위축되어 벌벌 떨었다면 이번에는 확연한 경계였다. 마치 그런 자유가 제게 허락되었을 리 없다는 뿌리 깊은 불신마저 보인다.
이렇게 잔뜩 다친 모습을 보며 노신사는 알 수 없는 책임감을 느꼈다. 이 청년을 햇살 아래로 나갈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 주시길.”
그러나 해진은 좀처럼 경계를 풀어 주지 않았다. 이쯤 되니, 노신사는 이전 사용인들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계심을 더 자극하지 않기 위해 매번 순순히 물러나는 게 요 며칠 동안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안타깝게도 해진은 단 한 번도 먼저 그들을 찾지 않았다.
조용히 물러나는 노신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진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혼자 힘으로는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같이 삼엄해진 경비가 안타까웠다.
***
“오늘도 침실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
해진의 소식을 들으며 라일은 초조하게 제 입가를 매만졌다.
비겁하게 바뀔 것이란 말 한마디만 던진 채 도망쳤다. 그런데 대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 하얀 얼굴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자꾸 귓가에 빗소리가 들렸다. 요 며칠은 비도 없이 맑은 날이 이어졌는데 기이한 일이었다.
라일은 원한을 사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기업이 돈을 번다는 건 필연적으로 다른 이의 몫을 탐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때로는 그것이 정당했지만, 대부분은 다른 경쟁자를 없애는 방식으로 베르무스는 성장해 왔다.
한참 사업을 확장하던 시기에는 테러에 두 번이나 휘말린 적도 있었다. 도산시켜 버린 회사가 원한을 품고 행한 일이었다. 본사 앞에는 거대 기업인 베르무스를 비난하는 시위가 왕왕 벌어지기도 했다.
이 모든 걸 잘 알지만 라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기업 이미지 악화로 매출이 하락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가 걸어야 하는 길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해진은 달랐다. 이렇게까지 가까이에 누군가를 둬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단순한 계약 관계라고 변명하기엔 이미 라일이 먼저 나서서 너무 많은 선을 부숴 버렸다.
무언가가 어긋나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밖에 나가도 된다는 걸, 똑똑히 전달했나?”
“네.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그저 혼자 있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
곤란하다. 왜 해진의 일에는 이리도 객관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을까.
소식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이할 정도로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정신을 잃은 채 녀석의 몸을 탐했던 걸 떠올리면 심장이 뛰었다. 필시 본능에 함몰된 그 감각이 거북하고 불안한 탓이리라.
덕분에 라일은 처음으로 가야 할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몇 없는 저택 내부의 CCTV에는 해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식당조차 한 번 간 적이 없을 정도로 극도로 외출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며 라일은 이제는 익숙하게 의심을 떠올렸다. 혹 사용인들이 그의 행동을 제한하지 않았는가 하며.
해진이 스스로 나오기를 거부했을 수도 있으나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앞으로는 그렇게 방 안에 갇혀 있다고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을 뿐.
그런데 도통 쉽지 않았다. 사용인들을 전부 갈아치웠음에도 녀석의 경계심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얼마나 뿌리 깊게 핍박했는지 감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차라리 지난 5년간의 행적이 더 많이 보였다면 파악이 쉬웠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