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37화 (37/101)

#37

라일은 한숨을 쉬며 CCTV가 이렇게 적은 원인을 떠올리곤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불륜이나 일삼는 한심한 꼬리를 밟히지 않겠다고, 그의 아버지는 그나마 있던 저택의 감시 체계를 이렇게나 줄여 버렸다.

선친은 귀족이었던 가문의 옛 영광을 생각하며 사용인들을 진짜 제 하인이라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인간이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사고방식이 오늘따라 더 짜증이 났다.

“회장님.”

“말해.”

“이번에는 새어 나간 정보를 다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저택이 봉쇄된 것을 떠나, 일전에 회장님께서 브라이트 씨를 모시고 병원에 갔던 사실이 같이 엮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때의 목격자 쪽에서 정보가 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전부 막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적당히 힘과 돈을 써서 무마해 버릴 작정이었으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트라우마로 쓰러진 해진을 병원에 데려갔던 일이 엮이다니,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 어떻게?”

“……그것이, 베르무스가의 저택에서 오메가가 다쳐 나간다는 소문입니다만…….”

“…….”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서 라일은 그만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사람들이 내는 악의적인 소문은 그런 뉘앙스가 아니겠지만 말이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는 고민을 거듭했다. 길을 잃은 와중에도 그가 해야 할 일들은 이렇게 착실하게 생겨나고 있었다.

찾아낸 해답은 하나 있었다. 해진에게 바뀔 것이라 했으니, 일단 바뀌어야 했다. 말을 백번 전해도 믿지 않는다면 행동으로 직접 알려야 하겠지. 어이없을 정도로 그를 떠밀어 대는 이 책임감을, 라일은 그렇게 표출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매번 해진이 무얼 하는지 물을 때마다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움직임 하나 없이 밥도 깨작인다면 건강하던 사람도 당장에 우울증에 걸리리라.

“회장님. 지금 상황에서, 브라이트 씨는 적어도 건강한 모습으로 이 저택을 나가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마찬가지로 착잡한 표정을 지은 비서는 무언가 도움이 될 자료가 있을까 싶어 태블릿을 뒤적였다. 그 모습을 보던 라일은 무거운 일거리를 또 늘려 주었다.

“그리고 저택 내부에 CCTV를 늘려.”

또 그가 못 보는 곳에서 해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꼴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번 일어났던 일이 두 번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리고 라일은 똑같은 일에 다시 당하느니 그냥 권총으로 제 머리를 쏴 버릴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제 적어도 저택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의 귀에 들어와야 했다.

“대대적으로 내부를 손보실 계획이십니까?”

잠깐 해진의 불편한 다리가 신경 쓰였으나 라일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CCTV를 다는 것 이상을 할 필요는 없겠지. 이 낡아 빠진 저택은 어차피 CCTV를 다는 것조차 큰 품이 들어간다.

“아니, 일단은 눈이 안 닿는 곳이 없도록만 해.”

그러니까 이건, 그냥 지나간 과오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함이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

라일이 해진을 찾아간 건 그로부터 이틀이나 더 지난 뒤였다.

당장이라도 쫓아가 빌어먹을 밥 좀 제대로 먹으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그가 저질러 둔 본사의 일도 문제였으나 무엇보다 해진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트 사이클이 지난 뒤 해진은 시도 때도 없이 체온이 변화했다. 겨우 그를 진정시켜 진찰한 의사의 말에 따르면 너무 갑작스럽게 우성의 페로몬을 많이 접촉한 탓이라고 했다.

그 설명을 듣는 내내 기묘한 간질거림이 피부 밑을 돌아다니는 감각을 느꼈다. 그 또한 해진의 페로몬에 영향받은 게 분명하다.

의사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라일은 저택으로 돌아와 녀석에게 향했다. 그 발걸음이 사뭇 다급했으나 정작 라일은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저택의 본관에 들어서자 경호원들이 그에게 절도 있게 인사를 했다. CCTV 체계의 구축이 끝날 때까지 임시로 세워 둔 이들이었다.

그 곁을 지나가던 그는 문득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경호팀에 알파가 이렇게 많았던가.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회장님.”

“아니. 계속 수고해.”

경호 같은 직업에는 알파의 비율이 꽤 높았다. 그러니 퍽 새삼스러운 감상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열성 알파였던 전 집사를 떠올리면 부아가 치밀어서 그러리라. 라일은 이 불쾌한 감각을 그렇게 생각하며 넘겨 버렸다.

계단을 오르니 해진의 방문이 보였다. 익히 본 밝은 파스텔 색조의 음각 무늬가 요란하게도 시야에 박혀 든다.

해진의 침실 문 앞에 잠시 멈춰 서 있던 라일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잠깐의 틈을 지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는 데 왜 시간이 느려지는지 퍽 이상한 일이었다.

“…….”

“…….”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해진의 얼굴을 퍽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한 순간 라일은 자신이 녀석과 살가운 인사를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엉거주춤 일어난 해진이 침대맡으로 내려섰다. 앙상한 발목이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라일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잠깐 얘기 좀 하지.”

녀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랑이는 그 머리칼을 보니, 방문을 열었을 당시 녀석의 표정이 어딘가 썩 좋지 않았던 것도 같았다.

라일은 저도 모르게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그런 그와는 다르게 해진은 자연스럽게 뒤돌아 침실 한쪽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로 향했다. 그 자그마한 뒤통수에 라일의 시선이 진득하니 따라붙었다.

서로 마주하고 앉은 뒤에야 해진은 다시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게 이상하게 긴장된 탓에 라일은 본론을 성급하게 꺼내 들었다.

“비서가 먼저 대충 사정 설명을 한 거로 아는데.”

“네.”

순순히 대답하는 해진에게는 얼핏 보였던 표정은 흔적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이라는 게 흔적도 없었다.

그 무심한 반응에 라일은 불편한 심정을 숨겼다. 이제 와 잘했다는 소리를 듣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건 아니다. 그저 전부 남 일이라는 듯 구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해고한 놈들에게는 소송을 걸 거야. 다만 법적 소송의 주체로는 널 세우지 않을 생각인데.”

“…….”

“소송의 당사자가 되고 싶다면 변호사를 지원해 주겠어. 다만 그렇게 되면 재판에 출석해야 할지도 모르고.”

“전 그냥, 아무것도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

두 번 생각도 하지 않는 그 태도에 라일은 조심스럽게 입가를 매만졌다. 비서에게 미리 들었으니 생각을 미리 정리해 놨을 수도 있다. 그걸 고려하더라도 역시 무언가 이상하다.

왜 이 순간 맨발로 밖을 헤매던 녀석의 모습이 생각나는지.

“……그럼 그들은 횡령이나 다른 업무 태만으로밖에 처벌받지 않게 될 거야. 괜찮겠나?”

그것밖에, 라고 표현하기에는 라일이 계획하고 있는 보복은 훨씬 컸다. 그런데도 괜히 도발하듯 해진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도 녀석은 재차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분명 전 집사에게 놈을 죽여도 시원찮을 정도로 수모를 당했을 텐데, 대체 왜.

“요새 계속 침실 안에만 있다고 들었어.”

“……그렇습니다만.”

이유 모를 갈급함으로 라일은 내뱉었다. 보고를 받을 때마다 움직임 하나 없는 해진의 태도는 확실히 피해자의 그것이었다.

물론 다리도 아프니 당분간 몸을 보전하는 편이 좋으리라. 문제는 식사량도 시원찮아서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혹 너무 방 안에만 박혀 있는 게 문제는 아닐까.

어쩐지 며칠 사이에 해진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변한 것도 같았다.

“이제 이 집에서 널 홀대할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러니 마음껏 돌아다니도록 해.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고.”

말을 뱉고 나니 다시 녀석의 다리 상태가 걸렸다. 병원을 갈 수 있어야 정확한 상태를 진단할 텐데, 파견되었던 의사는 당분간 정신적으로 무리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라일의 말에도 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도 꿋꿋하게 열리지 않는다.

살짝 마주쳤다가 사라진 해진의 눈빛이 궁금했다. 슬쩍 내리깔린 풍성한 속눈썹은 녀석이 라일의 앞에서 창문을 닫아 버렸던 그날처럼 해진의 시선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직도 옅게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해진의 쇄골이 옷 사이로 얼핏 보였다. 그 옅어진 흔적을 보니 이상하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계속 그런 해진을 살피던 라일은, 본래 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하려고 했던 말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일단, ……그간 있던 일은 사과하지.”

“…….”

여전히 해진은 묵묵부답이었다. 어차피 이럴 것이라 예상하고 왔는데도 그 침묵이 무언의 질타로만 느껴진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긴장한 적 없는 라일은 이런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자각했다.

애써 정신을 추스른 라일은 침착하게 준비해 온 말들을 꺼내 들었다.

“특히 그날, 노팅을 한 건 무척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러시겠죠.”

덤덤하게 긍정하는 해진과는 다르게, 정작 입을 뗀 라일은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이 마치 송곳을 뱉는 듯 느껴졌다.

이래서 페로몬에 휘둘리는 몸뚱이는 불편한 거였다. 어쨌든 덕분에 차가운 이성을 다시 일깨운 라일은 서류 몇 가지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그와 관련해 문제가 생긴다면, 최대한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처리하도록 하겠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