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38화 (38/101)

#38

이번 노팅은 저번과는 차원이 다른 실수였다. 그때보다 집요하고 오랜 노팅을 한 데다가 하필 해진이 히트 사이클 중이었다. 열성이니 그래도 임신 확률은 퍽 낮을 테지만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차마 해진에게 사고가 일어났을 때 수술을 하라고 강요할 수가 없었다. 이보다 더 사람을 너덜너덜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새로운 후계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분명, 설령 더 큰 원한을 사더라도 억지로 해진을 병원으로 밀어 넣는 게 맞으리라. 그런데도 라일은 여러 가지 방안 중 차마 그것만은 가져올 수가 없었다.

최선으로 택한 것이 지금 내민 서류였다. 양육비는 지원하겠으나 그 이상의 상속 문제에는 관여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애초에 그가 실수하지 않았으면 되는 일인데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라일은 해진과 관련해서는 제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어렴풋하게 깨달아 가고 있었다.

이러한 라일의 걱정이 무색하게 해진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반항하지 않고 수술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덤덤한 그 목소리와는 다르게 라일의 심장 소리가 유난히 컸다.

분명 기꺼운 일이었다. 애초에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해진의 입장에서도 원치 않는 아이일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렇게 초조하지.

제 안을 소용돌이처럼 휘감는 이 감각이 이제 도를 넘을 정도로 그의 신경을 거슬렸다. 정상이 아니다. 해진이 라일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아 며칠 몸 상태가 이상했던 것처럼 라일 자신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

영문 모를 불쾌함은 애써 내리누른다. 해진과의 협상은 예상보다도 더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혹시 보상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베르무스 씨.”

“…….”

단호하게 그 말을 끊고 들어오는 음성에 이번엔 등줄기가 다 서늘했다. 라일은 무심코 비가 온다고 생각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예상이 무색하게 하늘은 화창하기만 했다.

“이제 이곳을 나가고 싶습니다.”

“…….”

이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라일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충격을 삼켰다. 자신은 왜 해진이 당연하게도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까.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조항은 해진이 요구한 단 하나의 조건이었다. 마치 그가 예전 계약을 할 때 부모를 보러 가는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했던 것처럼.

그 하나의 조건마저 뭉갠 전적이 있던 라일은 이번 요구를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분명 그랬는데, 차마 선뜻 그러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건……, 다시, 생각해 줬으면 하는데.”

“이유는요.”

슬쩍 다시 눈을 내리깐 해진이 건조하게 물었다. 내뱉은 미약한 한숨은 라일의 피부를 쩍쩍 갈라놓을 듯 달려들기까지 했다.

아까부터 알게 모르게 라일을 감싸고 있던 해진의 페로몬이 미약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 감각이 마치 거대한 사포처럼 거칠게 느껴져서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야 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잖아. 내 책임이니 일단 이곳에서 회복에 주력하도록 해. 지원은 아낌없이 해 줄 테니.”

그래. 그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해진은 이 저택의 전무후무한 피해자였다. 그러니 라일에게는 그런 해진의 건강을 염려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자꾸만 빗속에서 등을 보인 채 걷는 해진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녀석은 지금 그의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데.

그러나 겨우 짜낸 대답에 해진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비스듬하게 올라온 시선이 라일의 턱 끝에 닿는다.

“우리가, 사사로이 그런 걸 신경 쓸 사이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사롭게 얘기할 사이던가?’

벌써 몇 번이나 들은 환청이, 이제는 해진의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순수한 의문으로 구성된 저 말투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언젠가 동요하는 라일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던 것처럼, 철저히 기대가 배제된 목소리였다.

그걸 깨달은 라일은 무심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해진의 페로몬에 얼핏 닿았던 손등에 통증이 느껴진다. 그 사포같이 거칠거칠하던 감각이 이제 걷잡을 수 없이 까칠해져 마치 피부가 쓸려 나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차라리 해진의 말이 비꼬는 감각을 담고 있었다면 나았을까.

“……기사를 전부 막을 수가 없었어.”

“기사요?”

“그래.”

멍하니 제 손등을 바라보던 라일은 비서가 일러 주었던 핑계를 떠올렸다. 아까부터 은연중에 들이마시던 해진의 페로몬이 폐 속부터 시작해 저릿저릿하게 온몸을 타고 흘렀다. 꼭 수천 개의 개미가 속을 헤집는 것 같아서 그는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더는 이상한 것들이 속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게.

“지금 베르무스가는 익명의 오메가를 핍박하고 있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지.”

“…….”

해진의 눈빛이 점점 꺼멓게 죽어가는 걸 보니 그의 속도 흙탕물처럼 흐트러졌다. 그 감각을 모조리 무시한 라일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에 제 의지를 담았다.

붙잡아야 한다.

“공교롭게도 그건 사실이고. 이 추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협조가 필요해.”

“제게 뭘 바라시는 겁니까.”

“이전의 계약을 이행하라는 소리는 하지 않아.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이 저택에서 요양 후, 건강한 모습으로 걸어 나가. 그게 필요해.”

“…….”

단지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이 추문까지 잠재울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리라. 해진은 무척이나 협조적으로 굴고 있었고 라일은 이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녀석이 이 저택에 남아 있기만 한다면.

“남은 계약 기간만 채우다가 간다고 생각해도 좋아. 그러면 규정해 놓았던 보상이 함께 따라갈 테니.”

까맣게 죽은 시선마저 스르륵 아래로 향했다. 그들 사이에는 덧없는 약속만 까맣게 자아낸 서류가 의미 없이 흩어져 있을 뿐이다.

바짝 말라 달라붙는 목구멍을 애써 움직이며 라일은 쐐기를 박았다. 덧없는 시선일지라도 마주 보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기이한 생각을 하면서.

“난 책임을 지려는 것뿐이야.”

“…….”

서류 위의 글자를 덧없이 읽으며 해진은 생각에 잠겼다. 몇 번이나 반복되니 모를 수가 없었다. 라일은, 확실히 이상했다.

특히나 노팅을 두 번이나 한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이상 반응이었다. 아무리 해진이 이런 형질에 관해 무지하다고는 하다 노팅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잘 알았다.

임신 여부를 떠나서 알파의 의지가 개입되는 행위가 어떻게 실수로 두 번이나 일어난 걸까.

설마하니 라일이 노팅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보아 온 라일은 그런 집착을 가질 만한 알파가 아니었다. 그러니 몸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거다.

늦은 밤 제가 묵던 숙소까지 들이닥쳤던 라일을 떠올린 해진은 까맣게 죽어가는 제 마음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했다.

왜인지 라일이 그를 놔주지 않을 것만 같아서.

“베르무스 씨.”

“……말해.”

“다른 오메가를 찾는 건,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뭐?”

뜬금없는 물음에 라일은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갑자기 다른 오메가라니.

그러나 이내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것들이 떠오른다. 해진을 다시 데려오면서 라일은 분명 결심한 바 있었다. 혹 페로몬이 구속력이라도 갖는 건 아닐까 의심하며 다른 오메가와도 계약해 해진의 잔상을 지우겠다고.

그 이후로는 계약 기간 또한 짧게 잡아야겠다고 고민했었다. 몸에 이 이상 걸리적거리는 게 생긴다면 곤란하니까.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그걸 생각도 안 하고 있었지.

“분명, 말하면 이제부터 바뀔 거라고 했죠.”

“……그래.”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라일은 지금 제가 대체 어떻게 소리 내서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파르르 떨리며 바닥으로 가라앉은 해진의 페로몬에는 짙은 체념이 녹아 있었다. 오랜 기간 켜켜이 쌓여 단단하게 굳어 버린 감정이었다.

그간 이 저택에서 홀로 저런 무거운 감정을 빚어내 왔다는 것처럼.

“저는 이제 더 떨어질 곳이 없어요.”

“…….”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해진의 말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라일이 그대로 무시하고 짓밟아도 저항할 수 없을 것처럼 약하디약했다.

그런데도 라일은 도무지 그걸 무시할 수가 없었다. 꼭 최후통첩처럼 느껴지는 이 말을 절대 가볍게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계약 기간이 3개월이라 했던 말이 꼭 지켜졌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의 눈이 곧게 마주쳤다. 그래서 라일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챕터 6>

해진을 돌보던 의사가 돌아가기 전 라일을 찾아왔다. 일단 몸살이나 히트 사이클의 여파는 지나갔기에 저택에서 아예 나가는 길이었다.

“몇 번 정신과 진료를 권했습니다만, 전부 거부하셨습니다.”

“……이유도 말했나?”

안 그래도 라일도 염두에 두고 있던 사안이었다. 지금처럼 바늘 하나에도 저렇게 경기를 일으킨다면 앞으로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다리 때문에 혹시 더 진료가 필요해도 병원에 갈 수가 없으니 곤란했다.

“그것이……. 겉보기에 멀쩡하기만 된다고 하시는데 혹,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신지요.”

“…….”

건강하게 걸어 나가란 말을 보기에만 멀쩡하면 되지 않냐고 받아들이다니. 라일은 답답한 가슴 때문에 옷이 다 불편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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