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39화 (39/101)

#39

“일단 정신과 진료를 계속 강요하는 것도 스트레스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지금 같은 몸 상태로는요. 일단 체력 회복이 좀 더 중요한 시기로 판단됩니다.”

“그래.”

“다만 제 전문분야가 아니니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시는 걸 권합니다.”

“참고하지.”

인사를 남긴 의사는 홀가분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섰다. 그럴 만도 했다. 라일이 안겨 준 막대한 진료비를 들고 신경 쓸 것이 유독 많았던 환자도 뒤로하는 것이니까.

그런 의사와는 다르게 라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고민으로 빠져들었다. 일단 몸을 회복해야 다음 치료를 하든 할 텐데 해진은 도통 기운을 차리질 못했다. 듣기로는 여전히 식사량이 형편없다고.

매번 확인할 때마다 좋은 소리가 들려오질 않는다. 착잡한 심정이 된 라일은 갑갑하게만 느껴지는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풀어내며 두통을 참았다.

계약의 끝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소리가 왜 이리도 거슬리는지.

가야겠다면 놓아줘야 한다. 정말 녀석을 감금이라도 할 게 아닌 이상 그게 당연하지 않은가. 애초에 일단 임시로 데려다 놓고 다른 방법을 찾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을까.

3개월이라 약속하고 해진을 다시 저택으로 데려온 지 3주 정도 되었다. 그러니 이제 두 달이 조금 넘는 시간만 남은 셈이다.

그걸 떠올리자 다시 숨통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목에 손을 댄 라일은 자신이 방금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는 걸 상기했다.

여러모로 답답한 나날이었다.

***

지갑 속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면서 해진은 가만가만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직은 눈을 감고 있어도 형의 얼굴이 잘 떠올랐다. 그런데 부모님의 얼굴은 자꾸만 병원에 누워 있던 마른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는 게 아닌가.

이왕이면 가장 좋았던 시절의 얼굴로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해진은 틈이 날 때마다 지갑에 꽂아 둔 사진을 가만가만 매만지며 눈에 담았다.

히트 사이클로 인해 ‘사고’가 생겼던 날 이후, 정신을 차린 해진은 뒤늦게 지갑을 찾았다. 침대 사이에 끼워 둔 것은 다행스럽게도 침실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안에 든 사진을 보고 해진의 것으로 짐작해 챙겨 두었다고 했다. 청소하다 그걸 발견한 사용인은 해진이 지갑을 떨어트려 침대 사이에 끼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매일 같이 침실의 시트와 이불이 바뀌었다. 청소하는 범위도 엄청 꼼꼼해졌다. 덕분에 더는 지갑을 숨길 만한 곳을 찾을 수 없게 된 해진은 낡은 캐리어 안에 지갑을 넣어 두어야 했다. 그래도 이제는 누가 훔쳐 가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멍하니 사진을 보는 사이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치 가족의 사진이 저를 지켜 주기라도 할 것처럼 지갑을 한 번 꽉 쥐었던 해진은 대답했다. 곧 음식을 올린 트레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어떨 땐 정신 차리면 이틀이 훅 가 있기도 했다. 그런 멍한 와중에도 식사 시간은 고역이었다. 저기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시선은 여전히 바늘같이 아프다.

그래도 해진은 억지로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형편없는 몸 상태가 문제라면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똑바로 걸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조건이라면 밥을 먹지 못할 것도 없었다.

억지로 모든 음식을 삼켜내자 잠자코 있던 사용인이 얼른 다가와 트레이를 거둬 갔다. 그러면서 깨끗해진 접시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악의 없는 상냥한 음색이 해진에게 거침없이 쏟아졌다.

“요새는 잘 드시네요.”

“…….”

누가 방 안에 같이 있는 걸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사용인은 일이 끝나면 금방 자리를 비워 주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트레이를 수거한 사용인은 미적거리지 않고 곧장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대 위에 못 박혀 있던 해진은 툭툭 가슴을 두드렸다. 억지로 삼킨 탓인지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제 손에 억지로 포크를 들려 주던 검은 옷의 집사가 기억난다.

“욱.”

벌떡 일어난 해진은 구르듯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발목에서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변기를 잡자마자 구토가 올라왔다. 겨우 삼켜낸 음식물은 그간 쌓인 울음이라도 되는 듯 밖으로 빠져나왔다.

“허억, 우욱.”

여전히 해진은 그 부담스러운 시선들이 버거웠다.

***

“CCTV 구축이 완료되었습니다.”

“빠짐없이 잘해 두었나? 서버는 원래대로 이곳 본사에 자동 백업되도록 만들어.”

감시 체계는 확실히 이원적으로 해 두는 게 마음이 편했다. 저도 모르게 선친의 전례를 따라가는 것 같아서 라일은 불쾌했으나 무시했다. 또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CCTV 기록까지 은폐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네. 한번 보시겠습니까.”

태블릿 하나를 조작해 화면을 띄운 비서가 라일에게 그걸 내밀었다. 화면에는 저택 내부의 복도 중 하나가 들어왔다. 침대 시트를 든 사용인 하나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그걸 바라보던 라일은 충동적으로 지시했다.

“……진의 방을 켜 봐.”

“네.”

비서는 별말 없이 해진의 방에 딸린 응접실을 화면 위로 띄웠다. 해진의 침실과 화장실에는 당연하지만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외의 모든 곳에는 CCTV가 설치될 거라는 말도 빠짐없이 해 두었다. 특히나 손님방의 옷장은 주요 감시 대상이라는 점도 알려주었다.

전례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해 둔 조치였으나 불편한 것도 사실이리라. 그런데 해진은 그 말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고 했다.

잠깐 멍하니 미동 없는 응접실 화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 속으로 불쑥 검은 머리가 들어왔다.

“…….”

순간적으로 당황한 라일은 재빨리 화면을 끄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화면 가득히 녀석의 모습이 들어오니 왜인지 몸이 덜컥 굳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해진은 이상하게 더 작아 보이기만 했다. 분명 요새는 밥을 적당히 잘 먹고 있다고 했는데 마른 몸은 여전해 보인다.

옷방에 볼일이 있는지 해진은 느릿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갔다. 옷방 문이 달칵 열릴 때까지 라일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러니 꼭 감시를 위해 온 곳에 CCTV를 설치한 것만 같았다.

그걸 자각한 순간 라일은 반사적으로 화면을 꺼 버렸다. 눈치를 보던 비서가 얼른 태블릿을 가져갔다.

“……요새는 잘 먹는다고?”

“네. 점심 식사도 남기지 않고 다 드셨다고 했습니다.”

“…….”

잔상처럼 남은 해진의 모습이 자꾸만 앞을 떠다닌다. 분명 여전히 지나치게 말라 보였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라일은 이제 습관처럼 의심을 떠올렸다. 혹, 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이전의 범죄자 새끼와는 다르게 라일이 초빙한 이번 집사는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선친의 일로 사임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 계속 집사 자리에 남아 있었을 터.

그러나 라일은 이전 집사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었다. 제 앞에서는 늘 납작 엎드리던 놈을 왜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저녁에 진의 방으로 찾아갈 거야.”

“네, 그럼 집사에게 말씀 전하겠습니다.”

“아니. 알리지 마.”

아무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야겠다. 또 누군가가 저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

퇴근을 한 건 마침 저녁 시간대였다. 손목의 시계로 시간을 가늠한 라일은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침 해진이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단지 진짜로 잘 먹고 있는지만 확인할 작정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라일은 바쁘게 녀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저택 곳곳에는 눈에 띄지 않게 설치된 카메라들이 번뜩이고 있었다. 저택의 외양을 해치지 않고 최대한 훼손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힘썼다고 했다. 저택의 보존 따위 라일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말이다.

고요한 복도를 지나며 몇몇 사용인을 마주쳤다. 전부 낯선 얼굴이지만 신원 하나는 확실하게 보고 뽑았다. 앞으로도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생각을 흘려보내며 라일은 해진의 방을 두드렸다. 안쪽에 사용인이 없는지 아무런 응답이 없기에 일단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렇게 해진의 침실까지 다가간 라일은 문득 안에서 들리는 고성에 고개를 번뜩 들어야 했다.

“브라이트 씨! 괜찮으세요?”

해진의 이름과 함께 사용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라일은 저도 모르게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용인은 침실 안쪽에 있는 화장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응접실과 연결된 메인 화장실과는 다르게 작은 세면대와 간단한 용무만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방 안에는 식사용 트레이가 한쪽으로 거칠게 밀려나 나동그라져 있었고, 반쯤 남은 음식들이 사방으로 쏟아져 난장판이었다.

“브라이트 씨!! 문 좀 열어 보세요! 의사를 부를까요?”

“무슨 일이야!”

사용인은 갑자기 나타난 라일을 보고 놀란 낯을 했다. 화가 난 라일이 재차 묻자 다시 걱정스럽게 화장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브라이트 씨께서 갑자기 속이 안 좋으신지 뛰어 들어가셨어요. 그런데 한참 지나도 안 나오셔서…….”

“진. 문 열어 봐.”

그 말을 듣자마자 라일은 사용인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던 사용인과는 다르게 퍽 힘이 들어간 손으로.

안에서는 소름 끼치는 적막만 흘렀다. 사용인의 말대로 그저 속이 좀 안 좋았을 뿐인지도 모르는데 미친 듯한 불안함이 라일을 잠식한다. 그렇게 한참 문을 두드리는데 문득 해진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주 희미하고 티끌만큼 남아 있는 그것은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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