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40화 (40/101)

#40

“진!”

그걸 알아차린 순간 라일은 눈앞에 불꽃이 튀는 감각을 느꼈다. 두드리는 손에는 이제 힘이 너무 들어가서 문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그런데도 안쪽에선 대꾸 하나 없었다.

심장이 어딘가에 꽉 끼어서 쥐어짜지는 감각이 들었다. 그걸 견디지 못한 그는 결국 조금 물러났다가 있는 힘껏 어깨로 문을 밀었다.

여태 굳게 닫혀 있던 것과는 다르게 문은 싱겁게 부서졌다. 라일은 성급하게 잔해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한쪽으로 향했다. 해진의 페로몬이 가장 진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진! 정신 차려! 의사를 불러! 당장!”

“네, 네!”

얼굴이 흥건하게 젖은 해진은 세면대 옆에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방금 라일이 문을 부수며 들어왔는데도 허공을 보며 멍하니 있기만 했다.

그 모습에 미친 듯이 불안해져서 얼른 다가가 해진의 어깨를 감쌌다. 살짝 흔들며 주의를 끌어 봐도 시선은 돌아오질 않는다.

다급하게 몸 이곳저곳을 살폈으나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진, 무슨 일이야. 정신 차려 봐.”

“……눈.”

“뭐?”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몹시 작았다. 라일은 해진의 입가로 바짝 붙으며 귀를 기울였다. 저도 모르게 끌어안은 해진의 몸은 조금씩 계속 떨리고 있었다.

“눈이 계속 쳐다보고 있어.”

“쳐다본다고?”

“계속.”

“내가 누군진 알겠나? 여길 좀 봐봐.”

품 안에 쏙 들어오는 해진은 정말이지 작았다. 이렇게까지 작은 체구였나 싶을 정도로.

어깨를 쥔 손에서는 앙상한 뼈대가 느껴졌다.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 라일을 감싸고 올라왔다. 아까 어딘가에 단단히 끼인 것 같던 심장은 여전히 거세게 옥죄이고 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라일은 그대로 해진을 안아 들어 올렸다. 의사를 부른다 해도 시간이 더 걸린다는 걸 상기하자마자 몸이 절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저항 하나 없이 품에 안긴 해진의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 불길한 몸짓을 보며 라일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꾸 노크 소리가 들려.”

자꾸 뜻 모를 소리를 하는 해진 때문에 마음이 끝도 없이 다급했다.

***

“무슨 짓을 했어. 설명해.”

“그것이…….”

저택을 나간 지 하루밖에 안 된 의사는 다시 불려 온 상황이 얼떨떨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곧 해진의 몸 상태에는 별 이상이 없고 정신적인 문제일 거란 말만 했다. 혹시 그게 아니라면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해야 알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지금은 도무지 병원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라일은 트라우마에 빠져 벌벌 떠는 해진의 모습을 이전에도 본 적 있었다. 병원에 억지로 끌고 간다고 하더라도 저번처럼 발작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방도가 없는 이 상황에 라일은 못내 화가 났다.

일단 해진을 눕혀 둔 뒤 함께 있던 사용인을 거세게 추궁했다. 억울한 얼굴이긴 하나 사용인은 열심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분명 해진은 요 며칠 놀라울 정도로 밥을 잘 먹어 주었다고.

“그래서 요새 잘 드셔서 좋다고 말씀드리고 있는데, 주인님이 노크하시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라니. 해진도 분명 자꾸 노크 소리가 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게 문제일까.

무엇보다 저 말을 들어도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침실 안까지는 CCTV를 달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새로 바뀐 사용인이 해진을 홀대할 확률은 적긴 했다.

이 답답한 상황에 라일은 초조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끝에는 아직도 벌벌 떨던 해진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작고 미약하던 그 떨림은 라일의 머리에 닿을 즈음엔 거대한 지진이 되었다.

“집사는 어딜 간 거야.”

잘 지켜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집사는 공교롭게도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개인적인 용무로 외출을 했다고.

차마 의자에 앉을 수도 없어서 라일은 초조하게 해진의 방에 딸린 응접실을 왔다 갔다 했다. 도무지 멀리 가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또 눈을 뗀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봐.

그는 해진이 구역질을 했다는 걸 떠올리곤 곤혹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임신한 걸까. 이런 쪽으로는 관심을 둔 적이 없기에 언제쯤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알 수 없었다.

몸으로 먼저 그걸 알아차린 해진이 패닉에 빠졌을 수도 있겠다. 원치 않은 아이라서 그렇게 동요를 했을지도.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거칠게 문지른 라일은 문득 천장에 새로 달아 둔 CCTV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눈이 계속 쳐다본다는 말도 했었지.

CCTV를 달아 둔 게 혹시 감시로 느껴진 건 아닐까. 감시가 목적이긴 했으나 라일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느꼈을 수도 있겠다. 녀석은 원래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으니 집사는 미처 그 거부감을 읽지 못했을 거고.

이러나저러나 전부 라일 자신이 원인인 것 같았다. 애초에 해진이 저런 트라우마를 갖게 된 것도 자신 때문이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숨조차 크게 쉴 수가 없었다. 행여 그 호흡이 다른 방에 누워 있을 해진에게 닿아 버릴까 봐.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에 있던 사용인들과 라일은 반사적으로 응접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노크 소리가 오늘따라 천둥처럼 느껴졌다. 해진이 언급하고 나니 이유도 모른 채 그게 못내 거슬렸다.

그의 눈짓에 얼른 가까이 있던 사용인 하나가 문을 열었다. 개인적인 용무로 외출을 했다던 집사였다.

“집사. 왜 이런 때 자리를 비우신 겁니까.”

“도련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말해오는 집사를 바라보던 라일은 한숨을 쉬며 한쪽에 있는 의자로 향했다. 같이 다가와 반대편에 앉은 집사는 뜻밖의 소리를 했다.

“예전에 이곳에서 일하다가 해고된 사람을 만나고 왔습니다. 얼마 전의 그, 불미스러운 일로요.”

“뭐라고요?”

뜬금없는 소리에 라일은 인상을 썼다. 노신사는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용인이 건네주는 차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급히 돌아오기라도 한 듯.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속내를 조금 떠보고 싶어서 저택 업무에 불만 있는 척을 좀 했습니다. 이해해 주시길.”

“……말하세요. 그 일로 고소를 당해도 다 해결해 줄 테니, 빨리.”

직감적으로 해진의 상태에 관해 묻고 왔다는 걸 눈치챈 그가 대답을 종용했다. 그 솔직한 모습을 보며 푸근하게 웃던 노신사는, 돌연 낯을 굳혔다.

“……제임스 그놈이 참,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더군요.”

“…….”

넋두리같이 전 집사의 이름을 부르며 한탄하는 그를 라일은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무언의 압박에 쓴웃음을 지은 노신사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렵다는 듯 그간 있었던 자세한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들이 해고되기 얼마 전까지는 브라이트 씨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곁에서 감시하게 했다더군요.”

자꾸 누가 쳐다본다는 게, 이런 뜻이었을까.

꼭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라일은 그간 해진이 밥을 굶기만 했지, 이런 쪽으로까지 학대당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놈들이 해고되기 얼마 전이라는 건 분명, 해진이 말랐다는 것을 라일이 신경 쓰기 시작할 때였다.

그저 잘 먹이라고 했을 뿐인데.

“특히 그들이 준비했던 마지막 식사는 전 집사가 직접 가지고 들어갔는데, 강제로 먹였다고 합니다.”

마치 사육하는 가축이라도 들이듯, 해진을 그의 앞에 밀어 넣으려던 전 집사의 만행이 떠올랐다. 이제야, 전 집사가 그의 명령을 대체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짓누르면서 라일은 의자에 푹 기대었다.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과거에 저지른 잘못만이 거미줄처럼 놓여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브라이트 씨가, 저를 너무 껄끄러워하셔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반응에 확연한 이유가 있어 보여서요. 특히 제 복장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듯하더군요.”

집사라는 존재 자체가 해진에게는 대못 같은 아픔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닐까. 검은 정장을 입은 집사를 바라보던 라일이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이렇게라도 원인을 알았다면 당장 조처를 해야 했다. 한번 그걸 미루었다가 무슨 꼴을 봤는지, 이제는 충분했다.

“……집사, 당분간은 의복은 다른 걸 입어 주셔야겠습니다. 집사…라는 호칭도 그만두죠.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도련님.”

초조하게 입가를 매만지며 라일은 해진의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몇 번이고 그것이 뇌에 새겨질 때까지.

“그리고 앞으로 방에 노크는 하지 마세요.”

“노크 말씀이십니까?”

“네. 모든 저택에서 못 하게 하세요. 대신 종이라도 달아서 다른 방법으로 알리도록 하죠.”

무의식적으로 시선은 해진이 누워 있을 침실로 향했다. 이 응접실을 불안하게 내내 돌아다니면서도 끝내 시선은 그쪽을 향했다. 어차피 굳게 문으로 막힌 곳이라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라일은 끈질기게 그곳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눈을 감아도 해진의 잔상이 눈앞을 맴돈 자는 꽤 되었으니까.

“도련님.”

“말씀하세요.”

“그럼 이제 손을 좀 치료하시죠.”

뜬금없는 소리에 라일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아까 문을 부술 때 다친 것인지 미약하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를 보고 나서야 아픔이 느껴진다는 게 퍽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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