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오늘 퇴근이 늦으실 거라 전해 두었습니다. 기다리지 말고 주무시라는 말도요.”
“별다른 말은 없었나?”
“없으셨다고 합니다.”
“…….”
사실 해진이 저를 기다리지 않을 걸 안다. 그러나 라일은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저를 기다려 달라는 염치없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매일 가던 그가 연락도 없이 안 온다면 눈에 띌까 봐, 그게 마음에 걸렸다.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타인의 감정 따위에 신경 써 본 적이 없는데.
최근 퇴근 후엔 줄곧 해진을 보러 가는 라일이었다. 물론 처음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저택에 도착하면 매번 저절로 발걸음이 해진의 방으로 향했다.
회사에서도 온종일 해진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탓일지도 모른다. 보고를 들어도 이상하게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책임감이 대체 뭐기에 이렇게까지 녀석이 신경 쓰이는 걸까.
“알았어. 나가 봐.”
“네, 회장님.”
“……혹시 무슨 소식이 들린다면 바로 보고하도록.”
“네.”
막상 그 방에 도착하면 침실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저 녀석의 방 응접실에 어중간하게 서서 얼굴을 살피다가 돌아오기 일쑤였다.
얼굴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 이상하게 온종일 품고 있던 의구심이 해소되는 기이한 기분을 느낀다. 찾아온 저를 곤혹스럽게 쳐다보는 표정에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애초에 나란히 앉아 대화할 처지도 아니지 않은가.
보고 받은 대로 밥은 잘 먹고 있는 건지 해진의 얼굴은 나날이 좋아지긴 했다. 해쓱하던 볼에 아주 조금 살이 오른 것도 같았다. 다만 그 지나치게 하얀 낯빛은 여전했다.
이렇게 매일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가던 그가 불쑥 안 나타난다면, 기대 따위는 하지 않던 해진에게도 눈에 띄지 않겠는가. 그걸 알아차린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걱정으로 안 붙여도 될 말을 붙인 것은 그저 그래서였다. 어쨌든 이제 생각하니 조금 과한 걱정이긴 한 듯하다.
머리 한쪽을 점령하고 있는 해진의 검은 머리칼을 애써 밀어낸 라일은 들고 있던 서류의 검토를 시작했다.
다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이번엔 하얀 바탕의 검은 글씨가 꼭 녀석의 속눈썹이 툭 떨어져 있는 걸로 보였으니까.
***
거의 새벽에 가까운 밤. 라일은 가까스로 저택에 도착했다.
본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업무가 끝나면 그는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고 도심의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어졌다. 쓸데없는 충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라일은 내일 아침이 조금 더 바빠지는 걸 기꺼이 감수했다.
그렇게 도착한 저택에는 마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별일 없었나.”
저녁까지 새롭게 들어온 보고는 없었다. 그래서 가벼이 물었는데 마크는 할 말이 있다는 듯 그를 한쪽으로 안내하며 대답을 꺼냈다.
뜻밖의 반응에 잔뜩 긴장했던 라일은 곧 들려오는 소식에 멍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별일은 없었습니다만, 브라이트 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네.”
들려오는 말이 머릿속으로 잘 들어와 박히지 않았다. 그간 해진이 먼저 라일을 찾았던 건 부모님을 보러 가지 못했던 그날 밤뿐이었으니까.
다시 떠오르는 기억에 라일은 씁쓸하게 입매를 일그러트리며 걸음을 옮겼다. 잠깐 통 뛰어올랐던 마음이 이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제 방에 들를 생각도 못 한 채 라일은 바삐 걸었다. 이미 늦은 시간인데 자고 있진 않을까 고민한 것도 잠시, 종을 울리자 응접실의 문은 금방 열렸다.
“……나를 찾았다고 들었는데.”
빤히 그를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가 이상하게 몸을 옭아맨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한 몸이 우스울 정도다. 고작 해진이 저를 먼저 불렀을 뿐인데.
“네. 들어오세요.”
그 한마디에, 겨우 몸이 삐걱대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해진이 가리키는 의자 쪽으로 다리가 홀린 듯이 걸어간다. 꼭 조종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문득 이 방에 찾아온 목적을 상기하고는 정신을 차렸다. 혹시 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이제 찾아오는 짓은 그만하라는 축객령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해진이 꺼내 드는 소리는 상상 이상의 악몽이었다.
“이제 몸이 회복된 것 같으니 내일 저택을 떠날까 합니다.”
악몽,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직 잠도 들지 않았는데 라일은 줄곧 보던 검은 꿈이 숨통이 짓누르는 기분을 느꼈다.
시선이 반사적으로 해진의 몸을 훑었다. 아직도 가냘픈 몸은 그가 얼마 전 품에 안았을 때처럼 마르기만 했다. 검은 머리칼과 대비되는 낯빛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한참 상태가 좋지 않을 때와 비교한다면 조금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라일의 눈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직 멀었어. 무슨 소리야.”
라일은 제 목소리가 흡사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성이 나 진동하는 가슴을 가라앉힌다. 늘 그랬듯 해진이 이 저택을 나가고 싶어 할 뿐이다. 이게 이렇게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다가올 일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왜 이리 가슴이 진동하는지.
그의 말에 해진의 얼굴이 사뭇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무언가 이 저택에 녀석을 괴롭히는 것이 있는 거다. 대체 그게 무얼까.
“베르무스 씨. 저는 베르무스 씨와 계약 외에 다른 걸 주고받지 않습니다.”
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왔다.
새삼스러운 자각에 라일은 곤란하게 제 입을 가렸다. 정말로 매번 찾아오는 게 불편했던 걸까. 자신은 아무것도 요구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해진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의 말은 실상 라일과는 아무것도 주고받고 싶지 않다는 말과도 같았다. 당연한 소리였다. 그들 사이에 놓인 건 잘못과 그에 따른 책임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이런 느낌일까. 꼭 뭔가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너에게 그런 걸 요구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곤란하다는 얼굴로 꿋꿋하게 말을 잇는 라일을 보면서 해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낮에 문득 생각난 이상한 감각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 해진의 속을 맴돌았다. 처음에는 그저 묘한 따가움에 불과한 감각이었다.
그런데 생각을 거듭할수록 아픔이 점점 커져 갔다. 이제 돌아보니 그곳에 있던 상처가 꽤 컸다는 것처럼.
라일이 제 방에 찾아올수록, 해진의 안위가 궁금하다는 것처럼 굴수록 이상했다. 그는 왜 이런 귀찮은 짓을 하는 걸까. 해진에게 가해진 수모가 신경 쓰일 수는 있겠다. 책임을 운운할 정도면 해진이 고통받았음을 인식할 정도는 되는 것 같았으니.
그런데 라일이라면 차라리 돈으로 보상하겠다고 하는 편이 더 이치에 맞지 않는가.
물론 해진에게 제공되는 물질적인 부분은 그 ‘책임’의 일환일 것이다. 다만 가장 궁극적으로 내민 조건이 생각할수록 퍽 이상했다. 건강하게 밖으로 걸어 나가라니.
그도 기사는 찾아보았다. 베르무스 저택에서 오메가가 어떤 수모를 겪고 있는지, 라일의 성벽에 대한 아주 저질스러운 소문이었다. 특히 지난번 라일이 저를 데리고 병원에 갔던 일도 같이 엮여 더욱더 소문을 부풀렸다.
그가 이 저택에서 핍박받은 건 사실이나 기사가 말하는 뉘앙스와는 사뭇 궤가 달랐다. 게다가 이런 찌라시 같은 기사가 조금 새어 나갔다고 한들 과연 베르무스가 휘둘릴 정도였을까. 해진이 건강하게 저택을 나가는 장면을 대서특필할 작정도 아닌데 그가 진짜 건강해지든 말든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해진은 깊은 불안함을 자각했다. 역시 라일에게는 그저 해진의 몸뚱이가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진짜로 건강해서, 그의 페로몬 해소를 받아 낼 수 있는 건강한 몸 말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라일의 행동은 좀 더 친근한 걱정이다. 그쪽은 더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성미까지 꺾으며 세심하게 챙기는 척 구는 게 여전히 이해 가지 않았지만.
덕분에 해진은 비로소 깨달았다. 잊고 있던 이 따끔한 감각은 분노였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거부하고 싶었다.
“페로몬 해소가 필요하신 겁니까?”
“대체 왜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지금.”
뜬금없이 라일의 심장을 꽉 쥔 채 숨도 못 쉬게 하던 해진은 급기야 그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자신이 또 무슨 오해를 갖게 한 건지.
애써 이성을 잡으며 라일은 대화를 이어 가고자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이상하게 정신이 혼몽하다. 정확히는 해진이 이 저택을 나가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몸에서는 꼭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잘못된 음식을 삼키기라도 한 듯 뱃속부터 열이 들끓었다. 녀석의 페로몬에 실린 감정은 옅디옅었다. 그런데도 그게 꼭 커다란 고함처럼 라일의 피부에 닿았다.
페로몬이 닿는 세포 하나하나가 조금씩 달아오른다. 기이하게 타오르는 몸뚱이가 끝내 재로 산화할 듯 거칠게 날뛰었다.
왜 자꾸 이곳을 떠나려고 하지.
“별로 쓸모 있는 몸이 아닐 텐데요, 이젠. 고분고분한 몸을 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진, 입 다물어.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했어.”
단호한 라일의 음성에 해진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회피했다. 짙은 피로가 내려앉은 얼굴이 라일의 가슴을 효과적으로 후벼 팠다. 한숨은 마치 송곳처럼 그를 꿰뚫었다.
“차라리 제 몸이 필요하다고 하시죠. 쓸데없이 배려하는 행동까지 하실 필요 없지 않습니까. 불편합니다, 이런 거.”
그 말을 듣는 순간 라일은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이성이 뚝 끊겨 나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