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언제나 해진과 그의 사이엔 두꺼운 벽이 있었다. 라일도 그걸 잘 알았다. 애초에 그런 벽이 있기를 희망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이 벽의 존재가 이리도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
저를 거부하고 밀어내는 해진에게 라일은 쉽게 동요했다. 기이할 정도로 불안한 마음이 그를 거세게 흔들었다. 마치 해진이 이 저택을 나가는 순간 제 심장이 멈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벌떡 일어난 그가 성큼 해진에게 다가갔다. 단 한 걸음으로 충분했으나 해진은 여전히 멀리 있는 것 같아서 초조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녀석의 무표정한 얼굴이 무너졌다. 라일은 해진을 가두듯 그가 앉아 있던 의자 손잡이를 양손으로 으스러트리듯 잡았다. 이런 자신을 피하고 싶은지 해진은 의자에 깊숙하게 기대었다.
“필요하다면?”
“……읏…….”
얼굴을 가까이하자 체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라일은 해진이 곁에 없어도 녀석의 페로몬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가까이 오기라도 하면 마치 온 세상이 해진으로 가득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열성인 그에게는 이런 능력이 없을 텐데.
그 속에서 헤엄치는 건 숨 막히는 환희였다. 이해할 수 없는 몸 상태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걸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눈앞이 다시 붉게 물드는 기분이 들었다. 매분 매초 신경 써서 갈무리하는 페로몬조차 제대로 가둬 둘 수 없을 정도로.
진한 라일의 페로몬이 해진의 공간을 채웠다.
“페, 로몬, 읏…….”
“필요해서 그런 거면, 얌전히 여기 있을 건가?”
해진의 의도는 그도 잘 알았다. 그가 제공하는 모든 배려나 온정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거겠지.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도 머리가 이해했다. 애초에 그가 이토록 뿌리 깊은 불신을 갖도록 만든 건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이 격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녀석이 자꾸, 떠나려고 하니까.
“진. 왜 대답이 없어. 계약대로 하자고 하면, 이곳에 있을 건지 묻잖아.”
빗속에서 잔뜩 헤매 앞으로만 걷던 위태로운 다리. 그가 소식조차 모르도록, 얼마 안 남은 짐까지 다 버리고 사라졌던 그날. 지금까지 자꾸 제 손에서 벗어나기만 하는 해진의 모습이 라일을 거세게 자극했다.
우성의 페로몬은 금방 지배력을 가진 채 공간에 머물렀다. 라일은 이제야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최근 늘 해진의 페로몬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하얗기만 하던 해진의 얼굴이 금방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숨에는 달큼한 페로몬이 녹아 있었다. 매번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자극적인 체향이었다. 이번에도 그 충동질에 손쉽게 넘어가 버린 라일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해진의 몸을 파고들었다.
시선이 홀린 듯이 유려한 목선으로 향한다. 언젠가 라일은 저곳에 있는 페로몬 샘에 이를 박아 넣은 적이 있었다. 마치 과즙이 배어 나오듯 뿜어져 나오던 빗물 향을 상기하니 심장이 점점 거세게 뛰었다.
자꾸만 벗어나려는 해진의 모습은 손끝 하나까지 라일의 신경을 거슬렀다. 이렇게 두 손에 꼭 쥔 채 가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정도로.
위험하다. 라일은 이 순간 해진을 놓쳐 버리는 게 위험한지 이런 행동을 하는 자신이 위험한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어느새 녀석의 빗장뼈 가득히 남겨 두었던 그의 자국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는 점이다.
위험하다.
라일은 계속해서 페로몬을 퍼부었다. 전 집사를 압박할 때처럼 살의를 가진 페로몬이 아니었다. 한없이 음탕하고 원초적인 본능으로 벼려 낸 것들이었다.
입술을 꽉 깨문 해진은 제 팔을 움켜쥔 채 그의 아래에서 벌벌 떨기 시작했다. 두 팔 사이에 빠듯하게 갇혀 있는 해진을 보니 기이한 충족감마저 느껴진다. 달뜬 얼굴로 녀석이 두 다리 사이를 움찔거리는 걸 볼수록 더 그랬다.
페로몬 해소를 할 때도 라일은 이렇게 페로몬을 개방하지 않았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필연적으로 오메가에게 신체 반응을 일으키기에 매번 꺼려 왔다.
자신이 왜 그랬을까.
손이 홀린 듯이 해진의 뺨으로 향했다. 손바닥에 촉촉하게 감기는 피부를 보니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간다. 목울대가 크게 일렁이는 감각이 좋았다.
필시 그렇게 본능에 몸을 맡겼으리라. 피가 배어 나오도록 깨물고 있는 해진의 입술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물지 마.”
“…흡…….”
“하지 말라고.”
뺨을 쥐었던 손바닥에 힘을 주어 눌렀다. 그런데도 해진은 벌벌 떨면서 제 입술에 상처를 내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초점이 점점 사라지는 눈이 녀석의 정신이 침몰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간 이미 녀석의 속을 잔뜩 헤집어 둔 라일이었다. 저런 생채기 하나가 무에 대수라고 이리도 화가 난단 말인가. 배어나는 피가 꼭 그의 눈알에 들러붙는 기분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갈급함으로 라일은 차갑게 내뱉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한텐 신음도 들려주기 싫어서?”
그러나 한껏 이죽거린 말에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입이……, 찢어지고 싶진, 흡, 않으니까…….”
‘입이 찢어지고 싶지 않으면 닥쳐. 듣기 싫으니까.’
“…….”
의자를 넘어트릴 듯 해진에게 다가가던 라일은 그 순간 우뚝 멈춰 버리고 말았다.
“……으, 읍…….”
뭔가 이게 아니다.
세찬 비를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라일은 자신이 본능에 휘둘리고 있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차가운 이성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저 페로몬에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난…….”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끝도 없이 저지른 제 과오를 책임지고 싶었을 뿐이다. 못 먹고 못 입던 녀석을 조금 보듬은 채 내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미안해서.
그런데,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이렇게 페로몬으로 한껏 압박하려던 생각이 아니었다. 조금 화가 난다고 이렇게까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녀석을 몰아세우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내가 왜 그랬지.
“……무서워.”
한숨 같은 목소리에, 라일은 불에라도 덴 듯 뒤로 물러났다. 미미한 두려움을 담은 해진의 페로몬이 수천 개의 바늘이라도 된 듯 그를 찔러 댔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몸짓은 형편없이 초라했다. 아직도 두 팔로 자신을 보호하듯 끌어안고 있던 해진이 무심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볼 만큼. 그 시선에는 아직까지 두려움이 녹아 있었다.
자신이 또 녀석을 저렇게 만들었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라일은 자신이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성급한 다리는 응접실에 딸린 화장실로 뛰쳐들어갔다. 오후 내내 비어 있던 속에서는 거북함으로 이루어진 신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새로 데려왔던 오메가의 페로몬이 역겨워 이렇게 허리를 꺾으며 괴로워했던 날이 있었다. 그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으로 라일은 거칠게 제 속을 비워냈다. 그런데 몇 번이고 그 짓을 반복해도 울렁이는 속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가까스로 찬물을 얼굴에 끼얹는다. 입고 있는 옷이 잔뜩 엉망이 될 정도로. 그렇게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리니 거울 속에 엉망이 된 얼굴이 보였다.
라일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아주 익숙한 감정을 떠올렸다. 해진이 라일의 곁보다 거센 빗속을 선택했던 날, 그에게 사정없이 박혀 들었던 작은 씨앗이 비로소 싹을 틔웠다.
그건 자기혐오였다.
<챕터 7>
‘이 아이는 나처럼 우성이 될 거야.’
라일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의 부모는 라일의 금발과 파란 눈을 보란 듯이 손님에게 내보이는 걸 즐겼다. 금으로 자아낸 듯한 금발은 피가 진한 알파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의 파란 눈을 보며 어머니를 비롯한 친척들은 우성의 피가 나왔다며 미소를 지었다. 특히 우성 오메가인 어머니는 그 사실을 유독 자랑스러워했다.
다만 그 칭찬 어디에도 라일의 노력에 대한 건 없었다. 그가 이루는 성취는 전부 우성 알파이기에 당연하게 따라오는 것 취급했다. 다섯 살, 서툰 손놀림으로도 최선을 다해 어머니에게 줄 꽃을 만들어 간 날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만든 완벽한 종이꽃이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날 라일은 의문을 가졌다.
형질을 빼면 과연 자신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이 아이는 나처럼 우성이 될 거라고, 베르무스의 알파 우성이!’
어머니의 바람과는 다르게 라일이 형질을 발현한 건 남들과 비슷한 사춘기, 열네 살이었다.
***
우성은 보통 아주 이른 나이에 형질을 발현한다. 라일이 열두 살이 넘을 때까지 발현하지 않자 아버지는 정부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그 외도를 라일이 발현하지 않은 탓이라고 했으니 그런 것이겠지.
집착에 가까운 그녀의 행동이나 우성이 아닌 아버지를 은근히 무시하는 행동은, 안타깝게도 어머니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어린 나이지만 라일은 이제 형질 타령에 쉬이 휘둘리진 않았다. 고작 페로몬이 없는 것뿐, 그의 삶은 여전히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학업 성적은 늘 최고였고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정도로 몸도 쑥쑥 자라났다. 그를 뭔가 부족하다는 듯 보는 건 어머니가 유일했다.
아주 어릴 적 가졌던 의문에는 이제 단호한 해답이 생겼다. 설사 이대로 알파로 발현하지 못한다 한들 라일은 라일이었다. 여전히 베르무스가의 적통이며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열네 살, 우성이 아닌 그냥 알파로 발현했어도 라일은 그러려니 했다. 새롭게 생긴 이 페로몬이라는 게 조금 귀찮다는 생각을 얼핏 하면서.
‘흐음. 그쪽이, 도련님이야?’
불쑥 불쾌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운명의 그날은 늘 이렇게 악취로 기억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