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45화 (45/101)

#45

“브라이트 씨가 저녁까지 거르셨다고 합니다.”

“…….”

비서가 전하는 저택의 소식에 라일은 초조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어젯밤 그따위 짓을 한 뒤로 해진은 밥을 먹지 않았다. 아침부터 줄곧 이불만 뒤집어쓰고 누워 있다는 소리에 라일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오늘 하루를 회사에서 어찌 버텼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과거의 망상과 그의 과오가 뒤엉켜 자기 자신에 대한 큰 혐오를 계속 불러일으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라일은 제 머리에 총을 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늘 보고드릴 안건은 이게 끝입니다만, 펜트하우스로 모실까요.”

“……아니, 저택으로 가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하루를 끝낸 라일은 자신이 왜 이런 상태인지, 그 원인을 찾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일단 해진이 입에 무언가를 넣어야 다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

어두운 방 안. 해진은 멍하니 이불 속에서 숨을 죽였다.

이렇게 숨을 죽이고 죽이다 보면 어느 순간 정신이 아래로 훅 침잠하는 순간이 온다. 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묘한 상태. 방 온도는 늘 따뜻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서늘한 공기에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

밖에서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까도 들었던 것 같은데 계속 울리고 있는 건지 그사이 시간이 훅 지나가 버린 건지 모르겠다.

“진.”

문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곁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있자 어딘가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의 이불을 잡아서 슬쩍 내렸다.

“…….”

“굶지 말고 뭔가를 먹어.”

가까스로 눈을 뜨니 파란 두 눈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와 비슷한 눈높이였다.

문득 라일의 페로몬이 느껴지기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는 지금 빈틈없이 페로몬을 갈무리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어제 그 위압적인 상황 때문에 기운이 빠져 종일 밥을 먹지 못했다. 그 상황을 떠올리면 자꾸만 힘이 쪽 빠져나갔다. 며칠이나 잘 먹어 겨우 그러모았던 티끌만 한 감정이 다시 해일에 쓸려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고작 한 줌도 안 되는 그의 감정을 날려버리기에는 너무 막대한 페로몬이었다.

그런데도 해진은 이따금 꿈을 부유할 때 퍽 기묘한 느낌을 받곤 했다. 당시에는 분명 그의 의사를 무시한 채 라일이 저를 안을까 봐 한껏 겁을 먹었더랬다. 그런데 막상 잔향처럼 제게 남은 그의 페로몬을 곱씹을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과연, 그가 정말 저를 해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묘한 일이었다. 기묘한 이 느낌은 꼭 태어나서 처음으로 페로몬이라는 존재를 깨달았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데 직감이 먼저 깨닫고 마는 그런 신기한 감촉.

그런데 라일은 왜 갑자기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졌을까. 그것도 그렇게 아픈 얼굴을 하고선.

“…….”

그 얼굴을 떠올릴 때면 해진은 의무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사실 해진이 깊게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그가 다시 해진을 겁박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3개월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그를 놔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 격한 반응을 떠올리면 다시 몸이 절로 굳어 버린다. 그러면 해진은 잠깐 그를 들어 올렸던 기묘한 감각 따윈 재빨리 놓아 버린 채 다시 아래로 아래로 침잠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먹어.”

잠깐 다른 생각에 빠진 사이 라일의 두 눈은 어느새 가까이에 와 있었다. 뜻밖에도 그가 누워 있는 해진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똑바로 마주하는 그 시선이 퍽 낯설었다. 이 상황도 무척이나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압적으로 쏟아붓는 주제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따듯하던 라일의 페로몬이 다시 코끝을 스친다.

그러나 해진은 이내 눈을 감고 말았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을 감당하기엔, 그에겐 남은 것이 너무 없었다.

***

“후…….”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라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해진의 상태는 퍽 미묘했다.

어딘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인형처럼 침대에만 앉아 있는 건 여전했다. 다만 집사나 사용인이 음식을 들이면 조금씩 먹으려는 움직임은 보여주는 것 같았다. 먹는 양은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도 라일은 묘하게 불안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해진의 모습이 꼭, 마지못해 모든 것을 수용하는 기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죽은 듯이 바닥에 깔리는 그 페로몬을 보면 이 감이 틀린 건 아니리라.

덕분에 라일은 온종일 목이 매달린 사람이 된 것 같은 심정을 느껴야 했다. 일부러 시간을 쪼개어 아침저녁으로 해진을 찾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먹으라며 음식을 코앞에 들이밀고 싶었으나, 그러면 또 식사를 강제하는 것 같아 함부로 그럴 수도 없었다.

매번 찾아가서는 앞으로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게 고작이었다. 정작 해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말이다.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는 해진과는 다르게 이번엔 라일 본인이 밥을 거르게 되었다. 녀석의 잔뜩 깨져 있는 페로몬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제 세포 하나하나가 터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장 가능성 큰 방안은 역시 해진을 가고 싶은 대로 놔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라일은 제 안의 욕심만큼이나 큰 문제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진이 과연 나가서 제 몸을 제대로 지킬까?

라일은 이미 한 번 밖에 나간 해진이 어떤 모습으로 방황하고 있었는지 확인한 바 있었다. 아무리 그에게서 도피하느라 그랬다지만 발견한 당시 해진의 상황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다시 녀석이 영양실조에 걸린 채 더러운 모텔에 누워 있는 꼴을 발견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머리가 돌아버릴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최소한 밥이라도 챙겨 먹을 의지를 심어 줘야 했다.

적어도 녀석을 놓쳤을 때, 녀석이 그대로 어딘가에서 말라비틀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이 자기혐오까지 가세한 책임감이 자꾸만 그를 질책했으니.

한참 초조하게 생각을 정리하는데 앞 조수석에 앉아 있던 비서가 그에게 말을 붙였다.

“브라이트 씨의 일로 고민하십니까?”

“그래.”

며칠간 반복된 일이기에 비서의 추론에는 거침이 없었다. 잠깐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라일에게 한 가지 조언을 던진다.

“환경을 조금 바꿔 보시죠. 매일 방 안에만 계시니 바깥 공기를 조금 쐬며 식사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음.”

“마침 내일은 모처럼 해가 뜰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전 일정도 비울 수 있습니다.”

“……그렇군.”

일리가 있는 소리에 라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해가 좋은 날 창문을 열고 그를 내려다보던 해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은 안뜰에서의 식사를 어떻게 생각할까.

***

멍하니 창 너머의 하늘을 감상했다. 오늘따라 내리쬐는 해가 이 이상 찬란할 수가 없었다. 완연하게 모습을 드러낸 파란 하늘을 보고 있으니 종소리가 울렸다.

해진은 반사적으로 라일을 떠올렸다.

“네.”

“…….”

역시나 완벽하게 갖춰 입은 라일이 그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매번 반복되는 일이지만 해진은 매번 의문을 떠올렸다. 그는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구는가.

평소처럼 밥을 잘 먹으라고 당부할 거라 여겼으나 라일은 의외로 말이 없었다. 한참이나 해진의 얼굴을 곤혹스럽게 살피던 그가 결국 시선을 슬쩍 옆으로 피했다.

차마 마주 보고는 말하기가 힘들다는 것처럼.

“진. 오늘은 밖에서 식사하는 게 어떨까 하는데.”

뜬금없는 소리에 해진은 라일의 가슴팍에 머물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물론 모처럼 좋은 날씨였다. 해진의 힘없는 눈길조차 저도 모르게 찬란한 정원에 닿을 만큼. 그런데 그게 라일이 굳이 찾아와서 권할 정도의 일이던가.

결국 해진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친 그조차 의문을 쉬이 떨치지 못할 만큼 라일은 꾸준하게 이상하게 굴었다.

“왜요?”

“……네가 너무 안 먹으니까.”

그가 생각하기에 그건 적당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러나 말과 함께 미약하게 흘러나온 라일의 체향에서 스쳐 지나가는 절박함을 읽고 혼란스러웠다. 혹시 자신이 페로몬 신호를 읽는 것조차 못할 만큼 망가진 건 아닐까.

“일단 시도만 해 봐. 정 불편하다면 내가 자리를 피해 줄 테니까.”

그 묘한 페로몬을 관찰하던 해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의 두 눈이 미미하게 크게 떠지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그걸 보고 나서야 이게 함께 식사하자는 뜻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

밖으로 나오니 생각보다 날이 쌀쌀했다. 방에만 있어서 몰랐으나 날씨는 이미 겨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들이치는 한기에 해진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움직여야 했다.

방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후회가 들이쳤다. 함께 식사하자는 소리인 걸 알았다면 거절했을 텐데. 아무리 라일이 이상하게 군다고 해서 같이 밥을 먹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아까 느꼈던 페로몬도 사실 착각에 불과한 것 같았다. 지금은 여느 때처럼 라일의 페로몬은 흔적도 없었기에.

그렇다고 이미 나왔는데 본의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도 퍽 난감한 일이다. 한숨을 내쉬는 것조차 힘든 쌀쌀한 공기라서 해진은 그저 기계적으로 앞으로 향했다.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음식을 뜨는 시늉이나 하고 올 작정이었다.

이따금 누군가가 제 안의 물기를 쫙 빼 말라 버린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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