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다리가 아픈가?”
“……아니요.”
사실 차가운 공기에 닿아 발목이 시큰거리긴 했다. 티 내지 않고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몇 걸음 떼자마자 라일의 시선이 다리를 향한다.
그나저나 자신의 다리가 아픈 걸 알고 있었던가.
뜻밖의 사실에 다소 놀랐던 해진은 이내 관심을 잃었다. 생각해 보니 그의 몸 상태는 첫 계약을 할 당시부터 라일에게 보고가 되어 있으리라. 언제부터 그걸 기억했는지는 몰라도.
덤덤하게 말한 것이 무색하게 걸음을 뗄수록 다리가 계속 시큰거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갈 때 발목을 삐었었지. 그 이후로는 거의 누워만 있어서 아직까지 아픈 줄은 몰랐다.
계단을 내려갈 때 조금 곤혹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앞에 불쑥 큰 손이 나타났다.
“잡아.”
“…….”
제 앞에 놓인 라일의 마디 굵은 손을 내려다보던 해진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파란 눈이 저를 곧게 향하고 있었다.
그는 옆의 벽을 짚으며 홀로 내려가기를 선택했다.
“괜찮습니다.”
“…….”
위태롭게 계단을 내려가는 녀석을 보며 라일은 허공만 움켜쥔 채 손을 물렸다. 그리곤 말없이 뒤를 따랐다. 혹 다리를 헛디디는 건 아닌지 지켜보면서.
분명 다리에 통증이 있어 보이는데 해진은 끝내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미간이 너무 위태로워 보여 저도 모르게 내민 손은 허무하기만 하다.
그는 이 거리감을 억지로 깨부수려 하지 않았다. 녀석이 내보이는 벽은 여전히 목을 조르듯 초조한 감각을 선사했다. 그러나 그에겐 강제로 그걸 깨부술 자격이 없었다. 다만 그는 걸음을 아주 조금 더 느리게 만들었다. 해진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향한 곳은 언젠가 라일이 아침을 먹었던 안뜰의 중앙이었다. 그곳에 도착한 해진은 바뀐 안뜰의 풍경을 조금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다.
“저건…….”
“준비가 끝난 모양이군.”
나뭇잎은 어느새 다 떨어져 앙상하게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테이블은 조금 커다란 것으로 바뀌었고 그 주위로 휴대용 난로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사용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음식을 날랐다. 한쪽에는 음식을 따스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보온 장치가 달린 트레이도 보였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마크가 해진에게 정중히 한쪽을 손짓해 보였다. 얼떨떨하게 안내받은 자리에 가 앉은 해진은 부담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들 들어가 봐.”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그 하얀 얼굴에 서린 불안을 제일 먼저 눈치챈 라일은 세팅이 끝난 걸 확인하고 명령했다. 잠깐 사이에 안뜰에 가득하던 사용인들이 흔적도 없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늦가을의 적막한 공기가 둘 사이를 메웠다. 그런데도 아까 느꼈던 싸늘함은 온데간데없었다. 해진의 근처에 유독 몰려 있는 난로들 덕분에 공기가 훈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해진은 특히 제 발치에 가까이 놓인 난로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발목의 통증이 온기에 물들어 감에 따라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들지.”
라일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는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인 것을 고려했는지 테이블에는 많은 음식이 올라와 있지는 않았다. 바로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가 놓여 있었다. 수프에서 피어난 따스한 김이 턱 끝에 습윤한 기운을 만들었다.
하는 수 없이 스푼을 들어 그릇을 바라보았던 해진이 그대로 입을 살짝 벌린 채 멈추었다.
“…….”
“……속이 좋지 않은 건가?”
무관심한 척 해진의 일거수일투족을 긴장한 채 바라보던 라일이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저러다가 화장실로 뛰어간다면 역시 의사를 한 번 더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녀석은 어딘가 멍한 목소리로 뜻밖의 말을 할 뿐이었다.
“……스텔리네.”
아침으로 올라온 수프는 흔히 보이는 모양은 아니었다. 맑은 국물에 스텔리네라는 파스타의 한 종류를 넣은 특이한 음식이었다.
일반적인 파스타와는 다르게 스텔리네는 길쭉한 면이 아니라 잘게 잘린 형태다. 특히 잘게 자를 때 새끼손톱만 한 별 모양으로 가공하곤 했다. 덕분에 수프 속에는 꼭 작은 별이 잔뜩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아.”
안 그래도 라일 또한 퍽 오랜만에 먹는 음식이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이건 그의 어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머뭇거리던 그는 어딘가 굳은 채 수프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해진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그만두었던 주방장이 얼마 전에 복귀했지. 어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이라 오랜만에 올린 모양이야.”
설명이 길었지만, 해진은 별 반응이 없었다. 초조하게 입가를 매만지면서 라일은 쓴웃음을 감추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혹시, 싫어하는 음식이라면 억지로…….”
“오랜만에 봐서요.”
“……그래?”
파스타야 흔하지만, 확실히 스텔리네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면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 헤비레인에서는 말이다.
해진은 무심코 어머니가 해 주시던 수프를 떠올렸다. 이것과는 냄새가 매우 달랐으나 안에 들어 있는 별들은 똑같았다. 처음 이 수프를 먹을 때 어머니가 해 준 말을 해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엄마가 하늘에서 특별히 따 온 별이란다.’
고작 열 살이었으나 저런 거짓말에 속지 않을 나이는 되었다. 그러나 막 입양된 처지에 눈치가 보였던 해진은 그저 웃으며 그 말을 넘겼더랬다.
다만 처음 먹는 따뜻한 별 수프는 진짜 하늘에서 가져온 것처럼 맛있었다.
“흔하게 팔진 않을 텐데…….”
“그런 편이지.”
식료품점에서도 잘 들여놓지 않는 종류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특별한 별 수프가 먹고 싶을 때면 해진은 꽤 먼 곳까지 이 파스타를 사러 심부름을 가야 했다.
“어머니가 잘 쓰시던 파스타 면입니다. 이렇게 먹는 집이 흔하지는 않던데, ……우연이네요.”
줄곧 수프만 내려다보며 말하는 해진에게서, 라일은 홀린 듯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지 해진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머무르고 있었다. 게다가 모처럼 길게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러나 잠깐 떠오른 그 미소는 이내 가을바람처럼 덧없이 지나가 버렸다. 아주 잠깐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이미 흔적도 없어서, 라일은 저도 모르게 스푼을 든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우연이네.”
멍하니 해진의 말을 따라 하며, 라일은 뻣뻣하게 굳은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녀석의 페로몬처럼 옅은 웃음은 꿈에서 감히 상상하던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아팠다. 대체 어디서 이런 통증이 올라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고심하고 나서야 통증의 근원은 심장이라는 걸 알았다.
해진은 바로 앞에 앉아 있었으나 아까 끝내 닿지 않았던 손처럼 도무지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덕분에 라일은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와 제대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반면 해진은 며칠 만에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워냈다.
***
그 뒤로 해진의 아침에는 자연스럽게 별 수프가 올라왔다. 유달리 잘 먹는 메뉴라서 마크 또한 세심하게 준비하곤 했다. 방보다는 가급적 바깥으로 이동해서 식사할 수 있도록 조치도 잊지 않았다.
대부분 해진 혼자 안뜰에서 식사하거나 식당을 이용했으나 종종 라일도 함께했다. 마음 같아서는 매끼 해진이 먹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식사하자고 한다면 해진이 부담을 느낄 것 같아 함부로 권하지 못했다. 대신 라일은 해진과 함께할 땐 무조건 스텔리네 수프를 먹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나자 라일은 한 가지 묘한 점을 눈치챘다. 걱정된 나머지 라일은 매일 해진이 어떤 음식을 얼마나 먹는지 세심하게 보고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묘하게 그와 함께 식사할 때면 해진의 식사량이 조금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설마하니 라일 때문은 아니리라. 아마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는 게 무의식적으로 편히 느껴지는 건 아닐까. 줄곧 혼자 외롭게 먹어 왔을 테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라일은 다시 해진에게 아침 식사를 함께하자고 말을 꺼냈다. 혹 거절당한다면 마크라도 함께 식사하라고 권유해 볼 작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해진은 늘 그렇듯 무심히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최근 들어 점점 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힘들어졌다. 일단 그 입에서 거절이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라일은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시 비가 연이어 내리는 날씨가 되었다. 덕분에 안뜰에서의 짧은 기분 전환은 힘들어졌다. 대신 라일은 저택에 있는 식당으로 해진을 초대했다. 여러 식당 중 규모는 작지만 따뜻한 느낌을 주도록 꾸민 곳이었다.
“…….”
“할 말이 있나?”
오늘따라 해진은 앉자마자 제 앞이 아니라 라일의 앞에 놓인 그릇을 뚫어져라 보았다. 습관적으로 등줄기를 긴장시킨 그는 애써 동요를 숨기며 물었다.
일부러 스텔리네 수프를 먹고 있는 그를, 혹 기분 나빠 하는 건 아닐까.
“스텔리네 수프를 좋아하시나 봐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지만 해진이 처음으로 의아하다는 듯 그에게 질문했다. 덩달아 제 앞에 놓인 수프를 바라보며 라일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런 편이지.”
사실 라일은 이 음식을 썩 좋아하진 않았다. 그냥 어머니가 좋아하던 특이한 음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음식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해진조차 오늘은 다른 수프를 찾았지만, 그는 꿋꿋하게 스텔리네를 앞에 두었다. 어쨌든 일주일이 넘게 좋아하지도 않는 수프를 고집한 보람은 있었다. 해진이 처음으로 그가 말을 걸지 않아도 무언가를 물었으니까. 물론 정작 물어본 당사자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눈치였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