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그들이 식사할 땐 늘 수발을 들어 줄 사용인들도 테이블 곁을 오가지 않았다. 해진이 싫어하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라일이 매번 당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분하게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울리기를 한참, 라일은 해진이 제 왼쪽 무릎을 무심코 문지르고 있는 걸 눈치챘다.
“…….”
일단 조용히 계속 식사를 이어 가며 녀석의 왼쪽 다리를 곁눈질한다. 해진이 다친 곳은 정확히는 발목 쪽이었다. 그러나 최근 식사 때는 밖으로 나와야 했던 해진이었다. 다리에 혹 무리가 간 건 아닐까.
초조하게 식탁 밑에서 몰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라일은 때를 기다렸다. 마침 녀석이 식사를 다 마쳤는지 스푼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슬며시 입을 열었다.
“혹시.”
“네.”
“……병원에 가 볼 생각은 없나?”
“…….”
그의 의도를 짐작하고 싶은지 해진은 물끄러미 라일을 바라보기만 했다. 일단 병원 소리에 당장 도망가지 않은 건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저 무표정한 얼굴 아래 어떤 폭풍이 있을지 몰라서 그는 황급히 덧붙였다.
“다리가 아픈 것 같아서.”
“아.”
그제야 해진은 자신이 무심코 무릎 쪽을 계속 매만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요새 발목에만 있던 통증이 무릎까지 올라온 기분이 들긴 했다. 아무래도 발목에 체중을 싣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자세가 뒤틀린 탓인 것도 같았다.
문득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조심하라 당부했던 것이 떠오른다. 병원을 생각하니 따라오는 습관적인 불안함도.
어쩌면 라일은 해진에게 다른 진료를 요구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저번에 간단한 키트 검사만 하고 말았기에 아직 임신의 위험성은 남아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해진이 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라일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강제로라도 그를 병원으로 끌고 갈까.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그래.”
빤히 그를 바라보며 말했으나 라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미묘한 감각이 다시 해진을 덮쳤으나 이내 그것을 담담하게 흩어 버렸다.
***
“…….”
날씨가 점점 쌀쌀해졌다. 창 가까이에 붙여 둔 소파에 웅크리고 앉으니 기온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깜깜한 바깥을 바라보면서 해진은 날짜를 헤아렸다. 이제 한 달 반 정도만 있으면 이 저택을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야에 라일과 함께 식사했던 안뜰이 보였다. 어둑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아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창문은 고정된 채 열리지 않았다. 가끔 그가 자리를 비우면 환기를 시키는 것 같긴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곰곰이 아침에 라일이 했던 제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다리가 다시 욱신거리자 손으로 가만가만 발목을 매만졌다.
완전히 못 걷게 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이 저택을 나간 뒤에는 홀로 걸어 찾아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그러니 늦기 전에 병원을 한번 가 보는 것도 좋으리라.
게다가 라일을 시험하듯 굴긴 했으나 해진 또한 임신이 걱정되긴 했다. 그가 책임져야 할 생명이 없다는 걸 확실하게 확인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지.
다만 병원을 떠올리면 심장이 거세게 진동했다. 꼭 이미 싸늘해져 버린 부모님을 확인하러 가던 날이 자꾸 생각났다.
하나둘 쌓인 호흡이 감당할 수 없어졌을 즈음, 해진은 가까스로 어머니의 별 수프를 떠올렸다.
특별한 날 먹는 특별한 수프. 다만 특별하지 않은 날에도 그가 먹고 싶다고 하면 결코 거절하는 법이 없던 어머니. 무엇보다 해진을 데려온 날 제일 처음으로 해 주신 따스한 음식.
작은 별 무리를 떠올리며 해진은 절실하게 눈을 감았다. 스산한 밤바람이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폐를 터트릴 듯 쌓인 호흡이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아간다. 그렇게 한참 동안 조용히 마음을 진정시킨 해진은 이내 어렵게 결심했다.
병원에, 가 볼까.
***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찾아온 라일에게 해진은 병원에 가고 싶다고 조용히 말했다. 잠깐 침묵하던 그는 낮에 바로 갈 수 있게 조치해 두겠다고 했다.
모처럼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걸 깨달은 해진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입고 갈 옷을 정하고 공들여 몸도 씻었다. 다가올 상황이 겁나기도 해서 일부러 더 바쁘다는 듯 몸을 움직여 보았다.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갖춰 입은 해진은 침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발을 들이자 맨발에는 푹신한 러그가 부드럽게 감겨 왔다. 분명 침대 주변에만 있던 이 러그는 날이 갈수록 범위가 늘어나더니 급기야 방 전체가 이렇게 러그 천지가 되었다.
원래 겨울이 되면 이렇게 바닥을 러그로 채우는 걸까. 그동안은 러그는커녕 수건 하나 제대로 받기 힘들었기에 해진은 원래 이런 체제인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렇게 막 침실에 들어섰는데 응접실 바깥에서 종소리가 났다. 마크인가 싶어서 해진은 얼른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 왼발이 움직이다가 그만 두꺼운 러그에 톡 걸리고 말았다. 무릎이 덩달아 풀썩 꺾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
다행스럽게도 아프지는 않았다. 너무 푹신한 러그 때문에 엎어졌는데 그 러그 덕분에 다치지는 않은 것이다. 오묘한 상황 때문에 해진은 조금 찌푸린 얼굴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진!”
그때 뒤에서 라일의 놀란 목소리가 성급하게 가까워졌다.
“어…….”
“왜 그래. 다리가 아픈 건가?”
이 시간에 라일이 왜 저택에 있는 걸까. 분명 자신과 어색한 아침을 먹고 출근한 거로 아는데 말이다.
상황이 의아해서 얼떨떨하게 보고만 있으니 라일의 얼굴이 대번에 굳는다. 그제야 자신이 바닥에 넘어진 상태라는 걸 깨달은 해진이 덤덤하게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몸이 붕 떠오르는 게 더 빨랐다.
“읏……!”
“걱정하지 마.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했잖아.”
반사적으로 버둥거리자 라일이 짓씹듯 내뱉었다. 그리곤 무척 다급한 걸음걸이로 빠르게 밖으로 움직였다. 해진도 덩달아 다급히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많이 아픈 건가?”
“……제가 걸어갈 수 있습니다.”
“…….”
그제야 녀석이 생각보다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 라일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멈추었다.
파란 눈이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저를 향하는 걸, 해진은 잠깐 두고 보았다. 다시 코끝에 라일의 페로몬이 살짝 스쳤다. 마치 그가 너무 동요한 나머지 감정의 갈무리가 잘 되지 않았다는 것처럼.
어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해진은 한숨을 내뱉듯이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잠깐 넘어진 것뿐이에요. 바닥이 너무 푹신해서 발을 헛디뎠습니다.”
“…….”
녀석을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왔던 라일은 바닥에 엎어져 있는 장면을 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들어 올렸다. 최근에는 그래도 잘 먹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해진은 여전히 날아갈 듯 가볍기만 했다. 녀석의 몸이 가볍게 느껴질수록 라일의 마음은 한없이 바닥으로만 가라앉는다.
내려 달라는 듯 제 어깨에 조심히 얹은 해진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푹신한 러그는 그가 지시해서 깔아 둔 것이었다. 처음에는 침대 주변만, 나중에는 그마저 발에 걸릴까 봐 방 전체로. 저택의 어느 방에도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러그를 까는 곳은 없었다.
그런데 그 배려가 다시 해진을 넘어지게 하다니.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해악인 게 아닐까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그러는 한편 품에 해진을 들고 있으니 기이한 충족감이 라일을 잠식했다. 최근 잠도 거의 못 잘 정도로 기이한 불안에 시달리던 정신이 고요한 호수 수면처럼 잠잠해졌다.
이대로 해진을 놓기 싫다는 충동이 다시 강렬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차까지만, 이대로 데려갈 수 있게 해 줘.”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으나 해진은 까만 시선을 그에게 보일 뿐이었다. 최근 들어 녀석이 저런 눈을 할 때면 입안이 바짝 마르며 달라붙곤 했다. 가끔은 시선 때문에 말라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종종 든다.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
해진은 별다른 대답 없이 만류하듯 그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을 조용히 내렸다. 페로몬에서는 별다른 거부 의사가 읽히지 않았다.
그래서 라일은 다시 조심스럽게 그의 상태를 살피며 앞으로 움직였다. 성급하게 방을 나선 것과는 다르게 걸음이 무척이나 느렸다.
문득 그는 해진의 방이 자신의 방과 너무 멀다는 걸 깨달았다.
***
“……연락은?”
“없습니다.”
라일은 초조하게 입가를 매만지며 해진을 기다렸다.
일단 회사로 돌아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해진의 다리는 정밀 검사가 필요해 시간이 꽤 소요될 예정이라고 했다.
병원에 들어서면서 녀석은 몸을 잘게 떨었다. 무리하지 말고 다음에 또 와도 된다는 소리에도 꿋꿋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스럽게도 일전에 패닉 상태로 왔던 때보다는 심적 동요가 덜한 듯싶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라일은 일부러 해진이 움직일 만한 동선에는 사람과 물건을 미리 모두 치워 버렸다.
또한 그의 부모가 있던 병동과 정반대의 건물을 오로지 해진의 진료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지시해 두었다. 덕분에 해진은 하얀 병원의 내벽 외에는 아무것도 마주하지 않고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