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으나 라일은 고민 끝에 물러나기로 했다. 혹시 그가 곁에 있는 것이 해진의 트라우마를 더 자극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녀석이 그나마 편하게 생각하는 마크가 동행하도록 지시했다.
어차피 병원이 근처였기에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하다가 검진이 끝나면 녀석을 다시 저택에 되돌려 놓을 생각이었다. 직접 얼굴을 보며 별일이 없었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한참 대기하는 와중에 마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임신 여부에 대해 검사하지 않는지 물으십니다.’
‘무리하지 말라고 해. 진은 바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확실하게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렇게 하라고 해.’
솔직히 라일은 이번 검진에서 혈액 테스트는 고려도 하지 않고 있었다. 책임감 없이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임시 키트 진단 결과 음성이라고 하기도 했고 열성 오메가의 임신은 확률이 무척 희박하다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겨우 용기 내 병원에 들어간 해진에게 주사를 디밀어도 될지 확신이 없었다.
그저 다리가 걱정되어 병원을 권한 것뿐인데 혹시 무언가를 오해한 건 아닐까.
이 가정을 떠올리는 순간 라일은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피를 뽑다가 해진이 또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건 아닐지, 가정을 하면 할수록 도리어 라일의 피가 말랐다.
몇 번이나 비서에게 마크에게서 들어온 소식이 없는지 물었다. 그때마다 비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다고 했다. 이쪽에서 먼저 연락하자니 병원 쪽이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서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때 비서의 핸드폰이 울린다. 라일은 반사적으로 매섭게 그를 바라보았다.
“……곧 진료가 끝날 예정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가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라일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크의 성격상 시간의 여유를 두고 연락했을 테지만 비서는 별말 없이 상사의 뒤를 쫓아 나갔다.
최근 들어 해진과 관련된 일에는 유난히 이성을 잃어버리는 라일의 뒷모습을 비서는 묘한 눈초리로 관찰했다.
“아.”
그때 라일이 뭔가 잊었다는 듯 뒤를 도는 바람에 비서는 황급히 제 표정을 수습했다.
“펜트하우스 쪽을 준비해 두라고 해. 잠시 뒤에 보러 간다고.”
“펜트하우스를요?”
“그래. 진에게 주기로 했던 곳. 관리는 잘 되어 있겠지?”
“네, 알겠습니다. 준비시켜 두겠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펜트하우스는 해진이 저택에서의 3개월을 채워야 획득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비서는 군말 없이 연락을 넣으며 다시 상사의 뒤를 따라갔다. 산적한 일거리도 꽤 있었으나 비서는 최대한 일정을 미뤄 보려 애썼다. 그 또한 해진에게 마음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다소 성급한 걸음걸이로 라일은 주차장을 향해 갔다. 갑자기 펜트하우스를 준비하라는 건 충동적이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듯하다. 최근 식사 방식을 바꾼 뒤로 기분 전환을 위해 환경을 바꾸는 게 퍽 유효하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제 걸음을 가볍게 하는 게 대체 무슨 기대인지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라일은 바삐 걸었다. 해진이 있는 곳을 향해서.
***
휠체어에 앉은 해진은 어색하게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웬 번듯한 건물에 들어서서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도 이 어색함은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특히나 제 휠체어를 밀고 있는 게 라일이라는 점이 어색한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다.
진단 결과 발목은 역시나 심각한 상황이었다. 염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금 고정해 둘 필요가 있다고 해서 깁스를 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병원에 다녀야 한다는 소리에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이다.
어쨌든 목발까지 하나 받아서 나올 때까지 해진은 훌륭하게 버텨 내었다. 중간중간 어지러워서 토하고 싶은 기분이 이따금 들었으나 저번처럼 병원 입구만 보고 발작을 일으키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그가 진료받은 곳은 부모님이 계시던 곳과 분위기나 환경이 무척 달랐다. 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다른 병원에 온 건 아닌지 의아할 정도였다.
완전히 다른 건물에 오가는 의료진도 없어서 의료 장비가 몸에 닿을 때만 긴장하면 되었다. 심지어 의사도 그를 배려한 것인지 하얀 가운을 입지 않았다.
피를 뽑기 위해 바늘을 꽂던 순간은 확실히 고역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결과를 모르고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는 낫다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버텼다. 다행스럽게도 해진에게 버거운 짐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 지친 마음을 추스르며 나오자 라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깁스를 한 그를 보자 라일은 어쩐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설마 데리러 오기까지 할 줄은 몰랐기에 해진은 그 묘한 얼굴을 한참이나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당분간 다리를 쉬게 하는 게 좋다는 의사 소견을 마크가 전하니 그는 대뜸 휠체어를 구해 오도록 지시했다.
어쨌든 해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휠체어를 라일이 직접 밀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거의 다 왔어.”
“…….”
괜찮다면 잠깐 어디를 들르자고 하기에 해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저택에 가기 전 라일이 들러야 할 곳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상 차에서 저를 데리고 내리자 조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이기에.
엘리베이터가 열리니 바로 현관으로 추정되는 공간이 나왔다. 처음부터 인증을 통해 움직이는 걸 보면 이 공간을 위해 만들어진 전용 엘리베이터인 것 같았다.
새삼 베르무스의 재력이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해진은 휠체어에 푹 기대었다. 그냥 발목이 아플 때도 거동이 썩 편하진 않았는데 아예 깁스를 하는 바람에 더욱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재차 삼엄한 인증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니 광활한 내부가 들어왔다. 넓은 창으로 탁 트인 도시의 풍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닥에 깔린 하얀 대리석과 곳곳을 장식한 고급스러운 가구가 꼭 잡지에나 나올 장소처럼 보였다.
해진은 심드렁하게 집 곳곳을 둘러보았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가긴 하나 아직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때.”
“……높네요.”
대뜸 나오는 질문에 그는 어색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라일은 진짜 해진과 함께 이 공간에 볼일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런 반응에 라일은 제 설명이 너무 부족했다는 걸 깨달았다. 볼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을 고른 뒤 적당한 대답을 내놓는다.
“계약서에 명시된 펜트하우스가 여기야. 진, 네게 지급될 곳이지.”
“……뭐라고요?”
멍하니 휠체어에 기대어 있던 해진이 놀라서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깔끔한 라일의 정장에 뒷머리가 까슬하게 스쳤다.
“계약의 대가로는 너무 과분한 곳입니다.”
잠깐 동요하는 듯하던 해진이 이내 딱딱한 말투로 라일에게 말했다. 잠깐 그를 향했던 하얀 얼굴은 매정하게도 다시 앞으로 향했다.
그 작은 뒤통수를 내려다보면서 라일은 해진이 끝내 계약서를 끝까지 읽어 보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다. 당시에도 해진은 제가 요구했던 조항이 잘 쓰여 있는지만 확인하고는 서명했다.
조금 곤란한 기분이 된 라일은 제 입가를 매만졌다. 겨우 이 정도로 과분하다고 하는 해진이었다. 과연 계약서에 쓰인 다른 대가들을 본다면 무슨 소리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간 받은 피해에 대한 보상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기가 영 껄끄러웠다. 물론 해진이 겪은 고난에는 마땅히 보상을 지급할 예정이었다. 다만 죄책감으로 이루어진 게 분명한 이 까슬한 감각이 자꾸만 입 안을 맴돌아서 문제였다.
결국 라일은 한숨을 내쉬듯 담담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사인했으니 어쩔 수 없어.”
“…….”
잠깐 그를 뒤돌아보았던 해진은 이제는 꼿꼿하게 앞만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라일에게는 그 뒷모습이 멀게만 느껴진다.
제게 허락된 녀석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라일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가라앉은 기분을 나타내듯 중량감 있는 페로몬이 느껴진다. 막 들어왔을 땐 두리번거리던 해진의 시선은 이제 고집스럽게 제 무릎만 향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라일은 조심스럽게 해진을 데리고 거실의 창가로 다가갔다. 계속 아래로만 향하던 시선이 반사적으로 창밖을 향했다. 그의 저택에서는 볼 수 없는, 아니, 웬만한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저도 모르게 헤비레인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눈에 담는 해진은 계속 말이 없었다. 그와는 다르게 라일에게는 풍경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녀석의 옆모습만 라일은 조심스럽게 훔쳐보았다.
“……병원은 정말 다리 때문에 권한 거야.”
“네.”
“억지로 임신 테스트를 받게 할 생각은 없었어.”
“네.”
아까부터 내내 마음에 걸리던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해진은 짤막한 대답 이상을 들려주지 않았다.
이런 반응이 정말 라일의 말을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그는 똑똑히 알았다. 그저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리라. 애초에 해진은 라일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까.
녀석이 끝내 읽지 않았던 그 계약서처럼 말이다.
그걸 알아차린 라일은 씁쓸하게 입매를 비트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