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깁스가 있으니 씻는 게 영 불편했다. 그러나 해진은 사용인들이 도움을 준다는 걸 거부했다. 남자가 오메가라면 이런 부분이 퍽 애매해졌다. 베타인 이들에게는 같은 성별의 잣대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나 베타로 자라 온 해진은 한층 애매한 성 구분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힘들었다.
겨우 힘든 사투를 끝낸 그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리 한쪽이 깁스 때문에 묵직했다. 당분간은 병원을 몇 번 오가야 한다고 했다. 벌써부터 그날이 걱정되어 큰일이었다.
그래도 이 저택을 걸어 나가려면 어쩔 수 없지.
애써 자신을 다독이던 그는 돌연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다녀온 펜트하우스가 생각난 탓이다. 설마하니 그런 게 계약서에 있었을 줄이야.
고민하던 해진은 침실을 나가 옷방 쪽으로 향했다. 그가 목발을 짚어야 해서 침실에는 러그가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계약서가 이쪽 어딘가에 놓여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여기 있네.”
그의 낡은 트렁크 근처에서 계약서는 금방 발견되었다. 사용인이 멋대로 굴러다니는 걸 잘 놓아둔 듯했다. 서둘러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휙휙 몇 페이지를 넘기자 그가 열어보지도 않았던 곳에 라일이 말한 것들이 쓰여 있었다.
역시나 아주 과한 보상들이.
“…….”
펜트하우스는 물론 건물의 소유권까지 양도하겠다고 쓰여 있는 글자들을 해진은 망연하게 읽고 또 읽었다. 그 외에도 지급되는 현금 또한 지나치게 많았다. 언젠가 라일이라면 그저 돈으로 모든 걸 보상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은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걸 고스란히 적어 놓은 것만 같은 계약서였다.
그가 주저앉아 있던 모텔에 라일이 쳐들어오던 순간이 생각난다. 사납고 차가운 밤공기의 내음이 문득 해진을 덮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렇게나 많은 보상을 이미 줘 놓고, 대체 해진에게는 왜 건강해질 것을 조건으로 건 것일까.
대체 라일은 그에게 뭘 원하고 있기에.
계약서 위의 활자를 톡톡 두드리며 한참 살피던 해진은 이내 셈을 포기했다. 애초에 건물의 소유권 같은 건 그의 짧은 지식으로는 헤아리기 힘든 가치였다. 라일의 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무얼 바라든 저와는 상관없었다.
그러니 무엇이든 깊게 생각하지 말고 돌려주면 될 일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식사를 같이하자며 찾아온 라일에게 해진은 조용히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건 왜.”
“보상이 너무 과하더군요.”
“…….”
라일은 계약서 대신 제게 곱게 다가온 해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제 펜트하우스를 보고 녀석이 내비친 반응으로 예상했던 바였다.
펜트하우스를 보여준 건 여러 가지 의도가 있었으나 가장 큰 목적은 하나였다. 예전과는 다르게 이 계약이 진짜 지켜질 거라는 걸 확연하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도리어 역효과가 났던가.
라일은 애써 덤덤하게 계약서를 받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해진의 손을 끌어와 다시 쥐여 주었다.
짧게 맞닿은 피부가 왜인지 아쉽다.
“이런 건 필요 없습니다.”
“진, 이미 사인해서 어쩔 수 없어.”
“불편해요.”
꿋꿋하게 제게 내민 손에는 고집이 묻어났다. 이건 해진의 원래 성격일까, 라일은 최근 많은 것이 궁금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릴 줄 아는 이가 이 저택에서는 그토록 숨을 죽이고 살았을까.
“알아.”
“…….”
덤덤하게 긍정하는 라일을 보며 해진은 끝내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불쾌함이 드러나는 그 미간을 새삼스럽게 관찰하면서 라일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는 어떻게든 이 보상들을 해진에게 쥐여 줄 작정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해진이 받은 피해는 마땅히 보상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해진이 라일이라는 수단 외에도 자립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으면 했다. 만약 이 저택을 나간다면 거처할 곳도 없고 몸도 성치 않은 녀석이 살아남기가 무척 버거울 테니 말이다.
물론 여전히 해진이 고한 끝이라는 벽이 라일의 숨통을 조르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올지 말지와 상관없이 해진이 자신을 방어할 수단을 가지고 있었으면 한다. 언제라도 고작 몇 푼이 없어서 밥을 굶지 않도록.
제게 입은 피해가 분명한데도 왜 이 모든 것들을 부담으로 느끼는지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저 라일이 그에게 보상한다는 행위 자체가 싫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부모의 목숨값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가 추측한 것들을 굳이 해진에게 읊어 주진 않았다.
“그런데 내가 강제로 안겨 주는 거야. 나 편하라고.”
“…….”
어차피 더 떨어질 곳이 없는 라일의 평판이었다. 애초에 이걸 안겨 주며 저를 용서하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해진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에 있으면 해서.
“그러니까 너는, 할 수 없이 받으면 돼.”
그걸 받으면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으면 해서.
“…….”
씁쓸하게 입매를 비틀며 말하는 라일의 얼굴을 해진은 오래도록 관찰했다.
이따금 이렇게 라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가 예전과는 너무 다른 행동을 하거나 너무 다른 표정을 지을 때.
그리고 지금처럼 묵직한 페로몬을 저도 모르게 갈무리하지 못할 때.
라일의 페로몬은 늘 옅게 코끝을 맴돌고 사라지곤 했다. 느껴지는 페로몬만 놓고 따지면 우성답지 않은 미미한 존재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풀어져도 금방 깨닫고 스스로를 옥죄는 게 습관이 된 사람처럼.
잠깐 떠올랐던 불쾌함은 이내 익숙한 의문으로 바뀐다. 그러나 해진은 애써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침묵을 택했다.
이상해진 라일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자고 할 분위기도 아니기에 라일은 그대로 출근하는 걸 택했다.
본관에서 나와 안뜰을 지나며 그는 반사적으로 저택의 한 곳을 쳐다보았다. 해진의 방 창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안뜰을 지날 때 꼭 2층을 올려다보곤 했다. 해진은 그날처럼 창밖을 내려다보는 일이 없었다. 애초에 창문을 열 수 없도록 라일이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녀석이 창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일은 당연히 없으리라.
그걸 알면서도 그곳을 쳐다보는 것을 그만두지 못했다.
늘 그렇듯 해진은 이렇다 저렇다 할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아마 보상도 끝까지 받지 않을 작정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또 새로운 방안을 세워 봐야 하겠지.
이토록 무언가를 깊게 고민해 본 건 라일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생각을 거듭할수록 무언가 모자란다는 느낌이 그를 잠식했다.
녀석이 어딜 가도 부족함이 없게끔 계속해서 무언가를 안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녀석이 언젠가는 이 저택을 나갈 거라 생각하면 꼭 절벽에서 툭 밀려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래서 라일은 자신이 대체 해진을 놓아줄 준비를 하는지, 잡을 준비를 하는지 헷갈렸다.
***
“전 분기 대비 매출 실적 보고를 준비 중입니다. 이르면 다음 주에 받아 보실 수 있을 듯합니다.”
“저번처럼 엉터리로 올려 보내면 당장 반려시켜.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으면 내려갈 준비 하라고도 전하고.”
가족 기업답게 베르무스의 성을 단 사람들은 계열사에 적당히 포진해 있었다. 라일의 눈에는 늘 마땅찮은 이들이지만 그렇다고 전부 배척하지는 않았다.
열다섯의 나이에 후계 전쟁에 뛰어든 라일은 퍽 험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중 가장 빠르게 치고 올라갈 기회를 잡기 위해서 그들을 적당히 어르고 달래는 방법도 같이 썼다. 마치 조금 수그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그들에게 기회가 갈 것이라 착각할 수 있도록.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를 제 것인 양 함부로 구는 꼴을 볼 수 없었다. 특히나 저번에 멋대로 찾아왔던 다니엘 숙부 쪽은 특히나 늘 엉망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참고 봐줄 수 있을지, 그는 적당한 시기를 재고 있었다.
“네. 다음은 해고된 사용인들과 관련해 지시하신 일에 대한 보고입니다.”
“말해.”
“적당한 국선 변호사가 배정될 수 있도록 힘을 썼습니다. 아직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전 집사는 퍽 볼만한 꼴로 로펌을 전전했다고 들었다. 가뜩이나 저택에서의 일도 문제인데 배우자로부터 이혼장도 받았다고 했다. 불법 약물 따위를 써 온 것이 들통났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정식 소송도 시작되지 않은 혐의를 슬쩍 알리도록 한 건 라일이었다.
“몇몇 피고인은 변호 자체를 포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망이 없으니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죗값을 줄여 보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게 둘 순 없지. 충동질을 할 수 있을 만한 주변 인맥을 조사해.”
“네. 그건 시일이 조금 걸립니다.”
“상관없어.”
비서는 묵묵히 받은 명령을 태블릿에 정리했다. 한번 복수를 결심한 베르무스의 저력은 무시무시했다. 덕분에 비서의 일거리가 무척 늘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조만간 제 일을 도와줄 인선을 보충해야겠다고 계획했다.
그때 한참 서류를 보며 고심하던 라일이 툭 물었다.
“진은 뭘 하고 있지?”
어느 순간부터 라일은 저 질문을 무척 자주 했다. 덕분에 해진의 근황은 비서의 업무 중요도 최상단에 위치하기 시작했다.
슬쩍 아까 파악해 둔 소식을 확인한 비서는 즉시 보고했다.
“신문을 보고 계신다고 합니다.”
“음?”
자신이 또 녀석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나오는 바람에 밥을 먹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제는 서류를 처리하는 내내 자연스럽게 하얀 여백을 차지하고 있는 해진의 얼굴이 계속 눈에 밟힌다.
그런데 뜬금없는 소식에 라일은 의아함을 나타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