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말을 꺼낸 비서 또한 의아하다는 눈치라서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혹시 무료하신 건 아닐까요. 아시다시피 저택은 할 만한 것이 썩 많은 곳은 아니니까요.”
“아.”
그의 말이 정답인 것도 같았다. 저택에도 물론 TV 따위의 물건들이 빠짐없이 비치되어 있긴 했다. 그런데 해진의 성격상 그런 걸 찾아다니며 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궁여지책으로, 응접실에 의례적으로 놓인 신문을 집어 든 건 아닐까.
해진에게 조금씩 주변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생긴 것 같아서 문득 가슴이 간지러웠다.
***
그날 저녁 라일은 퇴근을 서둘렀다.
회사를 운영한 이래 한 번도 저택에 돌아가는 시간을 기다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곳에 해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퍽 묘한 느낌이 들곤 했다.
미리 연락해 두었기에 응접실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종을 울리자 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시간 되나? 어디를 같이 갔으면 하는데.”
“……어디를요?”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해진의 얼굴에는 대번 경계가 어렸다. 덕분에 라일은 다시금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내가 실례했군. 서재를 안내하고 싶어서. 마크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어. 낮 시간이 무료하다지.”
“아.”
그의 말에 잔뜩 긴장했던 해진은 조금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지난 5년간 있었던 일을 습관적으로 떠올린 탓이다.
낮에 정말이지 할 게 없다는 건 사실이었다. 낡은 핸드폰으로는 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평소라면 침대에 묻혀 흘러가는 우울을 잡기 바빴지만 조금씩 무료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에 성공적으로 병원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그가 조금 더 단단해지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어쨌든 오늘만 같은 신문을 세 번이나 읽었던 해진은 고민에 빠졌다. 무슨 생각인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이쪽의 기색을 살피는 라일이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좋아요.”
“……휠체어를 준비해 올게.”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라일은 어쩐지 한층 더 굳은 얼굴을 했다. 해진은 그 표정을 의아하게 바라보면서 조용히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
“여기야.”
“…….”
서재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가 머무르는 방에서 복도를 따라가다가 모퉁이를 한 번 돌기만 하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해진은 의아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라일을 올려다보았다. 휠체어까지 가져오기에 무척이나 먼 곳에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 그의 눈빛을 무어라 이해했는지 라일은 조금 당황한 것처럼 그에게 물었다.
“혹시 너무 볼품없나? 다른 서재로 가도 되긴 하지만 여기가 제일 가까워서.”
“…….”
“그쪽은 계단도 지나야 해서 힘들 것 같은데. 조금만 시간을 주면 가까운 곳에 서재를 새로…….”
“아니요.”
라일이 또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에 해진은 그냥 서재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서재는 볼품없다는 말이 실례일 정도로 광활한 크기를 자랑했다. 이쪽 복도로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기에 여기 서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사실 해진은 본관 한가운데에 누군가 그를 툭 떨어트리고 간다면 길을 잃을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외관이야 5년이나 지내며 알게 모르게 다닐 수밖에 없었으나 본관 쪽은 금지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문을 여는 순간 책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냄새라 해진은 조금 풀썩이는 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해진은 공부를 참 좋아하는 아이였다. 부모님께 보답하고 싶다는 열망도 있긴 했으나 그냥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걸 즐겼다. 결핍으로 이루어진 어린 시절엔 지식으로 저를 채우는 것으로 포만감을 느끼려 애썼다.
그래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이렇게 많은 책이 있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은 해진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전부 지나간 일이지만.
잠깐 설레었던 마음이 툭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익숙한 일이었기에 해진은 떨어진 마음을 개의치 않고 천천히 서재 안을 눈에 담았다. 천장까지 닿은 책장에는 책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안에 있는 책은 전부 마음껏 봐도 돼.”
“네. ……감사합니다.”
“…….”
뜻밖의 인사에 라일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대신 그는 천천히 휠체어를 밀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방을 둘러싼 책장 한가운데 아늑하게 생긴 큰 소파가 있었다. 이곳에서 바로 책을 보기도 좋은 구조였다.
“책 목록은 여기 다 들어 있으니까, 검색하기 편할 거야.”
“아…….”
“책은 꼭 마크에게 부탁해서 꺼내 달라고 하도록 해. 올라가면 위험하니까.”
다리가 아픈데 책을 어떻게 찾아다니지, 고민하던 해진은 뜻밖의 물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풍스러운 저택의 서재에는 태블릿이 놀라울 정도로 안 어울렸다.
이 저택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라일의 비서가 저 태블릿을 들고 다니는 것도 눈여겨본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대학에 합격하면 사 준다고 했던 같은 기종이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해진은 탁자에 놓인 태블릿을 손에 들었다. 그가 성인이 되기 직전 겪은 발현열이 끝나고 얼마 뒤,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너무 기쁜 나머지 해진은 그걸 외식하러 나갈 때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렇게 막 개봉했던 태블릿은 사고가 나면서 그의 발목과 함께 박살이 나 버렸다.
그때와는 외양이 조금 다른 물건 같았다. 하긴 시간이 그렇게 지났으니 새로운 기종이 나올 때가 되었으리라. 마음은 계속 발치에 굴러다녔지만, 해진은 천천히 태블릿을 자세히 관찰했다.
“…….”
옆에 앉아 있던 라일은 그런 해진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반짝이는 검은 눈은 꼭 밤하늘을 떠올리게 했다. 신기하다는 듯 두 손에 태블릿을 꼭 쥔 채 이것저것 눌러 보는 그 모습이 이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비로소 해진이 제 나이로 보였다.
분홍빛 도는 녀석의 손끝을, 조금 상기된 볼을 핥듯이 바라보던 라일은 멍하니 상념에 빠져들었다.
이제 해진은 밥을 곧잘 챙겨 먹었다. 아직 하루의 대부분을 침실에서 보내곤 했으나 종종 산책을 권유하면 의욕을 보일 때도 있다고 했다. 오늘만 해도 서재에 가자는 소리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라일은 아주 조금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이상한 상태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을 만큼은 말이다.
자신은 왜 해진의 어두운 표정 하나에 이리도 심장이 옥죄는지. 고작 몇 술 못 뜨고 상을 물리는 녀석의 마른 손목은 왜 그리 신경 쓰이는지. 책임감이라는 이름 아래에 왜 그리 많은 걸 해 주고 싶은지.
라일은 비로소 무척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렇게 하는 건가?”
신중하게 태블릿을 이리저리 만지던 해진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침실에는 늘 그렇듯 그 혼자뿐이었다. 허공에 흘러간 목소리가 조금 머쓱한 기분을 주었다. 잠깐 문 쪽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태블릿의 화면에 집중했다.
서재를 안내받은 지 며칠, 다시 지루한 일상이 지나갔다. 매일 같이 그를 찾아오던 라일은 일이 바쁜지 잘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저도 모르게 누군가와 같이 아침을 먹는 게 일상이 되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깨달음은 퍽 씁쓸한 맛이었다. 그래도 이내 괜찮아질 수 있었다. 어차피 썩 편한 시간은 아니었기에 해진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라일은 어느 날 밤 또 불쑥 찾아와 이 태블릿을 내밀고 갔다.
아무래도 서재에서 너무 오래도록 만지작거린 게 원인인 것 같았다. 신기해서 그런 건 사실이었으나 라일이 신경 써 주길 바란 건 아니었기에 부담스러웠다.
얼떨결에 받아 든 이 기계를 해진은 하루 넘게 그냥 응접실에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다시 무료한 나날이 시작되니 할 수 없이 눈길이 갔다.
호기심이 정말이지 아주 오랜만에 내면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어차피 받은 것인데 깨끗하게 쓰다가 여기 두고 나가면 되지 않을까.
충동적으로 포장을 뜯고 이것저것 건드리다 보니 시간이 아주 잘 갔다. 자신의 낡은 핸드폰으로는 하기 힘들던 인터넷도 빨랐다. 어느새 해진은 홀린 듯 태블릿에 빠져들었다. 맨 처음 아버지에게 선물 받았던 날처럼.
문득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사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중간에 마크가 잠깐 다녀간 것 같은데 너무 몰두했나 싶어서 이제야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휴…….”
자꾸 이렇게 이 저택에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곳을 나가기 전까지 해진은 자신을 죽이고 또 숙여서 없는 듯 있다가 가고 싶었다.
그러나 겨우 살아난 호기심이 자꾸 그의 의지를 톡톡 건드렸다.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조금쯤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묘한 반발심이 드는 생각이었다. 시간을 보느라 휴대폰을 들었던 해진은 무심코 날짜를 살폈다. 얼마 전에 살펴본 것처럼 이제 한 달 반 뒤면 계약은 끝이다.
그 순간 묘한 불안함이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해진은 덤덤하게 태블릿의 화면을 끄며 잘 준비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제가 쓸데없는 여유를 찾는 바람에 마음이 퍽 불편한 모양이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