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며칠 만에 라일이 아침에 그의 방에 나타났다.
종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해진은 기이한 예감과 함께 문을 바라보았다. 종소리를 듣고 대답하는 순간이 퍽 느리게 느껴졌다.
문이 열리는 순간에는 이상하게 피부가 한 올씩 일어나는 기분을 받았다. 어제 잠들기 전 그를 엄습했던 불안감이 실체를 가진 채 다가오기라도 하는 듯이.
딱딱하게 굳어 그를 바라보자 응접실로 들어서던 라일도 덩달아 몸을 굳혔다.
둘 사이로 심장 소리가 기차처럼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해진 또한 한껏 당황한 상태였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그때 머뭇거리던 라일이 제 입가를 가리며 시선을 피했다. 슬쩍 아래로 깔린 잘난 눈매가 어쩐지 며칠 전보다 더 초췌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가 곧, 러트라서.”
그 순간 불안하게 흔들리던 해진의 심장은 쿵 떨어졌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5년이나 이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해진은 라일의 러트 주기를 꿰고 있었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어제 무심코 날짜를 봤을 때 몸이 먼저 깨달아 버린 것이다.
며칠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나타난 라일을, 해진은 이제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제 자신이 그토록 몰두해서 시간을 보냈던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또 나를 이용하려고 이렇게 찾아왔나.
이 저택에서는 들리지 않게 된 노크 소리가 다시 환청처럼 울렸다. 울렁거리는 속이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굴었다. 그와 보낸 마지막 러트가 악몽처럼 천천히 해진에게 검은 손을 내밀었다.
“안심해.”
그 순간 라일이 한숨처럼 한 마디를 꺼냈다.
화들짝 놀라 그의 눈을 마주하자 잔뜩 일그러진 라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런 표정을 하는 걸까.
“이번엔 알아서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서 왔어.”
“…….”
낮게 깔린 라일의 목소리에는 진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제 안의 두려움을 쫓느라 여유가 없는 해진은 그걸 읽어낼 재주가 없었다.
조금 견뎌내면 갈 수 있는 병원 따위랑은 차원이 달랐다. 애초에 그 환청 같은 노크 소리가 시작된 시발점을 떠올리는 순간 해진은 바짝 굳어 버렸다. 라일의 입에서 나온 러트라는 단어가 이토록 아프게 몸을 찔러 온다.
어쩔 수 없이 기대를 품었다. 라일의 말을 믿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저 말에 기대고 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시 그 방에 비참하게 끌려가게 될까 봐. 서러움을 숨처럼 삼키게 될까 봐.
그래서 해진은 부디 저 말이 진실이기를 모순적으로 바랐다. 무력한 기대가 그를 옭아매듯 감싸 안았다.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한 해진은 다시 라일의 발끝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알아서 해결한다니, 다른 오메가를 구한 걸까. 정말로 자신을 이 저택에 계약 기간 동안 묶어 둔 게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일은 살짝 뒤로 물러났다. 해진의 시선이 닿는 발끝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픈 착각이 들었다.
“앞으로 3일은 이 저택에 없을 테니, 편히 쉬도록 해.”
그가 이 말을 하고 나서야 해진은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선이 다시 마주치기 무섭게 이번엔 라일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도망치는 것과 별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녀석의 방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자 라일은 들이쉬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녀석의 반응은 딱딱했다.
절망하는 표정을 떠올리니 이상하게 온몸이 돌이 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애써 움직이지 않는 걸음을 떼 해진에게서 멀어졌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녀석에겐 위협이 될 테니까.
서재에서 눈을 반짝이는 해진을 본 날 라일은 제 안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그것이 굉장한 착각이라는 걸 깨달아야 했다. 잔잔한 물결은 정신 차리니 어느새 거대한 해일처럼 그를 덮쳐 왔다.
몇 번이고 거대한 감정에 익사할 듯이 몸부림쳐야 했다. 눈을 감으면 해진이 보였다. 삼 일이나 잠을 설치다가 겨우 기절하듯 잠이 들면, 이번엔 아프게 웃던 해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라일도 똑똑히 알았다. 그래서 원인을 찾고자 며칠간 해진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자꾸 해진의 모습이 궁금하고 또 보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찾아오지 못했다. 녀석을 앞에 두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서, 도무지 제 상태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이런 감정을 가진 적이 없던 라일은 금방 혼란에 빠졌다. 죄책감이 지나친 나머지 이리 큰 영향을 받는 걸까. 제 안에 이렇게 제대로 된 양심과 도덕성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기에 더더욱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곧 러트가 다가온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혹시 이게 페로몬의 작용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애초에 해진을 붙잡고 놓아주지 못한 건 빌어먹을 페로몬 해소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 러트를 성공적으로 보내면 머리가 조금은 맑아질 거란 희망이 생겼다.
희망을 억지로 자아내고 나니 문득 해진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주기는 녀석도 분명 알고 있으리라. 어쩌면 또 지레 겁을 먹고 저택을 나가야겠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라일은 자신이 녀석을 찾아와야 할 핑계가 필요했다는 걸 깨달았다. 해진에게 태블릿을 굳이 직접 건네러 왔던 날처럼.
“후…….”
다급하게 저택 입구까지 나온 라일은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러트는 러트인지, 방금 조금 그에게 옮겨 온 해진의 페로몬이 이토록 달콤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이번에 그가 선택한 건 제대로 된 페로몬 해소가 아니었다. 여전히 다른 오메가를 마주하는 건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업무상 오메가를 마주해야 할 때조차 라일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형질을 향한 역겹고 혐오스러운 감정은 그간 아슬아슬하게 오메가에 대한 혐오로만 표출되곤 했다. 라일 자체가 형질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우성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해진에게 다시 몹쓸 짓을 한 날 기어코 제게 번져 버린 혐오는, 더는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무겁게 그의 심장을 내리눌렀다.
해진이 심고 빗물이 틔워 낸 싹이었다. 무럭무럭 자란 스스로를 향한 혐오를, 라일은 더는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러트 기간 내내 병원에 입원하는 걸 택했다. 입원하는 동안 수면제로 억지로 몸을 잠들게 하며 페로몬을 해소할 것이다. 몸에는 썩 좋지 않은 해소용 약물을 같이 투여하면서.
차라리 다행이기도 했다. 해진에 대한 상념으로 잠을 못 이룬 지도 벌써 며칠째였다. 삼 일이나 업무 공백이 있을 테니 라일은 미친 듯이 밀려 있던 일을 처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차에 올라타기 직전 다시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까지 짙게 남아 있는 해진의 체향이 점점 허공으로 흩어지는 게 무척 아쉬웠다.
***
라일은 꿈을 꾸었다. 회색빛으로 물든 도시를 하염없이 걷는 꿈이었다.
업무를 끝마친 그는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해진도 다녀간 바 있던 병원의 최상층에는 그를 위한 특수 병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주치의는 차라리 구역질하더라도 오메가와 페로몬 해소를 할 것을 권유했다. 그만큼 억지로 페로몬을 흐트러트리는 약물은 몸에 위험했다. 그러나 라일은 고개를 한 번 저은 뒤 침대에 누웠다.
도무지 해진 이외의 누군가와 살을 맞대는 게 거북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죄악감마저 느껴지는 이 상태를,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한 머리로는 차분하게 분석할 수가 없었다.
싸늘한 병원 침대에 눕자 문득 해진 생각이 났다. 녀석이 텅 빈 눈으로 병원 천장을 바라볼 때 대체 무슨 심정이었을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수면제가 팔로 파고드는 감각을 느끼며 라일은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비가 자주 오는 도시는 비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온통 회색빛으로 물든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조차 그저 흑백 영화의 인물처럼 무감각한 모습이었다. 그 거리에 스며든 라일은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그때 문득 옆에서 불쑥 우산이 튀어나왔다. 건조하게 눈길을 돌리니 익숙한 얼굴의 비서가 우산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주위에는 함께 걷는 사람이 몇몇 더 있었다. 제 어깨에는 두꺼운 코트까지 덮여 있는 걸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최근이 조금 유달라서 그렇지, 라일은 보통 꿈을 잘 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 그는 계속 걸었다.
귓가에는 거센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비가 오긴 했으나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라일은 이 또한 그러려니 했다.
걷다 보니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내내 귀를 먹게 할 것 같았던 빗소리에 이제야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인형처럼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도 비에 녹아내린 듯 어느새 사라졌다. 그렇게 한산한 회색빛 도시에 라일은 혼자 남았다.
그렇게 앞으로 걷는 순간, 문득 허공에 무지갯빛 아지랑이가 보였다.
“…….”
홀린 듯이 그 아지랑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보란 듯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무지개를 보면서 자신이 이것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아지랑이는 너무나도 옅어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세찬 비마저 내려서 눈을 잠깐이라도 떼면 금방 사라져 버릴 것 같다.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라일은 천천히 걷던 걸음을 조금씩 재촉하면서 아지랑이를 따라갔다. 무지갯빛인 그것은 이 회색빛 도시에서는 너무나도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인간들이 저걸 본다면 그처럼 탐낼 것 같아 문득 두려워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