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52화 (52/101)

#52

어느새 도시를 지나 초원이 밟혔다. 그것마저 지나가니 높다란 담이 나타났다. 익숙한 저택의 모습에 그는 혼란을 느꼈다. 자신이 또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을 꿈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 꿈은 어릴 적 이후로 꾼 적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그때와는 다르게 계속 비가 내렸다. 그의 발걸음처럼 하염없이.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아지랑이는 저택 안을 향하고 있었다.

익숙한 걸음으로 라일은 저택에 들어갔다. 어느새 그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던 우산은 사라진 상태였다. 지붕 밑으로 들어왔는데도 귓가에는 계속 빗소리가 들렸다. 영원히 그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어느새 시선 끝에는 퍽 익숙한 방문이 보였다. 누군가가 그를 거세게 잡은 것도 그때였다. 마크였다.

“도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

지금껏 헤쳐 지나온 비가 일시에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꿈이 아니었나. 라일은 갑작스럽게 그를 덮친 현실감 때문에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자신이 왜 저택에 있단 말인가. 왜 해진의 방문 앞에.

“정신이 드십니까?”

아까 얼핏 봤던 비서가 다급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주위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경호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멍한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아직도 시야가 온통 흑백으로만 보였다. 망가진 화면을 바라보듯 색이 쏙 빠진 세상이 혼란스럽다.

그때 뒤에서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모든 인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오직 라일만은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등 뒤에서부터 훅 페로몬이 밀려든다. 아까부터 그가 따라온 찬란한 아지랑이가 그의 시야를 잠식했다.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라일은 천천히 뒤로 돌았다. 밖에서 소란이 일자 방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해진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의아함을 나타내고 있던 그 얼굴이 라일을 보자마자 서서히 굳어 갔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혼자 빛나는 해진은 굳은 얼굴을 하고도 무척이나 찬란했다.

굳어 있던 그 표정은 이내 무너져 내렸다. 라일이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일그러지는 하얀 얼굴을 보며, 그는 심장이 멎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곤 이내 깨달았다. 그 강한 수면제를 먹고도 제 발로 저택까지 돌아온 이유를.

각인했다.

그것도 나를 원망스레 보는 저 눈길에.

<챕터 8>

이토록 강한 깨달음이 머리를 강타했는데도 정신이 들지 않았다. 저를 향한 저 하얀 얼굴이 지나치게 어여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덕분에 라일은 멍하니 해진을 바라만 보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망가진 화면 같았던 세상은 그럭저럭 원래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해진 덕분에 복도에 있던 모두는 석상처럼 숨을 죽였다. 그리고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받은 해진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얼굴에 서린 원망은 급기야 서러움으로 바뀌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라일은 다시 심장이 철렁 아래로 쏟아지는 걸 느꼈다. 눈빛만 봐도 지금 해진이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두려움을 담은 페로몬이 꼭 거대한 창처럼 그의 몸에 박혀 들었다.

오해를 풀어야 한다.

오로지 그 일념으로 라일은 해진에게 다가갔다. 이게 멍청하고 성급한 짓이었다는 건 녀석이 아예 도망치듯 완전히 물러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비가 내릴 듯 일그러지는 눈매를 보니 다급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안심하라고, 했으면서…….”

어쩔 수 없이 제일 기대하고 싶지 않은 라일에게 기대를 가진 것도 서러웠다. 그런데 그 기대마저 무참히 짓밟히는 순간은 꼭 그날 밤처럼 비참하기만 하다.

옅게 내리던 비가 갑자기 세차게 존재감을 내뿜은 게 이걸 위한 전조였을까. 너울거리는 라일의 페로몬이 훅 해진을 둘러싸듯 끼쳐 왔다. 라일이 다가올수록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숨이 막힌 해진이 저도 모르게 목 근처로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덥석 라일에게 양 손목이 잡혔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아니라고……?”

아까부터 차가운 비를 맞기라도 한 듯 두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웃긴 건 라일의 손도 저만큼 떨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붙잡힌 두 손은 놀랍게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꼭 라일이 강하게 쥐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것처럼.

그때 눈치를 보던 비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병원에서 잠드셨는데 갑자기 몸이 이상 반응을 보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주치의를 호출했으니 곧 올 겁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그제야 조금 이상한 것이 보였다. 비서의 어깨는 비로 엉망진창 젖어 있었다. 두려운 눈길로 돌아본 뒤쪽에도 비에 흠뻑 젖은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그리고 제 손목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다. 라일에게서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일단 씻으시지요. 몸이 너무 차갑습니다. 브라이트 씨, 죄송하지만 이곳 욕실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마크가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라일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빠르게 저를 잡을 듯 다가온 게 무색하게 라일은 그 손길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돌아가는 상황이 무척이나 이상했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해진의 시선이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허락을 구하듯 저를 바라보는 마크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길에 해진을 향한 걱정이 가득 녹아 있어서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얼어붙어 있던 공간이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거짓말처럼 살아 움직였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들은 재빨리 어딘가로 연락하며 밖으로 물러났다. 비서 또한 전화기를 들고 급히 뛰어나갔다. 마크는 사용인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며 라일을 욕실 쪽으로 이끌었다. 한 사용인은 마른 수건을 들고 안절부절못하며 해진에게 다가왔다.

그때까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라일이 동요를 숨기지 못한 채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문득 해진은 제 몸이 더는 떨리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지금까지 벌벌 떨리던 게 제 손이 아니라 라일의 손이었다는 것처럼.

***

“……음.”

다급하게 라일의 저택으로 달려온 그의 주치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가 멋대로 병원을 빠져나갈 때부터 라일의 의료진들은 비상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덕분에 주치의는 그가 샤워를 끝마치자마자 해진의 응접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오묘한 타이밍 때문에 해진도 덩달아 그의 진료에 동석하고 말았다. 당연히 다들 빠져나가리라 생각하고 응접실에 어정쩡하게 못 박혀 있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 지금 상황에서 침대 근처로는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같이 앉아서 진료하는 장면을 보게 될 줄 알았다면 다른 방이라도 갔을 텐데.

놀랍게도 여기 있는 그 누구도 해진이 동석하는 것에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았다. 제 내밀한 진찰을 내보이는 라일조차. 아까부터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왜인지 격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라일의 몸을 진찰하던 주치의는 다시 곤란한 낯으로 해진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도 알파이기에 해진이 오메가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주 옅게 느껴지는 페로몬을 보면 열성이리라.

“주치의.”

그때 그의 시선이 해진을 향하자마자 라일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마치, 함부로 그쪽을 바라보지 말라는 듯이.

놀란 주치의는 이번엔 대번 라일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의 오메가 혐오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두통이 없다며 저를 찾아왔던 날의 라일이 기억났다. 상성이 잘 맞는 오메가의 페로몬이라도 맞은 것이냐고 진단 내렸던 그날을.

러트에 빠진 라일의 페로몬은 성난 파도처럼 이 응접실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알파인 주치의는 덕분에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쪽에 앉아 있는 오메가에게는 별 타격이 없는 듯 보였다. 얼핏 본 얼굴에 미미한 거부감이 서려 있긴 했어도 말이다.

현재 라일은 사흘은 족히 잠들 만한 수면제를 투약한 상태였다. 페로몬을 억지로 해소하는 약은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러트에 사용하는 해소약은 그에게 임시로 처방하곤 하는 경구 투여약과는 고통의 깊이가 차원이 달랐다.

그런데도 라일은 병원부터 이 먼 곳까지 쉬지 않고 걸어왔다. 우성 알파의 괴물 같은 체력을 입증하듯 그는 저를 저지하는 경호 인력들까지 전부 제치고 끝내 병원 밖으로 나섰다. 수면제에 절은 상태로 어떻게 그렇게 움직였단 말인가.

무모한 라일의 걸음 끝에는 저 오메가 청년이 있었다.

“일단, 지금 잠드셔야 합니다. 깨어 있을 상태가 아니란 말입니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 주치의는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그에게 상태를 환기했다. 곤혹스럽게 얼굴을 구긴 라일은 저도 모르게 해진 쪽을 한 번 보았다가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우선 진단은 나중이었다. 러트에 접어든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점점 불규칙하게 사방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제어가 안 될 정도로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래저래 사고가 일어나기 쉬우리라.

잠깐 고민하던 주치의는 애써 해진 쪽을 쳐다보지 않으며 라일에게 제안했다.

“페로몬 해소가 안 되는 상황이라면 상성이 잘 맞는 오메가의 페로몬이라도 가까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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