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53화 (53/101)

#53

“그건 안 돼.”

대답은 찰나의 틈조차 없이 튀어나왔다. 어딘가 화가 난 라일이 주치의를 성난 눈길로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치의는 그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임시방편의 처방일 뿐이니까.

“다른 말이 아닙니다. 우선 페로몬이 배어 있는 물건이라도 빌려서 곁에 두고 잠드세요. 다만, ……열성이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다면 단순히 물건으로는 부족할 수 있어서 여쭙는 겁니다.”

다시 라일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각오를 하고 주치의는 해진에게 물었다. 가만히 빠져나갈 틈을 노리던 해진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성이 잘 맞는 오메가가, 설마 자신이던가.

이제야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던 라일의 ‘이상’이 이것과 관련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정말로 뭔가 몸에 문제가 생겼구나.

“진, 침실로 들어가. 들을 필요 없어. 아니, 아니. 우리가 나가지. 다들 나가.”

초조하기까지 한 몸짓으로 라일은 벌떡 일어났다. 주치의가 만류라도 하듯 덩달아 일어난다. 그 이상한 모습을 해진은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분명 아까 막 이곳에 들어오던 주치의는 알파 페로몬을 자연스럽게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격한 움직임을 하는데도 이상하게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건 오로지 커튼처럼 저를 둘러싼 라일의 페로몬뿐이었다.

“진정하세요. 괜찮으시다면 저분이 사용하시는 침실이라도 빌리시죠.”

“……무슨 소리야.”

주치의는 서서히 저를 옥죄듯 둘러싸는 라일의 페로몬이 불편해 인상을 찌푸렸다. 의도적으로 저쪽의 오메가와 저 사이에 페로몬으로 방벽을 두르고 있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빨리 처방하고 사라지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병원에서 준비했던 장비를 모두 가져왔습니다. 저분의 페로몬이 짙게 남아 있는 곳에서 다시 수면을 유도해 볼 겁니다.”

“…….”

생각지도 못한 처방에 라일은 곤란한 기색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처음부터 해진이 없는 곳에서 진단을 받았어야 했는데 실책이다. 욕실을 벗어나자마자 주치의가 이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미처 판단하지 못했다. 둔해진 머리는 다시 시야에 들어온 해진을 담느라 여념이 없어서 더 그랬다.

그때 모두가 침묵한 상황에서 마크가 앞으로 나섰다. 베타인 그는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페로몬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저에게도 느껴질 정도로 라일의 페로몬이 미친 듯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브라이트 씨께서 허락하신다면, 며칠만 다른 손님방에서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해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그 정도로 이 상황을 넘길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이들이 반응하는 것처럼 여기가 온전히 그의 방도 아니었고.

다만 제게 닿는 라일의 시선은 자꾸 생경한 기분으로 관찰하게 되었다.

응접실에 짙게 깔린 라일의 페로몬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도 자욱한 페로몬들은 신기하게도 정작 해진에게는 바짝 다가오지 못한다.

마치 자신이 커다랗고 뜨거운 불이라도 된다는 듯, 묘한 느낌을 주는 페로몬이었다.

***

“혹시 잠이 오신다면 약은 더 안 드시는 게 좋습니다.”

“……아니야. 넉넉하게 더 투여해.”

라일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다시 멍하니 일어나 해진이 있는 곳으로 기어들어 가지 않을 자신이. 차라리 아예 약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각인했다는 걸 고찰할 시간도 없이 라일은 서둘러 잠들고 싶었다. 러트가 심화할수록 자꾸만 해진을 향해 가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만 더 녀석의 서러운 얼굴을 본다면, 정말이지 죄책감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깨어나시면 진료를 받으러 오세요.”

주치의는 어딘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무언가를 눈치챈 듯한 모습이기에 라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의 링거를 조정한 주치의는 방을 어둡게 한 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금방 적막이 감싸는 공간에서 라일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침실 가득히 배어 있는 해진의 페로몬이 마치 자장가라도 된 양 그를 어루만졌다.

난생처음 맞이하는 극도의 안정감 속에서 라일은 까무룩 정신을 놓을 수 있었다.

***

“없었나요?”

애타게 물었으나 마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말씀하신 곳을 살폈는데, 없더군요. 혹시 다른 곳에 두신 건 아닌지요.”

“아…….”

사용인들이 준비해 준 다른 방은 마찬가지로 깔끔한 분위기였다. 다만 해진이 머무르던 곳과는 다르게 응접실과 옷방까지 따로 달린 모양새는 아니었다. 해진의 예전 방처럼 외관 건물에 있었으나 꽤 넓은 크기였다. 아마 최대한 라일과 먼 곳에 있을 수 있도록 신경 써 준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침실을 내어주게 된 해진은 얼떨떨하게 이곳으로 와야 했다. 덕분에 가족사진이 들어 있는 중요한 지갑을 깜빡하고 챙기지 못했다.

차마 라일이 누워 있을 그곳에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마크에게 대신 부탁했다. 그러나 그 방에 몇 번이고 다녀온 그는 지갑을 보지 못했다고 말해 해진을 불안하게 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근처에 있던 사용인들 모두가 안절부절못하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안 그래도 그들은 상처가 많은 해진을 유리 공예품을 보는 심정으로 보듬어 왔다. 그런데 난데없이 라일이 그의 침실까지 빼앗는 모양새가 되는 바람에 퍽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도련님이 깨어나시면 다 같이 또 찾아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마룻바닥까지 들어내서라도 찾아드릴게요.”

“맞아요. 지금 그곳이 어두워서 안 보였을 수도 있으니까.”

사진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시무룩해져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 저택에서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은, 정말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대답하는데 이상하게 목이 조금 멨다.

***

하얀 시트에서는 좋은 냄새가 풍겼다. 페로몬 같은 것이 아닌 섬유유연제의 향긋한 내음이었다. 그곳에 얼굴을 묻은 채 누워 있던 해진은 문득 라일의 페로몬을 떠올렸다.

응접실에서 느꼈던 라일의 페로몬은 확실히 이상했다. 러트인데도 불구하고 퍽 얌전한 산들바람처럼 움직였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저택을 나가겠다는 자신을 겁박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비록 그 페로몬이 그를 해칠 것 같은 기운을 담지는 않았어도, 뚜렷한 목적으로 몸을 파고들긴 했으니까 말이다. 같은 장소에서 겪은 일이라 그런지 그 차이가 더욱 명확하게 두드러졌다.

분명 상성이 좋은 페로몬이라고 그랬지.

의사가 해진을 바라보며 했던 말도 떠올렸다. 습관적으로 드는 불안감 때문에 해진은 살포시 얼굴을 굳혔다.

이제야 라일의 이상한 행동이 좀 이해가 되었다. 왜 이 저택에 그토록 해진을 잡아 두려고 했는지. 페로몬에 상성이 있다는 걸 그는 처음 알았다. 그런데 라일이 저렇게 행동할 정도면 분명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하리라.

그러다 덜컥 겁이 났다. 혹시 계약이 끝난 후에도 라일이 저를 놔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자신은 가야 할 곳이 있는데.

꾸물꾸물 몸을 움직인 해진은 마크가 챙겨 준 태블릿의 화면을 켰다. 그는 이 기계를 지문조차 쉬이 남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쓰고 있었다. 누군가가 사용했다는 흔적도 없이 이곳에 두고 갈 수 있도록 말이다.

차근차근히 알고 싶은 내용을 인터넷에 찾아보았다. 과연 페로몬의 상성이라고 검색하니 쓸 만한 정보가 많이 나온다.

[유전적으로 유난히 상성이 잘 맞는 페로몬이 존재한다. 이 경우 알파와 오메가는 상대방을 향한 무의식적인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제일 먼저 뜨는 내용을 보면서 해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경우가 많다지만 저와 라일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내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페로몬과 관련된 지식이 그도 알아보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뒤늦게 발현해 미처 몰랐던 것들도 많았다. 진작 찾아볼 걸 그랬지 싶은 정보들이다. 홀린 듯이 여러 이야기를 읽던 해진은 손가락을 멈칫했다.

“…….”

이제 와 굳이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또 필요 이상으로 적응하려고 드는 스스로의 행동이 퍽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일단 필요한 부분만 빠르게 훑어보기로 한다.

그렇게 한참을 문서 사이를 떠돌다 무얼 잘못 검색했는지 곁가지 지식까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뛰어난 상성은 각인의 조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각인한 경우 상대의 페로몬이 없다면 사망에 이르게 되는 위험성이 있으며…….]

그 지식이 각인이라는 카테고리까지 넘어간 걸 알게 된 해진은 다시 무표정하게 처음으로 돌아갔다. 각인이라는 현상은 영화 같은 곳에서 종종 보긴 했다. 역시나 지금 상황에는 썩 필요한 지식이 아니리라.

조금 더 키워드를 추가해 가며 검색하자 드디어 원하는 내용이 나왔다. 상성이 유난히 뛰어난 페로몬이 있긴 하지만, 꼭 그것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는 정보였다.

거기까지 살핀 후에야 해진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일까 봐 긴장했는데 다행이었다. 라일은 그저 그가 제일 간편한 상대라서 계약조건을 내건 것이리라. 상황이 점점 변화하고 있으니 괜찮겠지.

걱정거리가 사라지자 또 다른 걱정거리가 해진을 엄습했다. 그의 지갑은 어디 갔을까. 분명 라일이 오기 전까지 들고 있다가 침실 협탁 위에 올려 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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