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54화 (54/101)

#54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서둘러 나가느라 일단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올려 둔 곳이 협탁이 아니었나?

그때의 상황을 반추하던 해진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한 곳으로 흘러갔다. 사용인들이 다시 제 물건에 손대는 건 아닐까.

이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우울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낮에 그렇게 저를 위하는 듯 굴었던 사람들이 훔쳐 갔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너무 슬플 것 같아서.

“…….”

한번 생긴 의심은 끝도 없이 자라나 그다지 크지 않은 이 방을 가득 메울 수 있을 만큼 재빨리 몸집을 키운다. 이내 거대한 덩치를 가지게 된 그것은 해진을 묵직하게 누르기 시작했다.

어둠을 틈타 자라난 의심 때문에 해진은 잠이 싹 달아나는 걸 느꼈다. 하필 방도 외관으로 바뀌니 기분이 더 이상해진다. 꼭 낮까지 있던 일은 전부 꿈에 불과하고 자신이 5년 전으로 돌아간 건 아닌가 싶은 비이성적인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지갑을 찾아야 한다.

이런 상태로는 도무지 내일 아침에 그를 찾아올 마크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은 다시 ‘집사’인 그를 보고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덜컥 겁이 들었다. 해진은 홀린 듯 침대에서 빠져나와서 가운을 걸쳤다. 이제는 밤에도 제법 쌀쌀한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빨리 지갑만 찾아서, 돌아오자.

***

소리가 날까 봐 목발도 가져오지 않은 해진은 꽤 힘겹게 본관까지 들어와야 했다. 자신이 거처하던 방문이 보이고 나서야 덜컥 정신이 들었다. 이 밤중에 목발도 없이 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그러나 지갑 생각을 하니 다시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도둑맞은 거라면 어떡하지. 그 안에 들어 있는 현금 따위는 걱정되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둘 곳이 없어 지갑에 넣어 둔 사진뿐이었다. 하나밖에 챙기지 못한 가족사진이었다.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저 방을 열면, 라일이 있겠지.

러트 중인 라일의 페로몬은 방문 밖으로 느껴질 정도로 진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해진은 자신이 저 러트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래저래 비이성적인 강박이 아닐 수 없었다. 실책을 깨달았다면 돌아가야 하는데 지갑의 존재가 신경 쓰여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는 추운 날 발목이 차가워지도록 제가 쓰던 방문 앞을 이리저리 맴돌아야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몸은 자꾸만 위태롭게 흔들렸다.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어도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볼이 차가워질 정도로 시간을 오래 지체한 탓이다.

이러다가는 사용인 중 누군가가 지나갈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해진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는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용기를 내 문고리를 잡았다. 숨을 참고 응접실에서 빠르게 옷방으로 들어가자. 손에 잡히는 것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빨리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문고리를 조금 안쪽으로 밀어 틈이 생긴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

해진은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안정하게 비틀거리는 다리는 깁스 때문에 더욱 중심을 잡지 못했다. 눈 깜짝하는 사이 바닥이 점점 가까워진다.

꼴사납게 응접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단단한 품이 그를 안으며 지탱했다. 진한 라일의 페로몬이 마치 쿠션이라도 된 듯 해진을 감쌌다.

그러나 이번엔 겁을 먹은 나머지 바짝 굳어 버렸다. 자신을 빠짐없이 감싸는 페로몬으로 이미 이 품의 주인이 라일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퍼뜩 고개를 들자 새파란 두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큰일이다.

이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퍼뜩 정신이 났다. 멍청한 짓을 하고 말았다. 러트 중인 라일에게 제 발로 걸어오다니.

진한 페로몬을 맡으니 숨이 턱 막혔다. 가족사진 생각에 너무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는 대체 어떻게 일어나 있는 걸까. 얼핏 듣기로는 일반적인 투약량의 두 배에 달하는 수면제를 투여했다고 들었다. 사흘간은 절대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보는 라일의 앞에서 해진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새 닫힌 문이 등 뒤에 닿는다. 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제 발로 이 방에 온 자신을, 라일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너무나도 두려웠다.

성큼 다가온 그는 두 손을 해진의 머리 옆에 짚었다. 꼼짝없이 품에 갇힌 모양새인데 문도 열 수 없게 되었다. 슥 라일이 고개를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와 닿았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볼의 솜털이 일일이 바늘처럼 비죽비죽 솟아올랐다. 볼 근처에서 시작된 소름이 마치 젖은 캔버스에 물감이 번지듯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

절망스러운 감정이 해진의 머리를 관통했다. 라일의 페로몬은 점점 이 방을 자욱하게 채워 나가고 있어서 꼭 익사할 것만 같은 심정이 된다.

그런데,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는데도 라일은 왜인지 그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고개를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데 여념이 없던 해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퍽 오랜 시간 뒤였다. 그동안 제 몸에 가해지는 어떠한 충격도 없다는 걸 겨우 깨달은 것이다.

희미한 시선을 들어 고개를 트니 라일은 여전히 해진의 목 근처에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었다. 꼭 체향을 들이켜듯이.

페로몬을 떠올리는 순간 또 한 가지 묘한 것을 깨달았다. 분명 방을 가득 채워 터뜨릴 듯 자욱한 라일의 페로몬인데, 어쩐지 해진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러트 시기의 페로몬이 이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라일은 묘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해진의 양옆을 짚은 손은 미묘한 거리감을 둔 채 더 가까이 오지 않는다. 그 알 수 없는 거리감이 겨우 그의 숨통을 틔워 주었다.

정신을 겨우 차리고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는 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금방이라도 저 큰 손이 저를 도로 잡아챌 것만 같았다. 마치 히트 사이클이 왔던 그날 밤처럼.

두려움으로 가득한 페로몬을 숨기지 못한 해진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겨우 몸을 움직인다. 그렇게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라일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기묘한 안도로 뒤를 돌아본 순간 다시 숨을 멈췄다. 어느새 똑바로 자세를 편 라일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무스 씨.”

달달 떨리는 목소리가 한숨처럼 튀어나왔다. 그런데도 라일은 고개를 슬쩍 기울일 뿐 대답을 하지 않는다. 확연한 이상 반응에 훨씬 더 겁이 났다. 하필이면 문 쪽에 그가 서 있어서 오도 가도 못한 채 해진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두려움이 진하게 묻은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했다. 본래도 페로몬 수습에 능숙하지 못한 해진이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힘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응접실 안에 있던 라일의 페로몬이 그 색을 바꾸었다.

“이게, 무슨…….”

황당할 정도로 급변하는 페로몬의 느낌 때문에 해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멍하니 벌려야 했다. 그의 페로몬이 너무 직접적인 감정을 하나 담고 있어서.

그건 애정이었다.

한 번도 라일에게서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감각이었다. 애초에 해진은 살면서 이런 원색적인 페로몬을 접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언어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꼭 베타였던 어머니의 따스함을 페로몬으로 풀어낸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가족의 사랑보다는 조금 더 성애적인 의미가 담겨 있긴 했으나, 해진은 그 외에 비슷한 것을 떠올릴 수 없었다.

너무 당황스러운 일을 겪으면 두려움도 쉬이 날아가는 모양이었다. 가쁘기만 하던 숨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묻고 싶어서 라일의 두 눈을 드디어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해진을 향하긴 하지만 어딘가 멍했다. 그제야 진짜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닫는다.

“베르무스 씨?”

“…….”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가면 라일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해진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쫓았다. 반대로 움직여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해진의 페로몬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듯 허공에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 라일의 팔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링거가 꽂혀 있던 팔목이었다.

“상처가…….”

덜컥 무서워진 해진은 역시 마크나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결심했다.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향했으나 라일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멍하니 시선만 움직일 뿐이었다.

고민하던 그는 이를 악문 채 이번엔 침실 쪽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발짝 정도 그와 떨어지자 라일이 드디어 움직였다.

입술을 짓씹으며 어설프게 페로몬을 풀어냈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적당한 의지를 담지는 못했다. 다급한 심정을 뭉뚱그린 무언가의 감정이 라일에게 스르륵 흘러간다.

거짓말처럼 그는 조금 더 빨리 다가오기 시작했다. 열심히 절뚝거린 해진이 침실 문을 활짝 열었다. 꼭 스스로를 미끼로 삼고 있는 것 같아서 덩달아 조급해진다.

그렇게 근처까지 다가온 순간 해진은 그의 등을 툭 침실 쪽으로 밀어냈다. 의외로 라일은 순순히 그 안으로 사라졌다.

“읏.”

재빨리 침실 문을 닫아 버린 해진은 성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리 때문에 속도가 결코 빠르지 못했으나 복도로 빠져나갈 때까지 그는 쫓아오지 않았다. 침실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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