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곧 복도에서 사용인을 만난 해진은 겨우겨우 라일이 상처를 입었음을 알릴 수 있었다. 놀란 마크와 다른 이들이 라일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몇몇은 남아서 목발도 없는 그를 챙겼다. 멍하니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해진은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베타인 그들이 페로몬을 못 맡아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그의 몸 전체와 저 방 가득히 남아 있을 라일의 애정 서린 페로몬을 떠올리니 자신이 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혼란스러운 밤이었다.
***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가 있어!’
‘그만 좀 해.’
처음으로 아버지의 외도 사실을 알아차린 어머니는 저택을 전부 때려 부술 기세로 화를 내었다. 매사 덤덤한 표정이던 아버지도 그날만큼은 성난 목소리를 자제하지 못했다.
열두 살의 어린 라일은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무표정하게 고민했다. 저게 그렇게 싸워야 할 일이던가.
그들의 결혼은 어린 라일이 보기에도 이미 예전에 파탄이 나 있었다. 애초에 마치 뛰어난 형질을 만들어 내는 게 지상과제인 양 친족들과 경쟁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다른 친족 중에도 우성은 없었다. 그러니 그중 가장 뛰어난 알파인 라일은 분명 ‘성공작’이다.
그러니 서로 누구랑 배가 맞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말싸움하다 못한 아버지는 결국 먼저 자리를 떴다. 어머니가 화가 난 나머지 페로몬으로 아버지를 압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성이라는 프라이드로 늘 아버지를 찍어 누르는 덕에 더욱더 그가 멀어진다는 걸 어머니는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놀랍게도 라일이 더 이해 못 하는 건 어머니 쪽이었다. 외도를 한 주제에 당당하게 구는 아버지는 처음부터 이해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건 확실하게 멍청한 짓이었으니.
그러니 자꾸 의문이 드는 것이다. 어머니는 왜 이러는 걸까.
‘……내가 당신에게 각인만 하면, 당신도 날 돌아봐 주겠지?’
그냥 화를 내고 끝났으면 이런 의문은 들지 않았으리라. 각인을 한 사람은 영원히 상대에게 종속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쌍방 각인 따위 영화에나 등장하는 환상 같은 이야기다. 반대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각인하길 바랐다면 차라리 이해가 쉬웠겠지.
그래서 저렇게 집착하며 자신이 아버지에게 각인하길 갈구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라일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
눈이 부시다.
꿈을 부유하던 라일은 스르륵 눈을 떴다. 그렇게 오래 잠들었는데도 무척 피곤했다. 수면제를 삼켰으면서도 결코 깊게 잠들지 못했다는 것처럼. 깜빡이는 시야로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빛 한가운데 저를 바라보고 있는 해진의 얼굴이 보였다.
“…….”
언제 피곤했냐는 듯 그는 홀린 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다. 앞에 있는 녀석이 너무 환하게 빛나고 있어서.
빛나다 못해 금방 사라질 듯 옅은 모습이라서.
그가 일어나자 해진은 이내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다가 의아함을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제 팔목의 페로몬 샘 쪽에 코를 살짝 대더니 다시 앞으로 내밀길 반복했다. 퍽 이상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페로몬을 그에게 내보내고 있는 건지, 팔의 궤적을 따라 비를 닮은 체향이 라일에게 훅 끼쳐 온다. 분명 열성이라 가볍디가벼운 비중으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그런데 해진의 페로몬은 신기하게도 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의 우성 페로몬을 아무렇지도 않게 흩어 버렸다.
라일은 멍하니 그 행동을 계속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해진의 팔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녀석은 시선을 아래로 흘리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그의 페로몬은 아주 어설픈 자장가, 희미한 안정감 그리고 커다란 곤란함이 뒤섞인 이상한 모양이었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는지 내내 무표정하던 해진이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심장이 툭 떨어지며 잠이 훅 달아난다.
“진.”
“어…….”
반사적으로 그는 입을 열어 해진을 불렀다. 이제야 정신이 조금씩 깨어났다. 분명 녀석의 침실을 강탈하듯 잠이 들었고…….
해진이 왜 여기 있지?
그걸 떠올리는 순간 라일은 벌떡 일어났다. 침대가 커다랗게 출렁일 정도로 황급한 움직임이었다. 덩달아 놀란 해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장은 다시 쿵 바닥을 내리찍었다. 고작 녀석이 얼굴을 조금 찌푸려서.
“진, 왜 여기 있어.”
그 많은 수면제도 소용이 없었던 걸까. 자신이 또 녀석을 찾아가 서러운 얼굴을 하게 만들었을까.
수많은 질문이 모여 그의 안에 격정을 만들어 냈다. 라일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떨리며 해진의 눈썹 하나까지 어찌 움직이는지 관찰할 때였다.
녀석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곤란한 듯 입을 열었다. 그 행동에 라일의 목구멍은 바싹 말라 조여든다.
“……자꾸 찾아오셔서요.”
“내가……?”
사실 해진은 라일이 깨어난 걸 모르고 앞에서 어설픈 짓을 하던 게 민망해서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제 작은 행동 하나에 라일이 어떤 격정으로 제 내면을 부수고 있는지 해진은 알 길이 없었다.
페로몬 조절은 보통 사춘기 때 발현한 후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일이었다. 물론 발현하며 깨달은 본능이 있기에 해진 또한 어설프게 할 수 있기는 했다. 실제로 감정의 기복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페로몬도 그런 본능의 작용이었으니까.
다만 이번처럼 명확한 의지를 담아 페로몬을 내보내는 건 퍽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페로몬 샘이 있는 손목까지 라일 쪽으로 뻗어낼 땐 자세가 조금 우스꽝스럽다는 자각이 있었다.
당연히 또 잠든 채 배회하는 줄 알았던 라일이 이런 바보 같은 자세를 똑똑히 보고 있었을 줄이야.
“내가 또 무슨 짓을 했지?”
“…….”
잠이 덜 깼는지 그의 목소리가 무척 낮게 잠겨 있었다. 머쓱해진 해진은 잠깐 그의 안색을 살핀 뒤 다시 시선을 피했다. 라일의 눈동자에는 다시 거센 지진이 일기 시작했다.
지갑을 찾겠다고 이 방에 찾아왔다가 해진은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당분간은 절대 근처에 오지 말아야지 다짐까지 하면서.
그런데 놀랍게도 그 뒤로 이번엔 라일이 복도를 배회했다.
사용인들이 한바탕 뒤집힌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해진은 식사하러 이동하던 중 복도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라일을 보고,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가 러트의 본능을 못 이겨 해진을 찾아온 거나 마찬가지인데 좀처럼 두려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해진이 얼굴을 굳히는 순간 저택의 복도가 다시 ‘그’ 페로몬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냥 무시하려고 했으나 라일은 기껏 해진의 근처로 와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맴돌기만 했다. 담요를 들고 그런 라일을 따라다니는 마크의 연로한 신체가 너무 안타까워서 해진은 하는 수 없이 그 상황에 끼어들어야 했다.
궁여지책으로 다시 그를 침실로 밀어 넣었을 때처럼 페로몬을 뿌리며 앞에서 걸었다. 정말 미끼가 된 것만 같아서 때때로 두려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 라일이 또다시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애정 서린 페로몬을 쏟아부었다.
그게 민망해서라도 해진은 라일을 이 침실에 묶어 놔야 했다. 가끔 이곳에 와서 자신의 페로몬을 채워 놓고 가면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점점 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우스울 정도로 맹목적인 라일의 페로몬이 그의 경계를 자꾸만 흐트러트린다. 그러나 여전히 이 모든 상황이 해진에게 버겁고 불편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대체 꿈에서 누구를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저 페로몬이 실제 자신을 향하는 건 당연히 아니리라. 그래서 해진은 괜히 알고 싶지 않은 라일의 사생활까지 엿보는 기분이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페로몬을 벗어나려면 두려워하지 않는 수밖에 없다니 아이러니했다.
끝내 당신이 절절할 만큼 애정으로 이루어진 페로몬을 퍼붓는 바람에 자신이 이런 일까지 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난다.
“미안.”
대답이 궁색해진 해진이 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툭 무거운 말이 떨어졌다. 순간 라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의 지갑은 두 번째로 이 방에 왔을 때 이미 찾아내었다. 그가 말했던 협탁과 벽 사이 아주 어중간한 곳에 지갑은 떨어진 채 끼어 있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덤덤하게 말한 해진은 천천히 침실을 벗어났다. 그의 사과에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듯한 그 표정이 라일의 망막에 새겨지듯 남았다.
저도 모르게 무저갱 같은 속에서 툭 튀어 나간 사과는 받는 이가 없어서 덧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
그 뒷모습을 보면서 라일은 심장 부근이 욱신거리는 감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
침실에 남은 해진의 페로몬은 라일의 자책감만 자극했다.
어설프지만 페로몬에 새겨진 안정감은 막 깨어난 라일을 유혹하듯 그곳을 맴돌았다. 자신이 녀석의 페로몬을 가까이하고 싶어질수록 라일은 자괴감에 시달렸다. 결국 도망치듯 자신의 흔적만 남아 있는 그의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차가운 물을 틀어 둔 샤워기 아래에서 라일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러트를 편법으로 보낸 덕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가까스로 이 상황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력이 생겼다.
각인했다.
자각하고 나서야 라일은 각인의 순간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왜 진작 알지 못했는지, 꼭 누군가가 그의 뇌를 이리저리 휘젓는 것 같은 무서운 감각이었다.
‘그 방’에서 러트를 보낸 날 해진은 부모님의 부고를 듣고 원망 서린 얼굴로 라일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무거운 빗줄기 같은 원망으로 라일을 파고든 것이.
그 원망을 타고 무엇이 흘러들어왔는지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