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56화 (56/101)

#56

이제야 해진을 다시 이 저택에 데려온 뒤부터 녀석의 페로몬이 그리도 진하게 느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열성인 해진의 페로몬은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라일에게 자취를 남긴 적이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심지어 빗속에서도 녀석의 페로몬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는데도 말이다.

꼭 거대한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마저 들었다. 자신을 이루고 있던 얄팍한 현실이 사실은 불투명한 얼음이라서 파사삭 깨진 것처럼.

그는 해진을 다시 이곳에 데려오면서 자신이 페로몬 해소를 제때 하지 못해 판단이 흐려졌다고 변명한 적도 있었다. 정작 녀석을 다시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렇게 러트를 보내 모처럼 머리가 활짝 개었을 시기였는데도 말이다. 이 모든 순간을 여태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페로몬은 반 박자 빠르다는 말이, 이토록 실감이 나는 경우가 또 있을까.

“하아…….”

알 수 없는 예감에 라일은 잘게 몸을 떨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온몸을 흠뻑 적시는 감각이 소름 끼칠 정도로 익숙하다.

다만 라일은 한 가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왜 각인에 집착했는지 그 이유를 말이다.

이건 상대에게 페로몬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잔인한 증거였으니까.

“숨겨야 해.”

그래서 라일은 제 각인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안 그래도 억지로 해진을 잡아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여기서 그의 각인 사실까지 알려지면 그건 녀석을 향한 또 다른 족쇄가 될 것이다.

그나 다른 누군가의 압력으로 해진을 억지로 주저앉히는 짓을, 또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녀석에게는 이미 그런 고통이 차고 넘치니까.

그러니 숨겨야 한다.

덕분에 라일은 좌절했다. 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이제는 명확한 자각을 가진 채 해진을 잡고 싶다고 갈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자신이 감히 바라지 말아야 할 걸 바라고 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거센 물줄기가 꼭 비라도 되는 양 라일은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

임시로 사용하는 침실로 돌아온 해진은 제게 희미하게 들러붙은 라일의 페로몬이 느껴져 곤란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막상 깨어난 라일을 보니 역시 기분이 이상하다. 기를 쓰고 페로몬 해소의 출구인 해진을 찾아오는 걸 보면 분명 그의 몸이 원하는 바는 뚜렷했다.

그런데 막상 러트의 본능을 꺾어 가면서까지 해진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쓸데없는 것을 알아 버린 해진은 곤혹스럽게 제 팔을 툭툭 털어냈다. 그곳에 끈질기게 붙어 있는 라일의 체향을 흩어내려는 듯이.

그러나 페로몬은 그의 손으로 자리를 옮겼을 따름이다. 끝내 생각을 거듭하게 되는 해진의 머릿속처럼 말이다.

“휴…….”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라일이 저를 잡으러 그 어두운 모텔 방까지 왔을 때 무언가 확실하게 어긋났다는 걸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계약이 끝나면 꼭 가야 할 곳이 있는데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애써 이 모든 감정을 해진은 제 안에 꼭꼭 묻어 두었다. 다시는 열어 보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그 속에는 그간 해진이 차곡차곡 모아 둔 것들이 잔뜩 눌려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그 위급한 상태마저 그는 외면했다.

전부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딱 걸어 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몸을 회복하며 무관심하게 머무르다 가는 것. 해진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리라.

***

정신을 추스른 라일은 일단 출근부터 해서 쌓여 있는 일을 처리했다. 단지 며칠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책상 위에는 다양한 서류들이 한가득이었다.

병원을 찾아간 건 그다음이었다. 깨어나자마자 일부터 처리하고 늦게 저를 찾아온 라일을, 주치의는 어딘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썩 좋지는 않군.”

제대로 된 페로몬 해소가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라일은 이제 두통이 없던 시기가 언제였는지 잘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상태를 가장 잘 알 주치의가 깊은 눈으로 라일을 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묻는다.

“각인하셨습니까.”

“그래.”

어차피 예상했었기에 라일은 덤덤하게 긍정했다. 만약 그저 해진에게 집착하는 모습만 보였다면 부정하고 넘어갈 수 있었으리라. 제 오메가에게 집착하는 알파의 본능은 흔한 것이었으니까. 오메가 혐오증이 있는 라일이니 그것도 부자연스러워 보였겠으나 각인 사실이 알려지는 것보단 나으리라.

그러나 그가 수면제에 전 상태로도 이상 반응을 보였다는 게 끝내 문제가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의사가 그의 저택에 왔을 때 해진을 보이거나 녀석을 감싸듯 페로몬을 움직이는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너무 많은 단서를 흘리고 말았다.

다만 주치의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안다는 듯 애써 각인 상대를 묻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인 건 알고 계시겠죠.”

“그래.”

각인하게 되면 각인한 상대의 페로몬이 없으면 죽고 만다. 꼭 페로몬 해소가 아니라도 주기적으로 각인 상대와 접촉하지 못한다면 몸이 망가지는 것이다.

라일은 이제 해진이 떠난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페로몬이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야.”

그걸 알면서도 라일은 덤덤하게 분석한 상황을 읊었다. 해진이 끝내 그의 곁을 떠나고자 한다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녀석이 그립다.

이게 제게는 딱 맞는 벌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걸 보니 뇌가 아주 망가진 모양이다.

그런데 라일의 이런 모습을 보던 주치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무슨 소리지?”

설마 모르고 있던 사실이 있나 싶어서 라일은 미간을 찌푸렸다.

“각인은 단순한 페로몬의 작용이 아닙니다. 감정과 결합한 오묘한 문제지요.”

“…….”

뜻밖의 말에 라일의 찌푸려진 표정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의 어머니도 그렇게 집착하던 아버지에게 끝내 각인하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 있던 것이야말로 진하고 깊은 감정이었으리라. 그런 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감정이라니. 라일이 기억하는 각인의 순간 그는 해진과 이렇다 할 감정의 교류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녀석의 마른 몸이 조금 신경 쓰이는 정도였을 뿐.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각인이라는 게 절대 흔하지 않습니다만, 그 현상이 감정과 페로몬의 결합 작용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

의사의 반박에 라일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왜 이때 다시 페로몬은 반 박자 빠르다는 격언이 생각날까.

그의 심각한 얼굴에 무언가 사정을 짐작했는지 주치의는 일단 검사 결과를 넘기며 말을 돌렸다.

“어쨌든 이번에 러트까지 겹치는 바람에 페로몬 체증이 아주 위험 수준입니다.”

“참고하지.”

“……이제 페로몬 해소는 각인 상대 이외의 분과 하실 수 없습니다. 거부 반응이 일어날 겁니다. 또한 각인 상대의 페로몬을 주기적으로 접촉하셔야 합니다. 아주 소량이라도요.”

걱정스럽게 덧붙이는 말에 라일은 덤덤하게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의사는 한숨을 쉬며 자신 또한 각인에 대한 정확한 연구 자료를 모아보겠노라 말했다.

“그래.”

그 모든 경고에도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이 마음이, 라일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라일은 곰곰이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각인이 감정의 산물이라는 그 말을.

분명 그럴 리가 없었다. 각인이라는 건 운명처럼 이어져야 할 사람들 사이에서나 일어나는 일이 아니던가. 사실 그는 각인이라는 지식은 알고 있었으나 그게 실제 존재할 거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주변에 각인했다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냥 로맨스 영화에서나 주로 사용하는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었나.

어쨌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해진에게 이렇다 할 마음을 품은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지금까지 했던 행동은 전부 각인이 저를 휘두른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멀리서 해진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

어딘가를 가는 중이었는지 해진이 목발을 짚은 채 걷다가 그를 발견하고 짧은 탄성을 내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라일은 머리가 하얗게 비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지금까지 무언가를 열심히 고민했던 것 같은데 모두 잊어버리고 마주친 해진만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 조금은 살이 오른 하얀 얼굴 같은 것들을.

눈치라도 보듯 숨죽여 관찰하는데 해진이 의아하게 그런 라일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계속 고파서 참기 힘들다.

“베르무스 씨.”

“응.”

제 대답이 이렇게 멍청하게 들린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라일은 멍하니 해진의 입술만 바라보는 짓거리를 그만두지 못했다.

“러트는 끝나신 겁니까.”

“응.”

심장이 뛰는 소리가 요란하다. 앞에 있는 해진이 금방이라도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인상을 찌푸릴까 염려가 되었다.

“그렇군요.”

멍청한 대답을 반복하고 나서야 라일은 해진이 그 말을 한 의도를 깨달았다. 해진이 방금 나온 곳을 보니 아직 본관에 있는 녀석의 방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리라.

그제서야 다급해진 라일이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방으로 바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방은 괜찮습니다.”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녀석은 거절 의사를 내뱉었다. 아주 가볍고 별 고민이 담기지 않은 어투였다. 어차피 해진은 방이 어디에 있든, 크기가 작든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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