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57화 (57/101)

#57

다만 그 작은 말씨는 라일에게는 폭풍처럼 무겁게 와닿았다.

혹시 그 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해진이 쓰던 방은 이 저택의 본관에 있는 유일한 손님방이었다. 애초에 본관이라는 건 직계 가족들의 내밀한 장소였다. 그곳에 손님을 묵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대우였던 것이다.

“본관에는 손님방이 그것뿐인데, 혹시 마음에 안 들었다면 다른 방으로 주겠어.”

그 말을 들은 해진은 순수한 의문을 가졌다. 본관에서 유일한 방이라니, 말만 들어도 중요도가 느껴지는 단어가 아닌가.

“왜 그런 방을 제게 주셨죠.”

그런 방을 왜 굳이 제게 배정해 줬단 말인가. 외관에 방이 없는 것도 아닌데. 실제로 해진이 임시로 사용하는 방도 손님 대접을 위해서라면 썩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 기대감 없는 의문에 라일은 그만 말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이 여전히 멍청한 것 같아서.

각인을 깨닫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던 거다. 다시 해진을 무작정 데려오면서 대뜸 그 방을 준 그 충동이 의미하는 건 역시 이거였다.

이 저택에서 해진보다 중요한 게 없다는 걸 이미 자신은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녀석이 이곳에 머무른 5년간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저택 예산 중 손님에게 할당되는 금액이 매년 눈에 띄게 상승해 왔던 것이다. 최근 사용인들의 비리를 조사하면서 그 숫자를 보고 약간의 의문을 가진 바 있었다. 자신이 배정한 금액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어서.

그런데 이 모든 걸 주는 라일은 몰랐다. 받는 해진은 더더욱 모른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 된 그는 잠깐 제 입가를 매만졌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으니 해진의 눈길은 여전히 그런 라일에게 향해 있다.

이 시선을 계속 받고 싶다는 거센 충동 속에서 라일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네가 이 저택의 가장 중요한 손님이니까.”

“그런가요.”

그 말을 들은 해진은 별 반응이 없었다. 아까부터 기민하게 해진의 눈치를 살피던 라일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녀석은 자신이 하나뿐인 손님이라 그렇게 되었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이렇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녀석을 향한 관심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별 뜻이 없다고 치부하도록 말이다.

“어쨌든 이미 옮겼는데 다시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전 어디든 상관없습니다만.”

그 작은 골방 같은 곳에 해진을 둘 수 없었다. 이전에 쓰던 해도 잘 들지 않았던 구석진 방이 떠올라서 라일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그가 제공하는 편의 자체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만약에 해진이 제가 또 홀대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 악몽 같은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네가 그곳에 원래대로 머무르는 게 사용인들 동선에도 제일 편할 거야.”

“그렇군요.”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내건 변명은 여전히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자괴감으로 얼룩진 입매를 가리기 위해 라일은 고개를 숙이며 제 입가를 가렸다.

볼일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듯이, 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위태롭게 걸으며 그를 스쳐 지나간다. 자신이 함부로 녀석을 부축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아팠다.

“아.”

“무슨 일이지.”

희망과 비슷한 무언가가 라일의 가슴에서 반짝 빛났다.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한 라일에게 해진은 슬쩍 뒤돌며 말했다.

“그럼 그 방에 남아 있을 페로몬은 전부 지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작게 반짝이던 불씨는 덧없이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녀석의 우려대로 그 방엔 라일의 체향이 덕지덕지 남아 있으리라. 그게 불편하리라는 걸 당연히 잘 알았다.

그런데도 이 순간 그는 해진에게 존재를 통째로 거부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이 각인의 효과를 절절하게 깨달았다.

이제 해진이 하겠다는 그 무엇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걸.

“조치하지.”

끝내 비틀려 버린 입매에서는 자조의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

라일의 인생에서 몇 없던 중요한 과제가 생겼다.

“…….”

그의 본능은 끝도 없이 해진을 갈구하고 있었다. 감히 그의 옆에 남아 주기를 바랄 수 없는 상황인데도, 해진이 필요하다.

각인이 감정의 결과라는 주치의의 말을 라일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차피 이미 해 버린 각인은 돌이킬 수 없으리라. 그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 안정감이 느껴져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해진이었다. 성급하게 다시 녀석을 가둘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적어도 해진이 라일에게 몹시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애초에 녀석이 여태 그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이 라일을 몸서리치게 한다.

“진은 일어났나?”

“네. 곧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모실 예정입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래.”

러트가 오기 전, 고민의 해일 속에 몸부림치느라 며칠이나 녀석을 홀로 식사하게 했다. 당시 해진의 식사량은 다시 미묘하게 줄어들었다. 녀석은 그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라일은 도무지 녀석을 홀로 둘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찾아갈 핑계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꺼운 스스로가 역겹다.

식당으로 향하던 중 안뜰을 지나던 라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날이 차가워져서 이제는 안뜰에서 식사하는 게 퍽 어렵게 되었다. 아무리 난로를 많이 비치해도 몸이 약한 해진에게는 위험한 날씨다.

그러다 문득 그의 저택에는 온실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크.”

“네, 도련님.”

“어머니가 가꾸던 온실, 아직 남아 있습니까.”

분명 그 온실은 그가 외곽에 있는 정원을 황폐하게 만들 당시 같이 버려져 관리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두통의 시발점이었던 외곽 정원을 화풀이라도 하듯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기틀은 남아 있습니다, 도련님.”

“거기 다시 꾸며 두도록 하세요. ……식사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게.”

마크는 여느 때처럼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점점 빨라지는 걸음 끝에 라일은 해진의 방에 들어섰다. 살짝 놀란 얼굴이 눈에 박혀 들었다. 습관적으로 눈치를 살피게 된 라일은 참담하게 고민에 빠졌다.

찾아온 것이 실수였던가.

“……혹시 내가 와서 불편한 거라면 나가도록 하겠어. 걱정하지 마.”

미리 연락이라도 해야 했다. 이제서야 자신의 실책을 통감한 라일이 주춤 물러서며 물었다. 그런 그를 어딘가 빤히 바라보던 해진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저 시선이 한 번씩 저를 비켜 물러날 때마다 심장이 갈래갈래 찢어지기라도 하는 느낌이었다.

“아니요. 이제 안 오실 거로 생각해서 조금 뜻밖이었을 뿐입니다.”

잠깐 놀란 듯 굴던 해진은 이내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라일은 문득 저 얼굴에서 그리 많은 표정을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겨우 끌어낸 건 바람같이 흩어지던 미소가 전부였으니까.

“……이제 매일 올 거야.”

어쩌면 이 말을 해진이 더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혹 그러지 말라고 선언한다면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녀석은 어색하게 눈가를 일그러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일은 해진이 방금 삼킨 것이 ‘왜’라는 질문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겨우 그걸 모른 척하면서 둘은 나란히 식당으로 향했다. 해진의 걸음걸이에 맞춰서.

식당으로 향하는 길, 라일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교대하러 가는지 저택의 뒤편을 지키던 경호팀 인력이 복도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중엔 알파가 몇몇 섞여 있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알파가 경호나 보안업에 종사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물론 그의 저택에 상주하면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전부 베타였지만 말이다.

문득 라일은 경호 인력 중 알파가 이렇게 저택 안까지 드나드는 일이 많은지 궁금해졌다.

***

“…….”

해진의 머리칼을 닮은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라일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아까 문득 떠올린 궁금증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임시로 저택 내부의 경비를 서던 알파를 신경 쓴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인데 새삼 그를 자극했다.

“잠깐 들어와.”

결국 참다못한 그는 비서를 호출했다.

서둘러 들어온 비서는 긴장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최근 계열사 흡수합병 건으로 정신없이 바쁜 상황이었다. 계열사 중 실적이 부진한 곳을 끝내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이 결단에는 라일의 숙부인 다니엘 베르무스의 탓이 컸다. 단순히 사업이 부진한 것을 떠나 엮여 있는 다른 계열사의 재무 건전성까지 위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니엘 숙부는 강제로 사업이 정리당하는 것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다른 사업에 들어갈 예산까지 끌어다가 도와주면 되지 않느냐는 뻔뻔한 논리에는 과연 라일도 참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덩달아 바빠진 비서는 최근 새로 채용 공고를 내보낸 참이었다. 인력 충원이 시급했다.

“저택 경호팀에 알파가 몇이나 있지?”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 오메가 형질은 한 명도 없습니다만.”

라일의 성질을 익히 알기에 그의 저택에는 사용인까지 오메가는 한 명도 없었다. 이번에 전부 교체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알아. 알파가 몇이야.”

그러나 뜬금없이 신경 쓰지도 않던 알파 형질을 찾는 라일을 보며 비서는 일단 대답을 서둘렀다. 그 의중을 고민하면서.

“알파는 경호팀에 열 명, 사용인 중엔 하나도 없습니다.”

“…….”

알파가 열 명이나 있었던가.

대답을 듣는 순간 라일은 조금 거슬리는 정도였던 사안이 이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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