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58화 (58/101)

#58

그러다가 문득, 혹시 해진이 다른 알파를 본다면 불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핍박하던 전 집사도 알파가 아니었던가.

분명 그러리라. 이걸 뒤늦게나마 알아차렸으니 이제는 바꿔야 할 때였다.

“일단 알파는 저택에 들어가지 못 하게 해. 그리고 이른 시일 내에 전부 좋은 조건으로 사직을 권고하고.”

“……알파 형질을 가진 사람은 전부 외곽 경비로만 빠질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다만, 전체 해고는 힘들 수 있습니다.”

역시나 의외의 사안에 비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정을 해 보았다. 당연하지만 베르무스의 계약조건은 무척 후하다. 웬만해서는 먼저 그만두는 이들이 거의 없을 정도니까 말이다.

이렇게 좋은 조건의 직장에서 갑자기 해고당한다면, 당연하게도 반발이 있으리라. 정당한 사유가 없다면 말이다.

“왜지?”

“일단 경호 팀장이 알파입니다. 또한 적당한 이유가 없다면 반발이 일어날 겁니다.”

“…….”

분명 일리 있는 소리였다. 그러나 알파가 저택에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부터 라일은 이해할 수 없는 조급함에 시달렸다.

“왜 그러십니까?”

“진이 알파를 불편해할 거야.”

“아.”

의아하게 묻는 비서에게도 그가 걱정하는 부분을 짚어 주었다. 눈치가 빠른 비서는 대번에 알 만하다는 표정이 되어 같이 고민에 빠졌다.

“잘 설득해 봐. 반발이 일 것 같다면 더 좋은 조건으로 본사로 이직을 권유해. 그 정도면 불만이 사그라들겠지.”

차근히 마찰이 없게 그들을 저택에서 빼낼 생각을 하던 라일은 문득 걱정이 치미는 바람에 말을 덧붙였다.

“혹시라도 진을 핑계로는 쓰지 마. 엄한 화살이 돌아갈 수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만약 그들이 해진에게 원망이라도 돌린다면 골치 아파진다. 해코지라도 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해진을 위한 경호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 경호를 붙이면 답답해할 테니 저택 자체를 철옹성으로 만드는 게 나을 듯하다. 저택은 쓸데없이 너무 넓었으니 더 대비하는 편이 좋겠지.

“그리고 전반적으로 저택 경호 인력을 늘려. 베타로.”

“그것도 조치하겠습니다.”

이미 저택의 보안 체계는 저번에 한 번 갈아엎어서 충분했다. 그걸 알지만, 비서는 묘한 예감에 눈을 굴리며 순순히 대답했다.

“혹시 진에게 부적절한 언사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단단히 교육해.”

“알겠습니다.”

그의 세세한 지시를 빠짐없이 적으며 비서는 라일이 걱정하는 게 뭔지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저번 같은 사태를 아예 처음부터 방지하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용건이 끝난 것 같은데도 라일은 비서에게 물러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의아하게 시선을 던지자 머뭇거리던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계약서에 명시한 보상을 진에게 미리 지급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있나?”

“명시된 계약 기간을 충족하지 않고, 지금 바로 말씀입니까?”

“그래.”

보통 지급해야 할 걸 안 주면 문제가 되지만 미리 지급하는 건 괜찮으리라. 비서도 이걸 잘 알지만 그는 다른 고민에 빠졌다.

왜인지 해진이 그것들을 선뜻 받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서 또한 해진이 보상 방안을 적은 계약서는 쳐다도 보지 않았던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리 지급하는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브라이트 씨가 거부하시면 어떻게 할까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라일 또한 예상했다는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회장을 천천히 관찰하면서 비서는 아까 톡 튀어 오른 예감을 잘 기억해 두려고 애썼다.

왜인지 해진과 엮이는 일이 더 많아질 것만 같다는 예감이었다. 역시 인력 충원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

종일 그를 괴롭히던 경호팀 일을 처리하고 나서야 라일은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흡수합병 건으로 직접 찾아온 다니엘 숙부가 귀찮게 구는 바람에 시간은 더 걸렸다. 물론 그를 만난 건 아니었다. 밖에서 소란을 피우는 그를 보지도 않고 쫓아내느라 신경이 거슬렸다.

밤늦게야 저택에 돌아온 라일은 그를 맞이하는 마크에게 습관처럼 물었다.

“진은?”

“주무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이번엔 제 방이 아니라 외관에 있는 뜰로 움직였다. 무척 늦은 시간이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저택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니 야간작업을 위해 환하게 불을 밝힌 장소가 보였다. 그가 오전에 말해 둔 온실이 있는 자리였다.

공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시작되었다. 이쪽 정원을 벼르고 있었는지 마크가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황폐하게 방치되던 곳에는 온갖 공사 장비가 즐비했다. 퍽 어수선한 모습에도 라일은 꼼꼼하게 진행 상황을 눈에 담았다.

“온실 안쪽에서도 밖에 있는 것 같은 분위기로 조성합시다. 필요하다면 규모를 늘리세요.”

“근처의 정원도 세심하게 손보겠습니다.”

“얼마나 걸립니까?”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이상은 걸립니다.”

온실 하나를 새로 꾸미는 데 결코 오래 걸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조급한 마음이 들어서 라일은 불만스럽게 인상을 찡그렸다.

“자원을 아끼지 말고 신경 써 주세요.”

“네, 도련님.”

감시라도 하듯 한참이나 공사 현장을 노려보고 나서야 라일은 제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저택 내부로 들어서자 해진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잠든 지 조금 되었다고 했으니 이건 그의 착각이거나, 정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녀석의 자취를 본능이 잡아내는 것이리라. 그는 예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체향에 집중하며 계단을 오르다 보니 문득 벽을 짚고 내려가던 녀석이 생각난다. 중후한 색의 저택 벽에는 해진의 하얀 손이 잔상처럼 벽에 남아 있었다.

갑자기 걱정이 치민다. 곁에 아무도 없을 때 해진이 다리를 헛디딜까 봐. 그 다리가 이 저택에 머무르면서 더 악화하기만 할까 봐.

“…….”

“왜 그러십니까?”

“……저택 내부도 조금 손봐야겠습니다.”

생각할수록 이 오래된 저택은 너무 위험했다. 일전에 CCTV의 개수를 늘릴 때 진작 같이 손봤어야 했는데,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결정이 아니었나.

“어디를 손보려고 하십니까.”

그의 옷시중을 들겠다고 방 안으로 따라온 마크가 의아하게 물었다. 곰곰이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라일은 그에게 외투를 건넸다.

“진이 다니기 수월하도록 안전하게 보수하려고 합니다. 조만간 비서가 저택 보수를 논의하기 위해 방문할 겁니다. 그때 같이 의논하시죠.”

“네.”

그의 각인 사실은 주치의를 제외하면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라일은 앞으로도 해진을 비롯해 모든 이들이 이 사실을 모르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애초에 라일은 아직 해진에게 감정까지 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이 모든 건 그저, 향후 자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하기에 의무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다.

“진은 최근 저택에서 뭘 합니까?”

“음……. 대부분 방에서 머무르십니다. 아무래도 밖이 산책하기 좋은 날씨도 아니어서요.”

“……서재에는 잘 갑니까?”

“그쪽으로는 걸음 하지 않으신 지 좀 되었습니다.”

“…….”

무척 무료할 텐데 서재에도 가지 않는다니.

방 안에만 있을 해진을 떠올리니 갑자기 초조함이 불쑥 존재감을 드러냈다.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면서 마크에게서 등을 돌린다.

“알겠습니다. 이만 쉬세요.”

“편히 주무시지요.”

달칵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라일은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같은 신문을 여러 번 뒤적일 정도로 할 게 없을 터다. 그런데도 서재에조차 걸음 하지 않는다니 덜컥 미간이 찌푸려졌다.

문득 서재 앞에서 어쩐지 못마땅하게 저를 쳐다보던 해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역시 그 서재가 너무 볼품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저택에는 서재가 다섯 개 정도 있었다. 해진에게 안내한 곳은 그중 가장 가까운 서재였지만 가장 좋은 곳은 아니었다. 직계가 사용하는 서재가 아무래도 가장 기품있게 꾸며져 있긴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곳에 가려면 해진의 불편한 다리로는 계단을 너무 많이 지나야 한다.

“…….”

저도 모르게 침대 앞을 서성거리던 라일은 이번엔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던 저택 개보수 방안이 점점 방대해지기 시작한다.

서둘러 비서에게 연락한 라일은 비서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주문을 해 두었다. 저택 내부에 안전시설을 비롯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겠다고 말이다.

퇴근했으나 비서는 성실하게 답장을 보내었다. 그 속에서 약간의 당황을 읽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조만간 비서의 봉급은 올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약속한 바와 같이 라일은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해진을 찾았다. 녀석은 어떤 기대도 담지 않은 무덤덤한 얼굴이었으나, 거부당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라일은 무심코 안도했다.

어제 해진과 아침 식사를 한 뒤로 라일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매시간 녀석의 입에 들어가는 건 빠짐없이 보고 받았으나 정작 그는 속이 역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일이 바쁘면 이 정도 강행군은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제 몸 상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막상 아침에 해진과 마주하니 조금 식욕이 돌았다. 퍽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면서 라일은 제 앞에 놓인 스텔리네 수프를 바라보았다. 듣자 하니 해진도 오랜만에 별 수프를 요청했다고 한다.

원래도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는 시간은 아니었기에 둘만 있는 식당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해진이 잘 먹는 음식 등을 헤아리던 라일은, 테이블에 장식으로 놓인 화초에 시선을 주었다.

“혹시, 좋아하는 식물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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