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금방 지금 짓고 있는 온실로 생각이 튄 건 당연했다. 이왕 꾸미는 것, 해진이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 넣어도 나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질문에 손을 우뚝 멈춘 해진이 라일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갑자기 라일은 수프를 잘 넘기던 목구멍이 바짝 조여드는 걸 느꼈다.
“…….”
아무 말도 없는 해진의 태도에 라일은 하는 수 없이 준비했던 다른 말들을 쏟아냈다. 묘한 긴장이 그를 잠식한다.
“……조만간 경호 인력들이 보충될 거야. 혹시 네게 무례하게 구는 놈이 있다면 반드시 말해 주도록 해.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지만…….”
어떤 말을 해도 내내 무표정하던 해진의 눈썹이 갑자기 미미하게 꿈틀했다. 거대한 불길함을 느낀 라일이 다급하게 물었다.
“설마, 이미 그런 일을 겪은 건가?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 주면…….”
아예 들고 있던 스푼을 놓아 버린 라일은 손을 식탁 아래로 내려 두었다. 무릎을 파고드는 손아귀에는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의 성급한 질문을, 해진이 칼로 잘라내듯 끼어들었다.
“베르무스 씨.”
“……응.”
대놓고 말을 끊었는데도 라일은 순순히 대답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 태도를 빤히 바라보던 해진은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제 한숨이 얼마나 크게 라일의 몸을 뒤흔들었는지 미처 보지 못했다.
“그게 왜 궁금하십니까.”
또다시 나온 질문이었다. 왜.
지금껏 라일은 저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왜 이리 해진이 신경 쓰이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다만 이제는 이유를 알기에 저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러니 공허한 핑계만 입 밖으로 흘러나갈 뿐이었다. 기실 해진의 저 의문은 지금까지 라일이 가지고 있던 무관심에 대한 질타나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라일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테이블로 내리며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냥, 궁금해서.
그 한 마디를 끝내 덧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해진 또한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라일은 퍽 어두운 얼굴로 서재에 앉게 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진을 찾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종을 울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같이 아침을 먹겠다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어제 제가 심기를 거스르는 바람에 해진이 또 밥을 굶기 시작할까 봐 라일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녀석의 목숨이 이제 곧 저의 목숨이니 이리도 신경 쓰이는 거다. 그런 것치곤 해진 몰래 근처에서 서성거린 시간이 길었지만 라일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 뒤에야 마크가 방에서 식사하겠다는 해진의 의사를 전해 주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라일은 일단 서재로 들어왔다. 저택 개보수를 의논하기 위해 비서와 마크도 함께였다.
그들이 의견을 정리하는 동안 그는 참담하게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건 일종의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어제 한 질문의 연장선이리라.
해진은 분명 계약과 관련한 게 아니라면 그와 아무것도 주고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니 이런 이유 없는 관심 또한 허락되지 않는 것이리라. 라일은 그 선을 똑똑히 느꼈다.
참담한 심정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의자에 푹 기대었다. 살면서 이렇게 어려운 게 있었던가.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을 쫓아가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걸 정말 진행하실 겁니까?”
“그래. 전부.”
“하필 이쪽 구역을 정리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택 설계도를 보던 마크가 의아하게 한쪽 구역을 짚으며 물었다. 거기는 해진이 두려워하는 ‘그 방’이 있는 곳이다.
이따금 해진의 동선을 보고 받을 때 라일은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다리가 아플 텐데 녀석은 묘하게 돌아가는 길을 택하곤 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산책이 목적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해진의 동선에 맞춰 저택을 보수하려고 설계도를 편 순간 멍청한 자신의 머리를 쏴 버리고 싶었다.
녀석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제게 트라우마를 안겨 준 그 방을 피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 그 방이 존재했다는 걸 인식도 못 하게 전부 바꿔. 근처 복도부터 시작해서 해당 구획에 통일된 실내장식까지 전부. 그게 안 된다면 건물을 아예 없애 버려.”
“…….”
“…….”
이건 단순히 계단에 손잡이를 덧대는 수준의 공사가 아니었다. 그걸 깨달은 비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방’이라는 소리에 눈을 가늘게 뜬 마크는 무언가 사정이 있음을 짐작하고 일단 침묵했다.
그도 이게 막무가내 같은 지시라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과한 공사가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도 이따금 해진을 괴롭게 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흉포한 충동에 시달리곤 했다.
그 파괴의 범위에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퍽 우습다.
“회장님. 그렇게 대대적인 보수는 금방 안 끝납니다.”
잠자코 있던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해진과의 계약 기간을 꼬집은 것이다.
그걸 제일 잘 아는 건 라일이었다.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양, 달력을 몇 번이나 확인하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사실 시한부 선고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인 것도 맞았다.
“알아. 그래도 해.”
그걸 알지만, 뭐라도 시도해 보고 싶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해진만 잡을 수 있다면.
***
오후가 다 되어 갈 동안 결국 라일은 입으로 아무것도 넘기지 못했다. 허기가 지는 상황에도 해진이 이런 심정이었을지 떠올리면 쓴 물이 올라왔다. 아마 앞으로도 녀석이 함께해 주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영영 넘기지 못할 거라는 예감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우성 알파답게 뛰어난 체력을 지닌 라일은 내색하지 않은 채 업무에 몰두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일일이 컨디션을 티 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회장님. 번즈 시장이 10분 뒤 도착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면 바로 모셔. 그리고 비서도 동석하도록.”
이 헤비레인 시의 시장인 번즈가 급히 라일을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왔다.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가기에 라일은 다소 급한 요청에도 승낙 의사를 보냈다.
잠깐 다른 업무를 진행하는 사이, 시장은 금방 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오랜만입니다, 베르무스 회장.”
“오랜만입니다.”
간단하게 서류를 정리한 라일은 시장을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다소 들뜬 얼굴로 들어온 그는 비서가 가지고 들어온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급하게 용건을 풀어 둔다.
“베르무스의 본 저택이 공사에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출근하자마자 그의 유능한 비서는 저택 보수 계획을 정리한 뒤 공고를 올렸다. 전문가를 섭외하기 위한 절차였다.
공고를 올리고 얼마 뒤 시장이 헐레벌떡 전화했을 때, 라일은 그의 용건이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올리신 공고를 보니 아주 대대적인 공사로 보이더군요.”
“겨우 제 개인 공간에 관한 공사 따위가, 이렇게 시장님까지 오실 일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크흠, 그것이 아니지요. 어찌 베르무스 저택에 대한 상징성을 간과하신단 말씀이십니까.”
돌리는 일 없이 비아냥거리는 라일의 말투에 시장은 멋쩍게 앞에 놓인 차를 한 번 마셨다. 정치인답게 외양에 신경 쓴 그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슬쩍 손목에 있는 시계에 시선을 주었다.
“그냥 개보수도 아니고 건물 하나를 통째로 구조 변경을 하는 모양이던데, 아시다시피 베르무스의 고택은 이 도시의 문화유산이 아닙니까.”
실제로 베르무스의 저택은 지은 지 이백 년이 넘은 고택이긴 했다. 베르무스 가문이 이 도시에 터를 잡은 건 그보다도 오래되었다. 중간중간 개보수를 꾸준히 했기에 생활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으나 멀리서 보면 거대한 성처럼 보일 정도였다.
시에서는 간혹 문화유산 관리라는 명분으로 베르무스를 귀찮게 했다. 대부분은 정치 자금을 더 뜯어내려는 우아한 협잡질에 불과했으나 이따금 고택의 경관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경제 활동 부분만 극도로 발달한 대도시답게 적당한 관광지도 없는 처지였으니까.
문제는 설령 그의 저택이 문화유산 취급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시장이 직접 찾아와 어설픈 참견을 할 주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다니엘 숙부나 친족회와 자주 만난다더니, 성가신 짓을 꾸미고 있었던가.
“제 말은, 이걸 주제넘은 참견이 아니라 다 도시를 위한 마음으로 생각해 주십사 하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크흠, 물론입니다.”
제 말이 중간에 끊긴 게 불쾌한지 시장은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정치인답게 노련하게 불쾌함을 표하고 싶다는 듯. 물론 앞에 있는 어린 회장을 무시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으리라.
“알겠습니다.”
“……아, 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잔뜩 긴장하고 왔는지 그가 의외로 선선히 대답하자 얼떨떨하게 대답을 주워섬긴다. 그 모든 반응을 무시하면서 라일은 다시 시계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실은 제가 곧 다른 회의가 있습니다만.”
“아아. 이것 참 바쁜 사람을 붙들고 실례했군요. 이쪽이 급히 끼어든 거니 얼른 자리를 피해 드려야죠.”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긴 것인지 시장은 언제 인상을 찡그렸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무덤덤하게 한 번 맞잡아 준 라일은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의 내쫓기듯 방 밖으로 서둘러 걸음 하면서도, 시장은 이 미묘한 상황을 깨닫지 못한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