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60화 (60/101)

#60

“저택 개보수는 취소할까요?”

곁에서 그 꼴을 지켜보던 비서만 묘한 찜찜함을 느끼며 물었다. 시장이 집무실에서 사라지자마자 손수건으로 제 손을 문지른 라일은, 그걸 휴지통에 미련 없이 던져 넣으며 대답했다.

“아니. 후원하는 정당을 바꾸도록 해.”

“……후원 정당을요.”

“그래.”

“…….”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나가 봐도 좋다는 뜻이었다.

다시 일거리를 얻은 비서는 한숨을 삼키며 집무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만 발걸음은 생각보다 사뭇 가볍다. 최근 일이 많긴 했는지 라일이 막대한 보너스와 임금 인상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비서의 등 뒤로는 낮게 읊조리는 라일의 음성만 남았다. 어딘가 서늘한 온도였다.

“시장이 바뀔 때가 되었지.”

가만히 두고 보던 친족들 또한 한 번 밟아 줄 때가 되었다고 라일은 덤덤히 생각을 이어 갔다.

***

“오셨습니까. 페로몬 해소는……, 못 하신 모양이군요.”

그를 맞이하던 주치의는 라일의 안색을 보자마자 황급하게 말을 선회했다. 각인까지 해 놓고 페로몬 해소는 못 하겠다는 이 답답한 환자 때문에, 그는 최근 논문을 찾느라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못 해. 다른 방안은 없나.”

“제가 페로몬 해소에는 정공법이 제일 안전하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만.”

“알아. 때로는 편법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

쓰게 웃는 라일의 얼굴을 보면서 주치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 노파심에 전화로 연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외국의 사례까지 전부 뒤져서 방안을 찾아내야 했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는 것 정도는 가능하시겠지요.”

“……아마도.”

바로 오늘 아침 얼굴을 마주하는 걸 거부당했기에 라일은 자신 없게 대답했다. 그런 그를 무거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주치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이상의 방법은 없습니다. 각인을 한 이상 다른 의약품은 소용이 없어요. 어쩌면 강제로 페로몬을 해소하는 약조차 이제 안 들지도 모릅니다.”

“…….”

각인은 전 세계적으로 무척 희귀한 사례였다. 베타에게서는 볼 수 없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만 일어나는 특이한 결합이기도 했다. 혹자는 이를 영혼의 결합이라 칭하기도 했다. 로맨스 영화나 책 따위에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이유였다.

영혼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주치의는 어쨌든 이것이 과학으로는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이라는 데에는 동의했다.

각인한다고 해서 일상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각인을 한 당사자도, 각인의 상대방도 평소처럼 모든 타인의 페로몬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라일처럼 일방적으로 각인한 경우이다. 각인을 한 쪽은 페로몬 해소를 위한 몸의 결합을 각인 상대방과만 할 수 있다. 게다가 꼭 페로몬 해소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주기적으로 상대의 페로몬이 없으면 몸의 세포가 서서히 죽어 나갔다.

한 마디로 각인을 해 버린 당사자에게만 무척이나 파괴적인 결합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은 공간에 앉아서 페로몬 샤워를 받으세요. 최소한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해야 합니다.”

들고 있던 논문을 내려놓으며 의사는 피곤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만약 각인이 조금이라도 더 흔한 현상이었다면 분명 법률이 제정되었으리라. 각인하게 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약 각인 상대방이 페로몬 제공을 거부한다면 금방 말라 죽고 말테니까 말이다.

어쩌다가 각인이 되는지 그 메커니즘은 아직 상당 부분 불명확했다.

“음……. 열성도 그게 가능한가?”

“가능하긴 할 겁니다. 안 되면 최소한 긍정적인 페로몬을 지속적으로 접촉하셔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입니다.”

페로몬 샤워에 긍정적인 페로몬이라니. 참 난관도 이런 난관이 없었다. 라일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과연 이 무도한 제안을 해진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가장 좋은 건 역시 페로몬 해소를 적극적으로 하는 거죠.”

말을 들어 주지 않지만, 주치의는 의사로서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거듭 강조했다. 역시나 라일은 듣지도 않고 필요한 부분을 물었다.

“혹시, 상대도 내가 각인한 걸 알 수 있나.”

“설마 아직 안 알리셨습니까.”

“대답이나 해.”

열성이라는 소리에 라일의 각인 상대가 누군지는 더욱 명확해졌다. 갈수록 가관인 상황에 의사는 암담한 마음으로 그에게 심각성을 일깨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상대에게 각인 사실도 알리지 않고, 대체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다만 어차피 숨기기는 어려우실 텐데요.”

“그건 무슨 소리야.”

“각인한 당사자는, 그러니까 베르무스 씨는 상대방에게 맹목적인 감정을 품게 됩니다. 강렬한 감각이기 때문에 상대 앞에서 페로몬을 완벽하게 갈무리하는 건 점점 어려워질 겁니다.”

“…….”

“게다가 갈무리하지 못하는 페로몬은 아주 근원적인 감정을 담은 채 나오게 됩니다. 일부러 꾸며내기도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상대방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

숨길 수 없다는 건 과연 이 뜻이었다. 라일은 어렴풋하게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에 빠져들었다. 아버지를 향한 심중을 오해 없이 드러내고 싶기라도 했을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을 버텨 내는 일이었다. 어차피 페로몬을 병적으로 갈무리하는 건 라일이 잘해 오던 것이 아니던가.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의 방문 목적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처리해야 했다.

“일단, 주치의도 앞으로 입단속에 힘써 주면 좋겠군.”

지금까지 얌전하게 그의 말을 경청하던 라일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페로몬 따위를 흘리지 않아도 거대한 압박감이 주치의를 향해 쏟아졌다.

마주친 그의 눈에서 어쩐지 광기마저 보인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의사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목숨이나 경력이 아까운 실정이었다. 각인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는 것도 비밀로 하며 움직이지 않았던가.

“알…겠습니다.”

주치의는 문득 평생을 우성 형질을 억누르며 살아오던 라일이, 최근 들어 퍽 우성답다는 생각을 무심코 떠올렸다.

***

라일은 요즘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두려웠다.

꿈에서 한없이 서러운 해진의 얼굴만 바라보다 눈을 뜨면 덜컥 겁부터 드는 것이다. 그래, 이건 겁이었다. 그 얼굴을 또 실제로 보게 될까 봐 무섭다는 걸 어느샌가 라일은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매번 애써 갈급함을 내리누르며 나갈 준비를 했다. 그래도 해진의 방 앞으로 향할 즈음에는 거의 뛰듯이 걷고 있는 걸 그는 몰랐다.

종을 집어 든 라일은 긴장감에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또 그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할까.

“네.”

다행스럽게도 안쪽에서는 대답이 들려왔다.

응접실에 앉아 있던 해진은 무표정하게 들어오는 라일을 돌아보았다. 그는 통이 넓어 편해 보이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위아래 색이 같은 걸 보면 세트로 된 옷인 모양이었다.

깁스가 안 보일 정도로 통이 넓은 바지를 유심히 보던 그는 조심스럽게 해진의 안색을 살폈다. 긴히 논의할 게 있다는 연락을 미리 해서 문을 열어 준 것인지, 여느 때처럼 아침을 같이 먹어도 되는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일단 꼭 해야 할 말을 먼저 하기로 라일은 계획을 세웠다.

“잠깐 앉아도 되겠나.”

“네.”

조심스럽게 해진의 건너편에 자리 잡고 앉으니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고작 한 걸음뿐인데 그게 기꺼워서 몸이 날뛰려고 했다.

차분하게 평정을 가장하면서 라일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지금 해야 하는 제안을 해진이 얼마나 거북해할지 가늠하면서.

“우선, 이전 계약에 규정되어 있던 보상을 지금 즉시 지급하려고 해.”

“…….”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왜’라는 질문이 여전히 녹아 있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라일은 일부러 그런 해진을 똑바로 마주했다. 어제 내내 검토한 제안은 녀석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만든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지금부터 할 부탁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도 좋아.”

해진의 의문은 당연했다. 라일은 그간 계속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다시 이 저택에 데려왔을 때도, 홀로 각인을 할 때도. 그러니 이제 와 라일에게 무엇보다도 해진이 필요해졌다는 사실이 납득가지 않으리라.

그래서 라일은 구실을 만들려고 한다. 그의 제안에 해진이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곁에서 만회할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녀석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그저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리고 별거 아닌 보상이라도 꼭 저 품에 안겨 주고 싶었다. 이해할 순 없지만 각인했다는 핑계는 많은 생각을 미뤄 놓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내 러트 기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어.”

눈을 뜨니 제 옆에 있는 해진을 보고 무척 놀랐더랬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초지종을 알아냈다. 혹여 또 해진을 찾아가 거칠게 다룬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다행스럽게도 조금 멍청한 꼴은 보이긴 했어도 돌이킬 수 없는 짓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특히 해진은 먼저 나서서 그의 방에 페로몬을 베풀러 와 주었다고.

“……그게 이 보상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때와 비슷한 일을 해 주면 좋겠어. 페로몬 해소의 대안으로 찾아낸 방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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