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61화 (61/101)

#61

페로몬 해소라는 소리에 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의 진의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듯이. 라일은 꿋꿋하게 그 눈길을 받아넘겼다.

이내 미약한 한숨 소리와 함께 해진이 물었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페로몬 샤워를 부탁하고 싶어. 매일 한 시간 정도. 그거면 다른 해소가 필요 없을 듯해서.”

말을 꺼내면서도 라일은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어서 슬쩍 고개를 비틀었다. 페로몬 샤워는 말 그대로 페로몬으로 상대방을 감싸는 행위였다. 보통은 친애의 증거로 사용되는 방법으로 페로몬에 담는 감정에 따라 마킹을 위한 수단으로도 쓰였다.

이래저래 감히 해진에게 요구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라는 뜻이었기에 라일은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 꼭 선고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자신이 멋대로 해 버린 각인이 해진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이 이리도 다행스러울 수 없다.

“그 페로몬의 상성 때문인가요?”

“그래.”

그와 해진의 페로몬이 상성이 좋다는 걸 이전 진료 때 이미 들켜 버렸다. 그 또한 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것 핑계로 삼을 요량이었다.

긍정했으나 녀석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혹여 있을 사고를 걱정하는 게 아닐까 덜컥 겁이 치솟는다. 고민 끝에 그는 조심스럽게 이에 대한 대책도 내놓았다.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날 묶어 놔도 괜찮아.”

“…….”

슬쩍 내리깔린 라일의 속눈썹이 아침 해를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 찬란한 외모를 무감각하게 바라보던 해진은 다시 곤혹스럽게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사용인들이 그를 상냥하게 대할수록, 라일이 그에게 관심을 기울일수록 해진은 불편했다. 어차피 다 놓고 가야 할 것들이다. 애초에 이 저택에서 그런 온정을 바란 적 없었다. 아니, 한때는 있었으나 그 기대는 무거운 비에 쓸려 내려간 지 오래였다.

그가 바라는 건 얼마 없었다. 당장 나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계약 기간이 끝나는 동시에 이 저택과도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라일이 자꾸만 해진이 그어 둔 선 근처를 배회했다. 러트에 정신이 나가 그의 방 근처를 배회하던 날처럼.

그의 이 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계약 이후에 세워 둔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질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전할 말이 있다기에 바짝 긴장하며 기다렸는데 의외로 뜻밖의 제안이 들려온다. 특히 라일이 제정신이라면 앞에 가서 페로몬 좀 흩뿌려 주는 게 무에 대수란 말인가. 해진은 페로몬 샤워가 갖는 사회적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라 더 그랬다.

하는 수 없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해진은 이 제안에 응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제게 한 잘못을 생각하면 더더욱.

다만 좀 더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시도는 해 보려고 마음먹었다. 특히나 라일이 제시하는 보상들이 지금 그에게 건너온다면 썩 일이 귀찮아지기도 했고.

“미리 주신다던 그 보상 말입니다.”

“응.”

설령 그 몇 배가 필요하다고 한들 라일은 고개를 끄덕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진은 생각지도 못한 걸 조건으로 걸었다.

“지급 시기를 원래대로 계약이 끝난 이후로 했으면 합니다. 지금 말고요.”

“…….”

차라리 보상을 빼자고 말했다면 좀 더 납득이 갔을지 모르겠다. 이 순간 라일은 무언가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해진은 이게 수락되지 않는다면 응하지 않겠다며 강경하게 나왔다. 어쨌든 해진의 말에는 계약 기간 동안 이곳에 머무르겠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안 좋은 말은 아니니 라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 묘한 위화감은 그 뒤에도 한참이나 라일을 괴롭혔다.

***

초조하게 응접실에서 서성이던 라일은 자신이 너무 볼품없이 방 안을 맴돌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도 문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마 거둘 수가 없었다.

곧 해진이 올 시간이었다.

그가 퇴근하고 매일 저녁 한 시간씩, 그들은 라일의 응접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직도 라일은 녀석이 그의 제안에 응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혹시 머리가 진작 돌아버려서 환상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게다가 해진이 조건이라고 내건 말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그 방에서 나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다시 해진에게는 이득 될 게 없는 협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멍청한 짓을 하고 말았다. 저를 향하는 작은 숨결이나 그 하얀 얼굴을 의식하느라 똑바로 처신하지 못한 것이다. 그저 그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이는 장면에 홀려 버려서. 해진이 온다면 다시 원하는 것을 단단히 물어야겠다.

그때 밖에서 종이 울렸다.

종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맑게 개는 느낌마저 났다. 퍽 미묘한 심정이 된 라일은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해진이 자신을 찾아오는 느낌이 무척이나 생경했다.

“아…….”

문이 시차도 없이 열리자 해진은 조금 놀란 낯이었다.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짚은 녀석을 불편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가 가는 편이 좋았을 텐데 해진은 왜인지 라일의 응접실에서 만나기를 택했다.

자연스럽게 안쪽을 두리번거리면서 해진은 천천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일은 그 모습을 퍽 초조한 심정으로 관찰했다.

해진이 강제로 히트 사이클 약물을 먹고 온 곳도 이 장소였다. 그래서 가급적 그가 찾아가는 방향으로 하고 싶었는데 녀석은 완고했다.

어쩌면 그의 페로몬이 제 공간에 남는 게 싫었을지도.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을 감추며 라일은 해진을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해진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결정한 순간 바로 좀 더 편한 재질로 바꿔 둔 소파였다.

“……정말 여기로 괜찮겠나?”

“네.”

몸을 감싸는 커다란 소파에 잠깐 놀란 해진은 불편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뭔가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어서 그랬다. 그가 굳이 라일의 방으로 찾아오겠다고 한 건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라일이 그에게 어처구니없는 페로몬을 내보인 이후 자꾸만 긴장감이 무뎌졌다. 무언가 호감이 생기거나 불편한 마음이 사라진 건 물론 아니다. 다만 본능적으로 긴장하곤 하던 제 몸이, 어느 순간부터 라일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건 옳지 않았다. 그가 겪은 일들을 상기하면 분명 서러운 마음이 울컥울컥 올라오곤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방어막이 저도 모르는 사이 스르륵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이곳에 찾아오겠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저를 지배하곤 하던 두려움을 상기하려고.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나 직접 ‘그 방’까지 찾아갈 용기는 아직 없다. 그래서 해진은 충동적으로 이곳에 오겠다고 말을 뱉고 말았다.

사실 히트 사이클이 있던 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라일의 방까지 힘겹게 간 후로는 기억이 드문드문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음 날 눈 뜨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과정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 오면 무언가 좀 거북하리라 여겼는데. 놀라울 정도로 처음 온 듯한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이상하다.

살짝 입술을 짓씹었던 해진은 이내 그것도 그만두었다. 이제야 자신이 라일과 관련한 일에 심력을 쏟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뜨면서 익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한다.

안으로, 더 안으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때까지.

“아침에 한 제안으로는 부족한 것 같은데, 혹시 뭔가 더 바라는 조건은 없나.”

“괜찮습니다.”

무언가를 고심하던 해진이 다시 무표정하게 바뀌는 순간을 라일은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예전 기억 때문에 괴로운 거라면 당장 자리를 옮길 심산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녀석은 제 속내를 잘 보여주지 않았다. 페로몬을 읽으면 분명 약간의 당황이 느껴졌는데 무슨 일이었던 걸까.

초조하게 제 입매를 더듬다가 겨우 꺼낸 말에도 해진은 기계적인 말만 되풀이했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하는 생각을 이토록 간절하게 했던 적이 있을까.

“네게는 득 될 게 없는 조건이었잖아. 무언가 더 주어야 해.”

한참이나 간절하게 쳐다본 끝에야 해진은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또 무언가 곤란하다는 듯한 페로몬이 느껴진다.

“……필요해지면 말하겠습니다.”

끝내 라일의 시선도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무언가를 주겠다는 것 자체도 곤란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가 침묵하자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퍼뜩 드니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해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일단은, 대화를…….”

더듬더듬 멍청한 소리가 흘러 나가자 해진의 눈가가 슬쩍 찌푸려졌다. 약간의 실금 같은 그 흔적은 라일의 몸을 쩍쩍 갈라지게 만들 힘이 있었다.

“굳이 대화까지 해야 합니까.”

“…….”

입술이 바짝 마른 탓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초조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속내 때문에 절박한 페로몬마저 흘러 나가려 했다. 라일은 티 나지 않게 심호흡하며 이런 제 상태를 숨겼다.

“페로몬 샤워를 해 줘 본 적은 있나?”

“아니요. ……이전 러트 때 했던 것처럼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비슷하긴 하지.”

그 당시 막 정신 차린 저를 향해 미약하게 달려오던 페로몬이 다시 떠올랐다. 정작 지금 눈앞에 있는 해진은 아까부터 흩어질 듯이 옅은 거부감만 흘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이런 반응을 보고 나서야 라일은 왜 녀석이 선뜻 이 제안에 응했는지 알 수 있었다. 페로몬 샤워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녀석에게만 불합리한 상황을 라일은 이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 또한 각인의 여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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