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진. 페로몬 샤워는 원래 이렇게 쉽게 해 줄 만한 일이 아니야. ……네가 그 의미를 모를 수 있다는 걸 간과했어.”
“찾아보고 오긴 했습니다. 전 별로 상관없습니다만.”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해진은 일단 페로몬 샤워가 뭔지는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검색해 보았기 때문이다.
보통 형질이 있는 사람들이 페로몬 샤워를 경험하는 건 갓난아이 때부터였다. 알파와 오메가인 부모는 아이를 페로몬으로 감싸면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렇게 겪은 페로몬 샤워의 경험이, 성장한 뒤에는 짝이 될 오메가나 알파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애정이라는 감정이 상황에 맞게 조정되어 상대에게 표출되는 것이다. 그것이 과도한 소유욕을 담는다면 마킹이 되는 식이었다.
다만 베타 부모 사이에서 자라난 해진은 친애적인 의미라고 쓰여 있는 텍스트에서 아무런 감흥을 찾아볼 수 없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런 사회적 뉘앙스에 의미를 두기엔 라일과 지금까지 해 온 페로몬 해소 또한 정상이 아니지 않았던가.
덤덤하게 상관없다고 말하는 해진을 라일은 뜻 모를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그날 아침에 했던 것처럼 부탁하지.”
조금 어수룩한 짓을 했던 그날 아침을 떠올린 해진이 머쓱하게 제 머리칼을 조금 매만졌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일단 페로몬을 개방했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 무슨 감정을 담아야 할지 모르겠다. 덕분에 퍽 혼란만 담은 페로몬이 라일을 향했다.
“내가 대화를 하자고 한 건, 네가 편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떠올리면 조절이 더 쉬워지기 때문이야.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개방하는 페로몬이 더 자연스러우니까.”
“아.”
해진도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감정들이 외부로 분출되는 경험은 종종 한 적 있었다. 그럴 때는 지금 어설프게 내보내는 페로몬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고 명확한 감정을 담는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해진을 보며 라일은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그는 살면서 고개를 숙인 적이 거의 없는 알파였다. 그런데도 녀석의 앞에서는 퍽 자연스럽게도 바닥을 보게 되었다. 녀석의 옅은 페로몬이 힘없이 깔린 바닥을.
차마 이 상황에서 긍정적인 페로몬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어설프고 거부감이 담긴 페로몬이라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던가.
게다가 해진에게 요청할 만한 대화 주제도 마땅치 않았다. 그가 가장 좋아할 만한 주제로는 가족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그건 라일이 감히 먼저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하고 싶은 얘기를 해. 경청할 테니.”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어렵다면 좋아하는 음식이라든가 읽었던 책 같은 그런, 사소한 것도 괜찮아. 무의식적인 감정을 떠올리는 게 중요한 거니까.”
긴 그의 설명에 해진은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소리는 분명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다. 그러나 그 달큼한 숨이 툭툭 밖으로 흘러나올 때마다 라일은 스스로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하는 수 없이 이제 그만 되었다고, 포기하려는 때였다.
“……저번에 서재에 갔을 때, 오랜만에 동화책 하나를 읽었습니다.”
“…….”
덤덤하게 흘러나오는 해진의 음색은 퍽 무미건조했다.
“동물이 많이 나오는 책이었어요.”
눈가를 찡그리며 책 내용을 떠올리는 그 얼굴에 라일은 홀린 듯 주의를 빼앗겼다.
해진은 정말이지 사소하고 쓸데없는 내용을 계속 주워섬겼다. 마지못해 이야기를 풀어내듯이. 그런데도 아까보다 조금은 자연스러워진 그 페로몬에 라일은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릴 적에 분명 온종일 읽은 기억이 있는데, 생각보다 책 내용이 짧아서 이상했습니다.”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그 음성을 들으며 라일은 저도 모르게 침묵했다.
그가 행여 입을 열면 이 꿈같은 상황이 금방이라도 달아나기라도 하는 듯이.
***
해진이 다시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 돌아왔다.
라일은 이전보다도 더 철저하게 녀석의 동선을 염두에 두고 병원에 준비를 지시해 두었다. 덕분에 병원은 오랜만에 분주하게 준비에 한창이었다.
저번처럼 안아서 차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라일은 녀석이 힘든 기색을 내비친다면 개입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휠체어라도 타 주면 좋을 텐데, 유난한 것 같다며 마크에게 거절 의사를 비쳤다고 한다.
그런데 해진이 방 밖으로 걸어 나오자 그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게 들어왔다. 오늘 해진이 외출복으로 선택한 옷이 무척 낯이 익었던 것이다.
그건 얼마 전 라일이 부탁을 위해 찾아갔던 날 녀석이 입었던 것과 같은 옷이었다. 위아래가 같은 통이 넓은 편한 옷.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번 그것을 의식하니 못내 신경 쓰였다.
“……준비는 다 되었나?”
“네.”
병원을 가긴 가는데 왜 또 라일이 그를 데리러 온 해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따질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어차피 무슨 차를 타고 가든 그건 라일의 소유일 테니까.
게다가 해진은 그냥 의문을 흩어 버리려고 애썼다. 이따금 왜라는 질문을 떠올리면 그가 마음속에 숨겨 둔 작은 상자가 터져 나갈 듯 부풀어 오르곤 했다. 터져 나간 감정을 다시 주워 올 기력은 없으니 모른 척하는 게 낫다.
“가지.”
병원 생각에 식욕이 없는지 해진은 아침을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덕분에 라일은 신경이 무척 날카로운 상태였다. 무사히 병원을 다녀온 후에는 반드시 녀석이 먹는 양을 체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아마 이래서 입은 옷이 더 신경 쓰이는 건지도 모르지.
“…….”
“…….”
차까지 걸어가는 동안 둘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이제는 완연히 차가워진 것 같아서 라일은 다시 해진의 옷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왜 저렇게 얇게 입었지.
“할 말이 있으십니까?”
그의 시선이 퍽 집요했는지 해진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불에 덴 듯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던 라일은 짧은 순간 무척 고심하며 말을 골라야 했다.
너무 과도한 관심을 보이면 분명 이상한 게 티가 날 테니 주의해야 했다.
“……아니.”
“…….”
그의 어설픈 변명에도 해진은 다시 무심하게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그들을 지배한 침묵 속에서 라일은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며칠간 그들은 이렇게 아주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매일 저녁 한 시간, 라일에게 가까스로 허락된 시간이었다. 운이 좋다면 아침을 함께 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간 해진은 나름대로 쓸데없는 대화 주제를 선택하느라 바빴고 라일은 조금이라도 해진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이따금 꺼내는 말들은 전부 해진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건물이나 현금이 필요 없는 사람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서 더 어려웠다. 해진이 싫다는데 더 강요할 수도 없어 곤란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끝내 조용히 해진을 병원에 데려다 놓아야 했다.
***
서류에 서명하던 그는 문득 다시 해진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녀석이 입고 있던 옷을.
분명 얼마 전에 봤던 그 옷인 것 같았다. 사실 일반적인 상황에서 같은 옷을 두 번 입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라일이 특별히 해 둔 명령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해진이 그간 옷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라일은 필요 이상으로 넉넉하게 옷을 지급하라고 명령해 두었다. 다시는 같은 옷을 두 번 입지 않아도 되게끔 말이다.
마크에게도 해진이 한 번 입은 옷은 세탁은 하되 다른 곳으로 치워 버리라고 해 두기도 했다. 녀석이 마음껏 새로운 옷을 찾아 입을 수 있도록.
그런데 왜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
다시 떠올리는 순간부터 이제 이 의문을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혹시 또 해진에게 지급되는 물건들에 탈이 난 건 아닐까. 아니면 지급하는 옷들이 영 성에 차지 않는 건 아닐까.
그와는 다르게 같은 옷을 두 번 입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았을 해진이었다. 그러니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기이한 마음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택에 갈 준비를 해.”
바로 인터폰을 눌러 비서를 호출했다. 그의 뜬금없는 명령에 곧 비서가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무언가 큰일이 생겼다고 짐작한 것 같았다.
“저택 말씀이십니까?”
“진의 진료는 언제 끝나지?”
“아직 두 시간쯤 더 걸릴 거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사이 저택에 다녀와야겠어.”
얼떨떨한 얼굴을 하면서도 비서는 침착하게 차를 대기시켰다. 그냥 가 버린다는 게 아니라 다녀온다는 이야기에 오늘 일정을 다 정리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급한 마음처럼 저택에 빠르게 돌아가자 놀란 사용인들이 뛰어나왔다. 마크는 해진과 함께 병원에 동행한 상태였다.
“진의 옷방을 관리하는 사용인을 불러.”
“네, 주인님.”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면서도 사용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 라일은 곧장 해진의 방으로 향했다. 마침 녀석의 방 응접실에 도착하니 사용인 하나가 막 그를 찾아 서둘러 오고 있었다.
거침없이 그를 스쳐 간 라일이 해진의 옷방을 벌컥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신가요, 주인님?”
“…….”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는 걸 라일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벌겋게 물들었던 시야가 이제야 돌아오는 것 같았다. 우려와는 다르게 해진의 옷방은 정상적인 상태였다. 불시에 들어왔을 땐 사용인들이 해진의 응접실을 열심히 청소하던 중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