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진이 오늘, 같은 옷을 입었던데.”
그의 착각이었을까. 혹시 모르기에 라일은 녀석의 옷을 관리하는 사용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이유를 아나?”
“깁스 때문에 최근 입을 만한 옷을 고르기 힘드신 모양입니다. 오늘 입으신 옷은 얼마 전에 세탁해서 치워 두었는데 찾으셔서 다시 가져다드린 겁니다.”
“……그렇군.”
잠깐 사그라들었던 초조함이 금세 다시 그를 잠식했다. 멍청하긴. 진작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입을 만한 옷이 없어 고민하면서 해진이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저를 홀대한다고 생각했으면 어쩌지.
문득 드는 걱정에 숨이 턱 막힌다. 그를 의아하게 보고 있는 사용인에게 라일은 가까스로 명령을 던질 수 있었다.
“옷을 더 주문해. 해진이 입었던 것과 비슷한 편한 옷 종류를 더 넣어 놔. 같은 옷을 두 번 입을 필요 없도록 해.”
“네, 주인님.”
“……그리고 옷방을 아예 두 개 정도 더 늘려. 일주일 간격으로 싹 다 갈아치우며 바로바로 돌릴 수 있도록.”
“네, 알겠습니다.”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으나 사용인은 바쁘게 그의 명령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모든 게 명령대로 돌아가고 있는데도 라일은 계속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따위 것들이 해진의 눈에 차지 않을 것만 같아서.
이상하게 모든 것이 부족하고 또 부족했다.
***
다음 날 아침 해진은 어쩐지 무거운 눈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어제 병원을 다녀왔더니 못내 피로가 쌓였다. 이렇게 나른하게 보내는 처지에 설마하니 몸이 힘든 건 아니었다. 무거운 건 역시 정신 쪽이리라.
어제는 주삿바늘도 봐야 할 일이 없었기에 그런대로 버틸 만했다. 커다란 기계에 발을 스캔할 때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버텨 냈다.
다리는 그런대로 잘 회복 중이라고 했다. 물론 뼈가 조각이 났다가 붙은 탓에 다 회복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과격한 운동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해진은 딱 두 발로 천천히 걸을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니 다행이었다.
오늘도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해진은 느릿하게 응접실로 나갔다. 간단하게 세수로 정신을 일깨우고 옷방으로 가자 무언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
그가 입을 법한 옷가지가 한 세트로 가지런히 옷방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작은 물건들을 임시로 올려 두곤 하는 테이블 위였다.
해진은 별 의심 없이 그것들을 집어 들었다. 최근 깁스 때문에 찾곤 했던 통이 넓은 바지라서 선뜻 손이 갔다.
천천히 옷을 갈아입으면서, 해진은 대수롭지 않게 이것들을 마크가 준비해 주었겠거니 생각했다. 다만 희미하게 라일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게 조금 이상하긴 했다.
***
“입었나?”
“네. 그대로 갖춰 입으셨다고 합니다.”
“……별말 없었고?”
“네.”
어제 병원을 다녀온 게 퍽 피곤했는지 해진은 꽤 늦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라일은 하염없이 녀석의 방 앞을 서성이다가 출근해야 했다.
“밥을 꼭 챙겨 먹도록 말을 전해.”
“네.”
“……내가 골라 둔 옷이라고는, 말하지 마.”
“저택 측에 당부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녀석이 일어나지 않는 바람에 시간이 남아서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이게 해진의 건강과 관련된 일도 아니니 다분히 불필요한 짓인데도.
어제 급히 명령한 결과 해진이 찾는 것과 비슷한 옷이 저택에 대량 비치되었다. 그중 하나를 손수 골라 코디해 두면서 라일은 페로몬을 조절하기 위해 애썼다. 혹시라도 녀석이 기분 나빠할까 봐.
이상함을 느끼고 거절할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해진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앞으로도 해진은 이런 호의나 배려가 라일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녀석이 좀 더 나은 환경에 있는 것일 테니.
“보고를 이어 가도 되겠습니까?”
“말해.”
“해고된 사용인 중 열 명이 대출 신청을 했습니다. 변호사 선임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머리를 차갑게 만드는 보고에 라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해진의 일에 관련된 놈 중 몇은 길어질 게 뻔한 소송에서 발을 빼려고 했다. 그 끝이 허무하게 끝날 걸 기민하게 눈치챈 것처럼.
그래서 라일은 사람을 심어 그들 주변을 조사했다. 이 소송이 무척이나 부당하며 혹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을 심어 줄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일단 해진이 명확한 소송의 주체가 아니라서 그들은 희망을 찾았다. 애초에 라일이 놈들에게 제기한 혐의는 아무래도 그보다는 조금 죄가 가벼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다양한 방법으로 개개인의 자금줄을 틀어막은 라일이었다. 그래서 몇몇은 대출을 받아야 변호사 선임을 위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접근한 건 그가 소유한 여러 대부업체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해당 사업체가 그의 소유라는 것이 잘 숨겨진 곳들.
“최대한 대출이 승인 날 수 있도록 해 둬.”
“알겠습니다.”
라일은 이따금 법에 저촉되는 상황을 꾸밀 때 이들을 운용하곤 했다. 그의 친족들도 모르도록 어릴 적부터 준비해 둔 것들이었다. 만약 그의 자리가 위협받는다면 요긴하게 써먹을 계획을 세워 둔 바 있었다.
가볍게 누군가의 인생에 파탄을 고한 라일은 다시 해진에게로 온 신경을 돌렸다. 어차피 그들의 파탄은 스스로가 불러온 것들이었다. 지금 라일이 직접 겪고 있는 것처럼.
적당한 시간에 녀석이 식사를 잘 챙겼는지 확인해야겠다고 덤덤하게 생각하며, 라일은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
온실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처음 예상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기존에 계획했던 것보다 규모가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라일의 눈에 차는 모습은 아니었다. 분명 온실은 구색을 잘 갖춘 정갈한 모습이었지만, 실내의 한계라는 듯 퍽 답답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를 그곳에 준비한 라일은 해진을 초대했다.
천천히 마크를 따라 외곽 정원으로 접어든 해진은 사뭇 놀란 얼굴이었다. 그간 이곳은 저택 입구 쪽에서도 보이지 않는 구역이라 황폐하게 버려진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잠깐 본관 쪽에서 느긋하게 보내는 사이 새 건물이 생겨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깔끔한 검은 철골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그 아래로 계절에 맞지 않은 싱그러운 식물들이 촉촉하게 수분을 내뿜고 있었다. 온실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훅 끼쳐 오는 따스한 공기가 해진은 얼떨떨했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녀석을 라일은 조심스럽게 식탁 쪽으로 이끌었다. 손은 자연스럽게 해진이 두르고 있던 두꺼운 외투를 받아 들었다.
저도 모르게 얌전히 옷을 건넨 해진은 자리에 앉고 나서야 조금 곤란한 낯을 했다. 무의식중에 라일을 너무 편하게 대한 것 같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작 라일은 무슨 생각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러지 말자.
“온실이 생겼군요.”
“그래. 날이 추워졌으니까 식당에만 있으면 답답할 것 같아서.”
주의를 돌리기 위해 해진은 일부러 입을 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라일의 대답이 꼭 해진을 위해 이 커다란 온실을 지었다는 듯 들려서 또 곤란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면서 정신을 다잡는다.
식사가 시작되니 다행스럽게도 금방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따금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온실 안을 맴돌았다.
아무리 마음을 억누르자고 다짐을 한들 새로운 자극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성인이 된 후로 해진의 삶은 지나치게 무채색이었으니까.
초록의 싱그러움이 자꾸만 시야를 멋대로 파고들었다.
“여긴 마음에 드나?”
“……온실에서 식사하는 건 처음이네요.”
라일은 별일 아니라는 듯 해진에게 물었다. 시선조차 그의 앞에 놓인 메인 디시에 못 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해진은 퍽 긴장하며 대답을 신중하게 골랐다.
이 저택에서는 가능한 한 알맹이가 없는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게 제 흔적을 지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이 빈 대화를 이어 나가는 건 생각보다도 퍽 어려운 일이었다. 매일 한 시간 라일과 마주 앉으며 해진은 그걸 깨달았다.
읽은 책이나 기사 따위에 관해서 설명이라도 하듯 말을 늘어놓는 것도 곧 한계에 봉착했다. 결국 그들의 대화 시간에는 조금씩 해진의 기호가 담기게 되었다.
좋아하는 음식, 색깔. 취향의 책이나 관심 있는 기계 등등. 물론 해진은 자신이 이런 것들을 선호한다며 직접 드러내진 않았다. 그저 주제로 삼았을 뿐이다. 그러니 만약 언급한 물건들이 대뜸 그의 앞으로 다가온다면 당장 그만둘 요량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라일은 그가 그어 둔 선을 지키듯이 변화를 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정말 그의 페로몬에만 목적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 무관심이 기껍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래.”
시선을 간신히 바닥으로 처박은 채 라일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자꾸만 해진 쪽으로 돌아가는 고개가 버거웠다.
답답하다고 생각한 온실이 이상하게도 해진이 들어서는 순간 환하게 깨어나는 기분마저 들었다. 녀석의 페로몬이 피부에 닿으면 라일의 속에도 온실이 생겨났다. 삭막하기만 했던 곳에 기적적으로 피워 낸 푸른 수풀들이 녀석의 체향에 맞춰 살랑살랑 바람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욕심만 커져서 큰일이었다. 해진은 애써 덤덤하게 대답했으나 그 시선이 자꾸만 푸르른 화초나 꽃으로 향하는 걸 라일은 기민하게 눈치챘다.
역시 온실을 더 크게 지어야 할 것 같았다. 이곳이 실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크게. 일단 이번 겨울엔 이곳을 쓰고 여름에는 다시 짓는 거다.
조금이라도 이 저택에 해진이 좋아하는 구석이 생길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