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64화 (64/101)

#64

“혹시 알레르기가 있는 꽃은 없나. 있다면 치우도록 하지.”

“……없습니다.”

홀린 듯이 꽃을 보던 해진은 마침 들려온 질문에 눈을 가늘게 떴다. 거리감을 두고자 노력했지만, 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레르기는 위험하니 저리 묻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만 무언가 묘한 기색마저 떨칠 수가 없어서 절로 표정이 굳는다.

오히려 라일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굴어서 민망할 즈음, 그의 휴대폰이 짤막하게 울렸다.

메시지를 읽던 라일이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이번에는 해진을 똑바로 향한 시선이 조심스레 물었다.

“……마크가 전달 사항이 있다는데 잠깐 들어와도 될까.”

“네.”

다시 묘한 기분을 느끼며 해진은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동안 식사 시간에 워낙 예민한 모습을 보인 자신이었으니 저리 물을 수도 있겠지.

이 기분은 대체 뭘까. 저번에 느꼈던 미약한 분노와는 또 달라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도련님. 공사 관련으로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무래도 두 분이 같이 계실 때 의논하는 편이 좋을 듯해서요. 브라이트 씨,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주름진 마크의 눈을 보며 해진은 쓴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는 매번 해진이 저를 두려워할까 노심초사하는 조심스러운 몸짓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실은 저를 걱정스레 보는 저 눈길에 적응해 버린 지 오래였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공사 때문에 소음이나 먼지가 심해질 것 같다고 하더군요. 브라이트 씨의 방 상황이 조금 애매하게 되었습니다.”

“…….”

뜻밖의 결과에 라일은 곤혹스럽게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해진의 손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건 결국 조금 미뤄지고 말았다. 시장을 갈아치울 준비는 순조로웠으나 이번엔 문화유산에 미친 단체에서 연락해 온 것이다.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하필이면 고택이 붕괴할 위험이 있다는 개소리를 입에 담는 바람에 라일은 그냥 넘어가질 못했다.

지금은 혹시 모를 가능성을 알기 위해 저택 구조에 대한 정밀조사를 맡겨 둔 상태였다. 행여 그걸 사용할 해진을 위험에 빠트릴까 봐.

“일단 브라이트 씨의 방을 임시로 옮겨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본관의 손님방은 그것뿐이고 외관 쪽도 차차 어수선해질 것 같습니다만.”

설령 외관 쪽은 괜찮다 하더라도 라일은 해진을 그곳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잔뜩 비에 젖은 채 구석진 제 방문 앞에 있던 해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안 될 일이지.

본관에 있는 더 좋은 방을 가늠하던 라일은 그 순간 한 곳을 떠올렸다. 다분히 충동적인 제안이 자제할 겨를도 없이 튀어 나가고 말았다.

“매일 오는 내 응접실에, 실은 이어진 침실이 하나 더 있어.”

뜻 모를 해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반사적으로 페로몬을 더욱 갈무리하면서 라일은 그걸 마주 보았다. 오늘따라 해를 더 잘 반사하는 녀석의 속눈썹에 홀린 듯 눈길을 사로잡힌다. 이토록 푸르게 만들어 둔 온실에서, 라일이 바라보는 건 오로지 녀석의 검은 머리칼뿐이었다.

“……매일 오는 것도 너무 번거롭고 위험하니, 가까운 곳은 어떨까 하는데.”

라일이 사용하는 건 저택의 주인이 쓰는 방이다. 그렇기에 응접실을 사이에 두고 부부의 침실이 마주 보고 있는 형태였다.

그의 부모도 이 방을 사이좋게 나누어 쓰지 않았기에 그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였다. 다만 입에 담으면서도 이 뻔뻔한 제안을 해진이 부디 모르기만을 바랐다.

“…….”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진의 시선은 라일과 마크의 얼굴을 통통 튀어 다니기만 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라일의 손바닥에는 흥건하게 땀이 배어들었다.

갈급한 심정을 갈무리하기가 점점 힘들어져서 라일은 저번부터 신경 쓰이던 부분도 애써 입에 담아 보았다. 방 근처에는 마침 그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려던 목적에도 부합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 근처에도 서재가 있어. 이 저택에서는 가장 큰 규모니, 이번엔 쓸 만할 거야.”

저번부터 서재에 좀 집착하는 것 같은 라일의 행태가 이상했지만, 해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대신 이 온실로 오는 길에 마주쳤던 광경을 떠올렸다.

어쩐지 저택 내부가 조금 부산스럽다는 인상을 받긴 했다. 평소보다 문이 열려 있는 방도 많았고 오가는 사람들도 분주해 보였더랬다. 어딘가 대대적인 수리라도 필요해진 모양이었다.

벌써 5년 넘게 이곳에 머무른 덕에 해진은 이 오래된 저택이 퍽 손이 가는 곳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엔 공교롭게도 그가 있을 방 근처가 문제였던 걸까.

이 모든 소란이 저 때문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해진은 그저 곤란하다는 생각만 이어 나가야 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무언가 지나치게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떨칠 수는 없었다. 라일과의 거리가.

물론 그간 그의 방까지 가는 길이 험난했던 것도 사실이긴 했다.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이 저택은 다리를 다친 이에게는 퍽 불편한 구조였다.

매번 불안한 듯 저를 따라나서는 사용인들의 무리를 달고 라일의 방으로 향하는 건, 색다른 곤란함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분명 처음엔 한두 명 정도가 저를 도와주듯 따라왔을 뿐인데 어느새 그가 움직이려 들면 쫓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게다가 이 저택의 주인이 수리가 필요해서 잠깐 방을 바꿔 달라는데 무어라 더 말을 보태겠는가.

“……고마워.”

아까부터 묘한 기분이 계속 이어졌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라일의 인사를 들으니 더 그랬다. 분명 무언가 석연치가 않은데, 그게 정확히 뭔지 해진은 가늠하기 힘들었다.

***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인데 참으로 많은 사람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정작 고개를 끄덕인 해진은 침실에 얌전히 모셔진 채 움직이지 못했지만 말이다.

뭐라도 좀 거들어 볼까 싶어서 짐을 챙기려고 했더니 사용인들이 극구 만류했다. 결국 그들의 동선에 이리저리 방해만 되는 것 같아서 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잠깐만 옮겨가는 건데 짐을 다 가져갈 필요가 있을까?

“온실은 어떠셨습니까. 제법 신경을 쓴 제 역작입니다만.”

그때 잠깐 다른 일로 자리를 비웠던 마크가 종을 울렸다. 저택 안팎이 무척 번잡해서 할 일이 많을 텐데도 그는 한 시간에 한 번 정도는 꼭 해진의 상태를 체크하러 왔다.

어쩌면 감시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좀처럼 경각심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마크의 주름진 눈이 호선을 그릴 때면 꼭 할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어졌기 때문이다.

해진에게는 조부모님이 없었다. 그를 길러 준 브라이트 부부는 그들의 부모를 전부 일찍 여의었다. 가까운 친척도 없어서, 간신히 가족이라는 곳에 편입되었던 해진은 그 사고 이후로 다시 홀로 사회로 밀려나고 말았다.

“멋있었어요.”

마크는 직접 온실 배치를 전부 도맡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곳이 계속 황폐해서 내내 거슬렸다는 소리와 함께. 그래서 해진도 솔직한 감상을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살면서 그렇게 멋진 온실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런 곳을 통째로 빌려 식사 장소로 사용하는 것도 아마 다시는 하지 못할 경험이리라. 어차피 지나가 버린 일이다. 해진은 애써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무의식적으로 마크에게 온실 안쪽에 있던 푸른 아치형 입구가 특히 멋졌다고 말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이제 곧 마무리가 될 겁니다. 두 시간쯤 뒤에 식사하고 바로 옮겨 가실 수 있을 듯하군요.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다 괜찮아요.”

어머니의 별 수프가 먹고 싶을 때가 아니라면 해진은 특별히 무언가를 부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마크는 식사 시간마다 그의 의중을 묻는 걸 멈추지 않았다.

“참, 잠자리가 바뀌셔서 잠을 설치실까 걱정이군요. 저녁에 간단하게 와인이라도 드릴까요? 드시고 나면 그럭저럭 잠이 잘 올 겁니다.”

“아, 와인이요…….”

“음……. 검사 결과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셔서 술 조금은 괜찮다고 들었는데, 혹시 와인 말고 다른 술을 즐기십니까?”

먹고 싶은 게 없다는 소리에 마크가 평소처럼 물러날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의외의 것을 묻는 바람에 해진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미처 감추지 못했다.

“제가,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어서요.”

“오, 그렇군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건 마크도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술을 아예 안 먹어 봤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해 보지 않은 것처럼.

성인이 되자마자 저택에 들어왔던 그였다. 편하게 술이나 홀로 마시며 보낼 만한 세월도 아니었기에 한 번도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그의 형이 종종 마시고 기분 좋게 그에게 엉겨 붙던 건 잘 기억나지만 말이다.

잠깐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던 마크가 다시 씩 시원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잘못이 아닌데도 눈치 보듯 그를 바라보는 해진의 시선을 의식한 탓이다.

“그럼 이참에 한번 경험해 보시죠.”

“아…….”

“제가 특별히 도수는 약하지만 좋은 와인으로 골라 오겠습니다. 물론 억지로 드실 필요는 없지만요.”

마크는 저택에 숨겨 둔 좋은 와인이 엄청 많다며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조금 그에게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퍽 사교적으로 구는 마크였다.

결국 해진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그럼 또 모시러 오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감사합니다.”

꼬박꼬박 인사를 잊지 않는 그에게 마크는 다시 푸근한 웃음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했다. 와인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걸 다 경험해 보게 생기지 않았는가. 그래도 몸이 좋아지긴 한 모양이라면서 해진은 억지로 이 상황을 묻으려 애썼다.

대체 누구에게 숨기는지 알지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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