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66화 (66/101)

#66

“……어때.”

해진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급변했다. 그 포근한 향을 해진보다도 먼저 알아차린 라일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얼떨떨해 보이는 녀석의 표정에서 왜인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맛있어요.”

포도 특유의 쌉싸름한 맛이 혀를 감쌌다. 분명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생소한 맛인데도 잘 넘어간다. 내쉬는 숨을 따라 훅 포도 향이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 해진은 자신이 꼭 거대한 포도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저도 모르게 잘게 몸서리를 쳤다.

“다행이군.”

마크가 골라 온 건 도수가 무척 낮고 단맛이 강한 와인이었다. 아마 와인을 처음 먹는 해진을 배려한 것이리라. 물론 와인 준비를 하다 말고 도망간 건, 필시 라일이 무슨 우려를 하고 있는지 잘 안다는 뜻이겠지만.

정말 입에 맞는 건지 녀석은 다시 와인을 홀짝 한 모금 더 넘겼다. 어설프게 잔을 쥐고 있는 하얀 두 손이 붉은 포도주색과 퍽 어울렸다. 살짝 분홍빛이 도는 손톱 위에서 은은하게 조절해 둔 응접실의 조명이 반질거렸다.

이상한 갈증이 드는 바람에 라일은 제 잔에도 와인을 조금 채웠다.

“생각 외로 단맛이네요.”

절대 그가 생각하는 맛이 아니라고 하기에 무척 시고 역한 맛이라고 상상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술을 먹은 다음 날이면 형은 죽을 것처럼 엎드려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 상상에 비하면 조금 떫긴 해도 무척 달았다.

“특히 단 종류로 준비해 주었군.”

라일이 상표를 가리키며 말해 주었다. 와인은 종류에 따라 맛이 각각 다른 모양이었다. 다시 혀끝에 들러붙은 단맛을 느끼려고 한 모금을 더 넘겼다.

“이것들도 좀 먹어.”

저녁을 잘 챙겨 먹었다는 건 보고 들었으나 해진이 술만 연신 넘기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중간에 있던 치즈 플래터를 해진의 앞으로 바짝 밀었다. 혹시 거절하면 다른 안주라도 준비해야겠다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의외로 해진은 순순히 그중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가장 노랗게 생긴 치즈가 퍽 먹음직스러워 보였던 탓이다.

해진이 와인을 반 잔이나 비우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제서야 당황한 라일이 이번엔 와인이 담긴 디캔터 병을 슬쩍 제 쪽으로 당겨 왔다. 그 투명하고 와인이 가득 담긴 병으로 해진의 시선이 진득하니 달라붙는 것도 같았다.

“……너무 빨리 마시지 마.”

“괜찮은데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녀석은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푹 고개를 숙인 채 와인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골똘히 그 안에 담긴 액체를 관찰하는 행동이 신선했다. 이제야 제 나이로 보일 정도로.

살짝 지끈거리는 심장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라일은 해진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애썼다. 다시 홀짝 와인을 들이켜는 게 아무래도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나.

“혹시 서재에는 가 봤나?”

효과적이긴 했는지 해진의 시선이 대번 라일을 향했다. 평소보다도 미약하게 더 찌푸려진 눈가가 묘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예상외의 반응에 자신이 혹여 말실수를 한 건 아닌가 싶어진 라일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요.”

서재에 자신이 꼭 가야 하는 일이 있던가. 묘하게 서재에 집착하는 라일 때문에 해진은 침착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무릎 위에 놓아두었던 지갑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펼쳐진 채라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두 가지가 머리에 같이 들어오는 바람에, 입에서는 의도치 않은 말이 불쑥 흘러 나갔다.

“그때 그 동화책 말입니다.”

“동화책……?”

뻔한 말을 하는데도 되묻는 라일이 살짝 답답하게 느껴졌다. 대화를 시작하려니 목이 조금 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신 뒤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첫날 제가 말했던 거, 동물이 많이 나온다는.”

“응.”

그의 이야기는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라일이었다. 아마 해진이 말하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얼마나 세세하게 신경 쓰는지 안다면 녀석이 진저리를 치고 도망갈 만큼 말이다. 그걸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을 정도였다.

금방 무슨 책을 말하는지 알아차린 라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다. 뜬금없는 소리에도 그 동화책의 제목과 판권을 가진 출판사까지 주르륵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그러자 어디선가 툭 날아온 돌이 호수 표면에 떨어진 것처럼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어머니가 제가 있던 고아원에 봉사하러 오셨을 때, 처음으로 읽어 주신 책이었어요.”

라일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덤덤하게 말문을 연 해진에게 그저 하염없이 눈길만을 보낼 뿐.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해진의 페로몬에는 슬픈 감정이 여과 없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 슬픔이 온몸을 매섭게 두드렸다. 그런데도 페로몬 온도가 퍽 따듯해서 라일은 더더욱 아픔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

떨리는 손을 감추려고 와인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해진은 달다고 연신 넘기던 와인인데 어쩐지 그 맛이 무척이나 썼다.

“금방 안 오실 줄 알았거든요. 많이들 그러니까.”

제 무릎에 있던 지갑을 들어 올린 해진이 마치 그 사진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내쉬는 숨조차 조심하면서 라일은 그런 해진을 관찰했다.

금방 발그레해진 두 볼이 오랜만에 해진의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래서 기껏 책을 사 와서 읽어 주시는데 집중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막상 어머니가 떠나고 나니 너무 아쉬워서 혼자 그걸 읽었어요. 얼마나 오래 걸리던지.”

파르르 떨리는 녀석의 숨결이 가까이에 있는 피부부터 차근히 그에게 파란을 일으켰다. 맨 처음 그 동화책 이야기를 꺼낼 때, 어릴 적에 무척 오랜 시간을 두고 읽었다고 말한 걸 라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해진이 지금 원하는 건 속에 쌓인 이야기를 쏟아내는 일이라는 걸 무의식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책을 다 읽을 무렵 어머니는 다시 고아원에 봉사하러 돌아오셨어요. 저를 입양할 때까지, 몇 년 동안이나.”

다만 라일은 제어할 겨를 없이 흘러 나가는 페로몬을 막지 못했다. 치밀어 오르는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해야 하는지 그는 도통 알 수 없었다.

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해진의 햇살 같은 페로몬에 반응하듯 라일의 페로몬 또한 응접실을 천천히 채워 나갔다. 말하는 녀석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존재감을 지우고 싶었는데 그의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뒤로 계속 잊고 있었는데 서재에 입구에 마침 꽂혀 있어서, ……신기했어요.”

그걸 해진도 똑똑히 느끼고 있을 텐데 그는 별말 없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녀석이 본 동화책들은 아마 어린 라일을 위해 놓여 있었을 것이다. 정작 그는 동화책에는 금방 흥미를 잃고 펴 보지 않았는데도.

“…….”

침묵하는 그를 두고 해진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말을 이어 갔다. 동화책의 내용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기도 했다. 혼자 아무 말이나 마구 떠드는 게 생각보다 쉬웠다. 이 응접실에서 대화를 시작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새 익숙해져 버린 것처럼.

평소라면 이러지 말아야지, 스스로를 제어했을 텐데 해진은 그러지 않았다. 뱃속부터 따스한 기운이 올라와 머리가 조금씩 멍해진다. 계속 마시게 되는 와인은 다디달아서 자꾸만 갈증이 나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 라일의 페로몬이 진하게 느껴졌지만, 그 또한 괜찮았다. 생각보다도 그의 페로몬이 불쾌하지 않아서 신기할 정도였다. 발현하고 만난 모든 알파의 페로몬은 거칠고 역겨워서 꽤 꺼렸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해진은, 라일이 무섭긴 했어도 그의 페로몬까지 그렇게 느낀 적은 없었다는 걸 문득 상기해냈다. 애초에 그의 페로몬은 느낄 일이 거의 없던 탓이리라.

이따금 느껴지는 페로몬도 묵직하다는 감상은 있었지만 불쾌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상성이 좋다는 소리가 거짓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지금 무척이나 따사로운 기운을 품은 라일의 페로몬이 썩 괜찮다고 무심코 생각해 버렸다.

와인을 너무 빨리 마시는 바람에 취했나 보다.

***

다음 날 아침, 해진은 모처럼 형을 절절하게도 떠올려야 했다. 숙취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보다 빨리 어른이 되었던 형이, 왜 그리도 술을 먹은 다음 날 괴로워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머리를 조금이라도 들어 올리면 금방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정신적인 문제로 느끼던 울렁임과는 또 달랐다. 이번에는 몸의 괴로움까지 동반한 어지러움이라 힘들었다. 어디가 분명 아프고 힘든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는 이상한 상태였다. 마치 생각과는 사뭇 달랐던 와인의 맛처럼.

와인을 떠올리니 갑자기 또 속이 울렁인다.

“진. ……괜찮아?”

“으…….”

해진은 체면도 거리감도 잊은 채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요동치는 페로몬은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침대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라일은 안절부절못했다. 여느 때처럼 아침을 먹자며 그를 깨울 생각이었는데 안에서 들리는 신음성에 놀라서 뛰쳐 들어온 참이었다.

마크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금방 숙취에 좋은 음식들을 들고 달려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라일은 어제 한 잔을 더 달라는 해진의 말을 거부하지 못한 자신을 거세게 나무랐다. 고작 와인 두 잔이지만 아직 몸이 좋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이 분명하다. 마크 또한 이런 해진의 상태를 보고 모처럼 여유가 없는 얼굴로 침대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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