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67화 (67/101)

# 67

“뭘 좀 넘기실 수 있겠습니까. 토마토 주스를 드시면 좀 나을 겁니다.”

간청하는 목소리에 해진은 가까스로 시선을 빙글 돌렸다. 창백해진 얼굴은 보통 때보다도 처연한 인상을 주었다. 살짝 땀에 흐트러진 녀석의 앞머리를 보고 라일은 거센 충동을 느꼈다. 이윽고 이런 충동을 느낀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졌지만.

“안 되겠어, 의사를 불러.”

“네, 도련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해진은 사태를 파악했다. 몸이 생각보다도 너무 아파서 덜컥 무섭긴 했으나 정황상 그냥 숙취인 것 같았다. 아침부터 의사라니 부담스러워서 마음이 불편하다.

“괜찮…….”

“진. 금방 의사가 올 거야. 혹시 모르니까, 응?”

습관처럼 거부하려는데 라일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파란 두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해진은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침묵했다.

본능이 위기감을 느꼈다. 라일이 저를 저런 눈으로 쳐다보지 않았으면 했다. 이렇게 따듯하다 못해 울렁이는 속이 가라앉을 정도로 자상한 페로몬을 흘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습니다. 도련님, 전 내려가서 준비한 뒤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마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혹여 해진이 또 의사를 보기만 해도 발작을 할까 봐 그는 매번 의사가 방문할 때마다 먼저 내려가 세심하게 준비를 시켰다.

그 또한 이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있지도 않은 할아버지를 연상시킬 만한 자상한 태도를 그만두어 줬으면.

“그렇게 해.”

대답하면서도 라일은 내내 해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이라도 한 번 깜빡일라치면 그의 주변에 몰려든 페로몬이 파도를 맞은 듯 울렁였다.

제발, 이러지 않았으면.

“힘들면 그냥 잠들도록 해. 일어나면 다 괜찮아질 테니.”

일그러진 해진의 얼굴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했는지 라일은 또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그에게 말했다. 마크가 나가자 이번엔 사용인 하나가 물수건을 만들어 가져왔다. 사용인도 그걸 침대맡에 놓으면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해진을 바라보는 걸 잊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물수건을 받아 든 라일이 머뭇거리면서도 꿋꿋하게 해진의 이마를 닦아내었다. 사뭇 조심스러운 손길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약간 차가운 물기가 닿으니 머리가 겨우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순간, 해진은 그간 느꼈던 석연치 않던 감정이 무언지 알아내고 말았다.

어느덧 이들의 자연스러운 온기에 기대고 마는 자신이 불편했다.

어설프고 멍청한 짓이었다. 흔적도 없이 이 저택을 나가자고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저를 둘러싼 온기가 너무 따듯해서, 무의식중에 기대 버리고 마는 자신의 나약함이 원망스러웠다.

겨우 몸에 힘을 주어 물수건을 밀어냈다. 그런데도 라일은 걱정스러운 눈길을 그만두질 않았다. 이렇게 자꾸 저를 흔드는 그가 거북했다. 서러울 정도로.

“괜찮아. 곧 괜찮아질 거야.”

그래서 해진은 잠으로 도망치는 걸 택했다.

***

며칠이 더 흘러 드디어 깁스를 풀어내는 날이 다가왔다.

한쪽에 무거운 걸 달고 다니는 건 생각보다도 더 불편한 일이었다. 예상보다 오래 하게 된 깁스 때문에 매번 목욕하는 것도 퍽 곤욕이었다. 사용인들은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했지만 그건 해진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었다. 더는 기대고 싶지 않다는 의지 말이다.

“가지.”

“…….”

자연스럽게 해진의 병원에 동행하려는 라일을 보면서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자꾸 따라오는 게 의아한 마음보다, 같이 차를 타고 갈 걸 무의식중에 알고 있던 스스로에게 놀랐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움에 슬쩍 시선마저 돌렸으나 라일은 꿋꿋하게 그의 근처로 다가왔다. 여차하면 부축을 해 주고 싶다는 듯이.

괜히 목덜미가 간지러워서 해진은 슬쩍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많이 길어서 다듬을 때가 되었다. 저번에는 마크가 도와줬으니 다시 부탁을 해 봐야겠다.

자연스럽게 생각하던 해진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지?”

거의 틈도 없이 흘러나온 라일의 질문에 해진은 무심코 시선을 마주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니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걸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기에 해진은 그냥 다시 앞으로 걷는 걸 택했다. 깁스가 이상하게 더 무거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 라일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진료가 끝나면 가고 싶은 곳은 없나?”

“……가고 싶은 곳이요?”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 묻는 걸까. 억지로 의심을 자아내면서 해진은 라일을 바라보았다. 숨겨 둔 의도 같은 걸 찾고 싶어서.

“깁스를 풀면 아무래도, 돌아다니기 편해지니까.”

그러나 그가 찾은 건 그의 페로몬뿐이었다. 그것도 한없이 부드러워 피부에 닿을 즈음엔 사르르 흩어지고 마는 이상한.

해진이 그걸 눈치챈 순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단단히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그리곤 내색하지 않고 곁에서 차를 향해 걸었다. 그 걸음이 깁스를 한 자신이 따라가기 벅차지 않을 정도로 느리다는 걸 해진은 문득 깨달았다.

페로몬은 빠짐없이 갈무리되었으나 잔향이 남았다. 그 숲을 닮은 페로몬이 최근 들어 퍽 자주 느껴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알파인 게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제어를 잘하던 사람이, 마치 그게 힘들어졌다는 것처럼.

“진?”

이상함을 느낀 해진이 이번엔 조급하게 라일의 눈을 마주했다. 일부러 집요하게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그를 관찰한다. 그러자 다시 코끝에 희미하게 라일의 페로몬이 스쳤다.

또다. 또 이렇게, 따스한 페로몬을.

“……호수가 보고 싶어요.”

그래서 해진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분명 저 불필요한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을 텐데 막을 겨를도 없이 튀어 나가고 말았다.

“호수?”

“네.”

뜻밖의 장소가 나왔지만 라일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하필 호수인지 솟아오르는 의아함은 자연스럽게 내리누르면서.

***

“급히 오느라 사람들을 전부 통제하진 못했어.”

“……통제요?”

“응. 우리 가문 소유인데, 보통 때는 개방해 두는 편이라.”

그게 못내 미안하다는 듯 구는 라일의 말투에 해진은 초조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역시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건 좋지 않았다. 이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막대한 경호 인력을 보면서 뭔가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을 떠올렸을 무렵이었다. 여기가 베르무스의 소유라는 소리까지 들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눈앞의 호수는 절경이었다. 그도 이 헤비레인에서 가장 유명한 이 호수를 익히 알고는 있었다. 찾아오는 건 처음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게 베르무스의 소유였다니.

잔잔하고 넓은 호수는 빠짐없이 관리된 모습이었다. 가운데에는 한 줄기 인공 분수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호수를 따라 걸을 수 있도록 산책로도 정갈하게 잘 정비된 모습이었다. 팬 곳도 없이 깨끗한 잔디밭 위에는 사람들이 피크닉 매트를 펴고 누워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분명 그가 알고 있는 호수보다 훨씬 관리되고 좋은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나?”

“예쁘네요.”

“…….”

해진의 대답은 사뭇 시큰둥했다.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으나 미처 가리지 못한 페로몬에는 관심 없다는 티가 났다. 그걸 보고 초조함을 내리누르는 건 이제는 라일에게 퍽 익숙한 행위였다.

와인을 마신 이후 해진이 조금 이상했다. 본래도 무뚝뚝하게 굴긴 했으나 유독 페로몬이 거칠고 불안정해 보인다.

온실에서 식사하자는 제안도 몇 번이나 거절당했다. 평범하게 식당에 가는 건 또 거부하지 않아서 주의 깊게 식사량을 살피고 있었다.

라일에게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나 잘 지내던 마크나 사용인들과도 서먹해졌다고 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저택의 모든 CCTV를 확인했으나 이상한 행동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이 변화는 아마도 해진이 만들어 낸 것이리라.

그게 꼭 저택에 있는 모든 것에게 정을 붙이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라서 갈급함이 들었다.

그나저나 호수를 좋아하는 걸까. 지금 호수를 바라보는 표정은 퍽 무감각하였으나 이곳을 말한 이유가 분명 있으리라. 차차 호수를 몇 개 더 매입해야 할지 라일은 신중하게 고민에 빠졌다.

“회장님.”

그때 주변 통제에 나섰던 경호원이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역시 완벽하게 이목을 가리기는 힘들 듯했다. 이곳은 베르무스의 사유지이긴 해도 사회 환원 차원에서 일반 시민에게 개방해 두는 곳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완벽하게 주변을 통제했을 텐데.

모처럼 해진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해서 마음이 못내 다급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 몰려든 인파를 보니 경솔한 자신이 이리도 어리석을 수 없었다.

경호원들이 근처에서 사진을 못 찍게 하고 있지만, 이목이 쏠리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괜히 해진의 얼굴이 매스컴에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는 다시 뒤쪽의 경호원에게 눈짓해서 해진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릴 수 있도록 지시했다.

“진. 이걸 착용하는 편이 좋겠어.”

경호원이 같이 가져온 선글라스와 모자를 해진에게 내밀었다. 라일의 옆에 있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해진이 곤란해질 것이다. 녀석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해진의 얼굴이 방송을 탄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속이 다 뒤집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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