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68화 (68/101)

#68

“이건…….”

손에 들린 선글라스나 모자를 조금 어색하게 바라보던 해진은 이내 군말 없이 그것을 착용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몰려드는 시선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애초에 호수에 혼자 온다는 선택지가 있었을 터다. 그러나 막상 호수에 오고 싶다고 말할 때 해진은 라일이 같이 가는 자리라는 걸 분명 인식하고 있었다.

꼭 무언가가 스며들어 버린 것처럼.

“불편해도, 잠깐만 참아.”

“…….”

말없이 모자를 눌러쓰는 해진의 머리칼이 조금 길어진 게 보였다. 저도 모르게 뒷덜미에 삐죽 나온 머리카락으로 향하던 라일의 손이 가까스로 닿기 전에 멈췄다.

그러나 시선은 하염없이 아직도 훤히 드러난 녀석의 하얀 목덜미에 머물렀다. 날씨에 맞는 두꺼운 옷을 입은 해진이었으나 무언가 허전해 보여서 참기 힘들었다.

“이것도 두르는 게 좋겠어.”

그래서 그는 충동적으로 목에 걸쳐 두기만 했던 목도리를 풀어냈다. 코트 안쪽에 길게 늘어트려 두었던 것이었다.

“…….”

얇은 목도리를 보며 해진은 짧게 고뇌했다. 그러나 이내 손을 내민다. 얼굴을 최대한 노출하고 싶지 않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내민 손이 무색하게 라일은 직접 그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바로 후회가 덜컥 들었다. 따스한 온기가 사정없이 피부에 들러붙었다. 코까지 목도리에 푹 파묻히니 라일의 페로몬 내음이 너무 진하게 느껴졌다.

“저택에 가자마자 돌려드릴게요.”

거의 발작하는 것처럼 해진은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아니요.”

딱딱하게 굳은 말투가 귀에 박혔다. 얼굴을 거의 가려 버린 탓에 해진이 무슨 표정인지는 라일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페로몬이 막대한 거부감을 띠고 있었다.

저택에는 해진의 물건이 많았다. 그러나 라일은 해진이 그것을 자신의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조금이라도 더 받지 않기 위해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면 잘 알 수 있었다.

그게 전부 이 저택에는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의지인 것 같아서 라일은 통증을 느꼈다.

“그래. 그렇게 해.”

무례할 정도로 단호한 말투가 튀어 나갔으나 라일은 개의치 않고 대답한다. 오히려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그의 목도리를 더 잘 정돈해 주기까지 했다.

해진은 제 얼굴이 전부 가려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괜히 마른침을 한 번 삼키면서 해진은 호숫가에 주저앉았다. 그들 앞에 놓인 간이 의자에서는 찬 기운이 올라왔다. 무언가 더 준비할 게 있었는지 라일이 옆에서 머뭇거리는 게 보였으나 그냥 무시했다.

고개를 슬쩍 아래로 숙이니 호수 표면이 바로 시야에 들어온다. 라일은 아무것도 더 제안하지 않은 채 그의 옆에 얌전히 앉았다.

해진이라고 이러한 대접들이 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설움으로 자아낸 지난 5년을 떠올리면 햇살 같은 시간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온정에는 늘 굶주린 자신이었다. 이토록 쉽게 스며들 걸 알면서도 진작 어떻게든 그 저택을 빠져나오지 않은 제 잘못이었다.

인생에서 몇 없는 따스한 환경이었다. 그를 빠짐없이 사랑으로 감싸 준 가족들, 저택의 다른 이들.

“추우면 말해.”

그리고 라일.

그는 이러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대체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라일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는지 해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쑥 거부감이 올라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주하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그래서 해진은 계속 호수에만 시선을 던졌다. 인공적인 내음이 물씬 나는 잔잔한 물결을 보며 생각을 거듭한다.

괜찮다고. 어차피 이제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다고.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깊은 결론이 나지 않는 법이다. 제대로 된 사회 경험도 없는 해진은 그런대로 얄팍한 방법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기로 했다.

“…….”

“…….”

그 뒤로 둘은 한참이나 말없이 호수 물결에만 시선을 던졌다. 정확히는 해진의 시선은 줄곧 호수를 향했고 라일의 시선은 다른 곳을 맴돌다가도 끝내 해진의 얼굴로 가 머물렀다.

수면에 반사된 햇살이 이상하게 해진에게만 잔뜩 몰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 찬란한 광경을 대놓고 바라볼 수는 없어서 라일은 겨우겨우 다른 쪽으로 제 얼굴을 돌리느라 필사적이었다.

그럼에도 라일의 시선은 이따금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머리칼을 쫓았다. 그다음엔 까딱거리는 그의 발끝으로 향했다. 깁스가 없어 한껏 가벼워 보이는 발끝이 움찔움찔 잔디 위를 노닐었다.

다시 호수까지 한 바퀴 돌고 돌아 또 해진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렇게 라일은 새로운 사실을 자각했다.

녀석이 이렇게 예쁜 얼굴이었던가.

***

여느 때처럼 라일의 아침은 분주했다. 자신의 출근 준비도 있지만, 해진의 일과도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직접 가서 챙길 수 있다면 더 수월했겠으나 마크나 다른 사용인을 통해야 했기에 번거로웠다.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고 돌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저 녀석이 거부감을 느끼고 또 도망치고 싶어질까 봐 조심할 뿐이었다.

그래서 해진이 눈을 뜨기도 전인 이른 아침. 그는 조용히 녀석의 옷방으로 사용되는 곳에 들어갔다.

녀석의 옷에 대한 기호 파악은 쉽지 않았다. 그동안은 깁스를 한 채로도 편한 옷 위주로 골라 줘야 했기에 그나마 선택지가 적었으나 오늘은 다르다. 깁스를 풀고 입는 첫 옷이니 무엇을 골라 두는 편이 좋을지 라일은 어젯밤부터 고심했다.

생각할수록 호수에서 바라본 녀석의 찬란한 얼굴이 기억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때 해진이 얼굴을 온갖 방법으로 다 가리고 있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게 퍽 의아할 따름이지만.

그러나 옷방에 들어서자마자 라일은 걸음을 우뚝 멈춰야 했다.

“…….”

들어서자마자 잘 보이는 한구석에 낡은 캐리어가 곱게 싸여 있었다. 그가 지시해서 뒀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낡고 중저가 모델인 캐리어에는 어린아이가 붙일 법한 유치한 스티커도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녀석에 관한 모든 일에 예민한 라일은 캐리어 근처에 놓여 있던 물건도 몇 개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다. 분명 해진의 개인 물품들이 쓰기 편하게 이곳저곳에 있었는데.

“어젯밤 늦게 짐을 챙겨 두셨습니다.”

“…….”

그를 보좌하려고 같이 들어선 마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라일은 불이라도 본 양 캐리어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벌써 짐을 쌌지.

밤늦게까지 해진에게 입힐 옷을 고심해 두길 다행이었다. 저 낡은 캐리어를 본 순간 라일은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어졌으니까.

***

“다니엘 베르무스 님께서 약속을 잡기 위해 비서실로 연락을 넣으셨습니다.”

“용건은?”

“이번 합병 건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는데, 정확히는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후…….”

숙부는 드디어 미리 약속을 잡아야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듯했다. 세 번이나 경호원에 의해 건물 밖으로 ‘모셔진’ 끝에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제멋대로인 건 여전했다. 숙부는 그의 후견인으로 잠깐 활동했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라일을 어린 조카를 대하듯 편하게 굴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직접 숙부를 끌어내려 한직에 박아 둔 후에도 말이다. 어쩌면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겠지.

“언제 시간이 비지. 최대한 짧게 잡아.”

“오늘 오후에도 잠깐 시간이 비긴 합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그때로 잡고, 경호팀 대기시켜 놔.”

“알겠습니다.”

비서는 바로 들고 있는 태블릿을 조작했다. 밖에 있는 비서팀에게 일정을 하달하기 위해서다. 미간을 한 번 문지른 라일은 다시 서류에 집중하려 했다.

검은 글씨를 볼 때마다 해진 생각이 난다.

“…….”

순간 심장 부근에 강한 통증이 일었다.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실제 흉통이었다. 의아하게 그곳을 한번 바라보았던 라일은 의자에 기대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글씨가 부옇게 흔들거렸다.

“…….”

애써 무시하며 눈썹 위쪽을 슬쩍 문지르는 순간 해진의 낡은 트렁크가 머릿속에 내리꽂혔다.

“……윽.”

라일은 순간적으로 치미는 통증에 잇새로 신음성을 흘리고 말았다. 실제로 머리를 맞았어도 이런 통증을 느끼진 않았으리라. 몸 전체가 쪼개지는 느낌에 그는 허리를 꺾으며 바닥으로 서류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회장님?”

“문 닫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던 비서가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서슬 퍼런 음성에 재빨리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다급하게 달려온 비서가 라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분명 멀쩡하던 회장이었는데 잠깐 뒤돈 사이에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아니.”

굳이 의사를 보지 않아도 라일은 제 두통의 원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익숙하게 감내해 오던 페로몬 체증이 조금 더 가혹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해진이 떠날 준비를 해서, 그랬을 뿐이다.

다시 트렁크의 잔상이 지나가자 라일은 한쪽 이마를 짚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익숙하게 숨기곤 했던 통증이 오늘만큼은 도무지 숨길 수가 없다.

“회장님! 병원 쪽 이목을 가려 두겠습니다, 당장…….”

“저택으로 가지.”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어차피 해진의 페로몬이 충분히 그의 곁에 있다면 해결될 일이었다. 의사에게 가도 처방은 하나일 테니 저택으로 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다.

비록 그가 원하는 만큼 해진이 곁에 있어 주진 않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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