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69화 (69/101)

#69

“저택으로 가면 돼. 오후 일정은 전부 취소하고, 건강 문제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 잘해.”

“……알겠습니다. 바로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나오시기 전 호출해 주세요.”

애써 평정을 가장한 비서가 태연하게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라일은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리며 적어도 외부에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아픔을 참아내려 노력했다.

저택에 가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통증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게 어처구니없을 정도였다.

***

어떤 정신으로 저택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저택에 닿아 해진의 페로몬을 느낀 순간 조금 살 만해졌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건 라일이 만들어 낸 환상에 가까운 잔향이었다. 그래도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움직여 방으로 향했다. 침실로 바로 들어갈 순 있지만, 일부러 녀석의 방과 맞닿은 응접실을 택한다. 조금이라도 더 해진이 이곳에 남긴 자취를 느끼고 싶어서.

그러나 뜻밖에도 응접실에는 해진이 앉아 있었다. 이 시간이면 보통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기에 라일은 종을 울리지 않았다.

“베르무스 씨?”

“……진, 여기 있었군. 아무도 없을 거로 생각해서…….”

종도 종이지만 그가 저택에 돌아왔다는 사실도 미처 알리지 못했다. 비서도 그도 몰려드는 이목부터 처리하기 위해 바빴던 탓이다.

갑작스럽게 마주한 해진을 보며 그는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통증이 심한 상황에서 해진이 그에게 거부감이라도 나타내면, 정말 몸이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페로몬의 잔향이라도 모으려는 추잡한 짓은 그만두고 빠르게 침실로 들어서려는 때였다. 해진이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물은 것은.

“어디 아프십니까?”

“……조금.”

거짓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의 본성에는 이제 해진에게 무언가를 가릴 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각인의 무서움을 새삼 뼈저리게 느끼면서 라일은 녀석의 안색을 살폈다.

의사의 말대로 무언가 이상한 걸 눈치챈 건 아닐까.

“페로몬 체증입니까?”

“그래.”

다행스럽게도 해진은 그간 계속 보아 왔던 증상을 떠올렸다. 두통이 심해지면 예민해지는 라일을 이 저택에서 제일 잘 아는 건 그였기 때문이다.

“페로몬 샤워를 지금 해 드릴까요.”

“……괜찮겠나?”

“네.”

오히려 해진은 저렇게 눈치 보듯 구는 라일의 태도가 이해 가지 않았다. 어차피 몇 시간 뒤면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가. 지금 당장 아파서 저렇게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해야 할 걸 조금 당기는 게 큰 문제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라일은 무언가 큰 잘못이라도 하는 얼굴로 주춤주춤 그의 맞은편 의자로 다가왔다. 가까이 보니 안색이 더욱 엉망이었다. 무심코 이렇게 권할 만큼.

“……이쪽에 누워 계시죠. 어차피 둘 다 앉아 있을 필요는 없는데.”

“…….”

해진이 가리킨 좀 더 가까운 소파는 기다란 모양이었다. 사람 넷은 거뜬히 앉을 만큼.

녀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두통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직 이 세상에서 라일에게만 진하게 느껴지는 페로몬이 걱정을 조금 담고 있어서였다.

라일은 함부로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해진이 걱정하는 대상은 분명 그가 아니리라. 그의 페로몬 체증이 심화하면 위협받을지도 모르는 저 스스로를 걱정할 가능성이 훨씬 컸다. 페로몬은 많은 뉘앙스와 감정을 담지만, 속내를 전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몸이 축난 건 사실이었기에 라일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그저 한 발짝이라도 더 해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욕망껏 해진에게 가까운 쪽으로 머리를 뉘었으나 녀석은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병원은 안 가셔도 되는 겁니까?”

“이미 처방은 받았어.”

“아…….”

이제 보니 테이블 위에는 책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의자가 필요해서 응접실에 나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라일은 거의 본능적으로 무슨 책인지 살폈다. 녀석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다.

그러나 책 제목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부옇게 흐려진 글씨가 꼭 해진의 속내 같았다.

평소라면 능력껏 이성을 챙겼을 텐데 오늘따라 더욱 힘들었다. 진짜로 감정에 휘둘리기라도 하는 듯 각인한 몸이 자꾸만 해진을 향한다.

그래서 라일은 마치 한숨처럼 욕심이 입 밖으로까지 튀어 나가는 걸 제어하지 못했다.

“네 얘기를 해 줘.”

뜻대로 되지 않는 몸 때문에 답답한 속내가 잔뜩 꼬여 진창을 만들었다. 비가 잔뜩 온 정원 같은 바닥이었다. 그곳에서 라일은 질척거리는 걸음을 내디딘다. 어떻게든 해진에게 가까이 가려고.

다만 이성은 자꾸만 제자리에 멈춰 서려고 했다. 본능을 거스르고 이 정도만 하려고. 그건 퍽 추한 모습이었기에 해진이 금방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 또 깨질 듯한 두통이 그를 엄습한다.

결국 라일은 누워서 눈이 부시다는 듯이 한쪽 팔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 행동이 정말 안 좋아 보이긴 했는지 녀석은 그냥 의아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시야가 가려진 덕에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제 얘기를요?”

“그래. 아무거나.”

해진은 늘 객관적으로 주제를 주워섬기는 척했으나 라일은 그 속에 녀석의 기호가 녹아 있음을 면밀하게 파악했다. 겉으로 티 내지는 못해도 그것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런 말들을 할 때면 해진의 페로몬이 살짝 변하곤 했기에 더 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열성에 조절도 미숙한 해진의 페로몬이지만 라일은 그것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기민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전부 각인 탓이다.

“으음…….”

갑자기 대화를 시작하게 된 해진은 조금 곤란하게 시선을 돌렸다. 마침 라일이 팔로 제 얼굴을 가린 덕에 편하게 시선을 돌리기 좋았다.

누워 있는 그의 장신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넉넉하고 큰 소파가 그가 누우니 키에 맞춘 듯이 다 들어찼다. 회사에 갈 때는 늘 빈틈없는 차림인 그는 오늘도 완벽한 외양이었다.

다만 오늘따라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과 초췌한 안색이 눈에 띄었다.

일부러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해진이 이번에는 들고 있던 책에 관심을 기울였다. 무료한 나머지 서재에 가서 아무거나 뽑아 온 것이었다. 서재는 라일이 몇 번이나 가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는 듯 웅장한 모습이었다. 이전에 갔던 곳보다도 훨씬 규모가 방대했다.

하필 뽑아 온 책은 흔한 연애물이었다. 고등학교에서 서로의 운명을 찾아낸 이들이 졸업 파티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그걸 참고 계속 읽은 건 다름이 아니었다. 주인공 중 하나인 교내 최고의 킹카가 꼭 그의 형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늘 그의 우상이었던 자랑스러운 형.

“형은 학교에서 엄청난 유명인사였어요.”

“…….”

라일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가 해진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이 기묘한 대화를 시작한 뒤로 그는 늘 그랬다.

처음에는 그저 해진의 페로몬에 집중하느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분명 해진이 무의식중에 내뱉은 물건들이 새로 생겨나거나 바뀌거나 하지도 않았다.

백 마디 말을 하면 겨우 한 번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할 뿐이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말하는 관심으로 그의 태도를 설명할 수는 없으리라. 그런데도 해진은 그가 제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간 라일의 무관심에 차갑게 아팠던 해진에게는 아이러니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의 그에게 머지않은 미래에 라일이 이토록 그에게 집중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면 분명 믿지 못했을 터다.

“미식축구팀 주장도 하고, 성적도 우수하고. 형을 보면 꼭 하이틴 로맨스물의 주인공 같다고 생각했죠.”

그걸 알면서도 해진은 제 안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데 익숙해지고 말았다. 슬프게도 해진에게는 이제 붙잡고 가족의 추억을 논할 사람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그의 햇살 같은 가족들을 기억해 주는 이가 없다는 게 조금 서글펐다. 누군가는 간혹 친절했던 브라이트 가족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역시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물론 그 대상이 하필 라일이 된 건 역시나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라면 이렇게 해진의 말을 들어 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단순히 가족의 이야기를 할 핑계가 필요해서 이런 합리화까지 하는 걸까. 그저 누군가를 붙잡고 속에 쌓인 추억을 토해내고 싶어서.

“원래라면 저도 여러 차별을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형의 동생이라서 다들 친절하긴 했죠.”

한번 물꼬를 트니 이런저런 말이 나왔다. 이런 제 상태를 보며 해진은 씁쓸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분명 없는 듯 있다가 이 저택을 나가자고 호수를 보며 다짐했는데.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 이 모든 것에는 깊은 의미가 없으리라.

오히려 떠날 곳이니 마음껏 쏟아내도 괜찮다는 생각마저 그를 지배한다. 희미하게 흐르는 라일의 페로몬이 너무 따듯해서 이런 제멋대로의 생각에 면죄부라도 주는 것 같았다.

“형이 제가 인종차별을 받을까 봐 엄청나게 챙겨서, 적어도 앞에서 이상하게 구는 사람은 없었네요.”

오히려 그런 형의 극성 때문에 해진은 깊게 교류할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입양된 직후에는 자신의 존재가 형에게 누가 될까 봐 초등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 뒤로는 그럭저럭 웃으면서 다닐 수 있었으나 여전히 마음이 맞는 친구는 찾지 못했으니 끝내 적응하지 못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체구도 작은 동양인 입양아에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을 해진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과는 다르게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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