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70화 (70/101)

#70

“제가 영 적응을 못 해서 형은 저를 졸업 파티에도 데려갔죠. 자기가 졸업하기 전에 꼭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고.”

그리움을 담은 페로몬이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여태껏 해진이 보여준 것 중 가장 편안하고 밝은 페로몬이었다. 덕분에 라일은 정신이 다 몽롱해지는 부유감을 느껴야 했다.

녀석은 한참이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렇게나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또 처음이라서 라일은 내쉬는 숨조차 조심했다.

얼굴을 가리고 싶어서 팔을 올린 자세가 문득 후회되었다. 눈을 드러내고 있었으면 그래도 해진이 어떤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훔쳐볼 수 있었을 텐데.

“여자친구라도 사귀라면서 억지로 끌고 갔는데, ……생각보다 재밌는 곳이었어요.”

그러나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라일은 몸이 다 뻣뻣하게 굳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해진은 거의 평생을 베타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여자친구라는 소리가 그래서 더욱더 이성적인 뉘앙스로 다가왔다. 그런 단어가 해진의 입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뱃속이 잔뜩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가 위장이 전부 녹아내려 제 속에 생겨난 진창으로 흡수될 것만 같았다.

녀석이 놀라지 않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라일은 몸을 일으켰다. 그토록 원하던 얼굴은 훔쳐보지 못했다. 해진은 갑자기 움직이는 그를 그저 놀란 듯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니.

그런데도 동그랗게 변한 녀석의 눈을 홀린 듯 바라보게 되었다.

“네 첫 키스는 누구였지.”

졸업 파티와 여자친구.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라일도 명확히 잘 알고 있었다. 해진이 동경했다고 말하던 형의 학교생활은 라일의 생활하고도 썩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혈기 왕성한 개새끼들이 넘쳐나는 학교 파티 소리를 듣자 그만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고작 두통이 조금 심하다고 자제심이라는 걸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감히 질투 따위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이 순간 그게 궁금해서 입을 열고 말았다. 그걸 들으면 자제심을 잃은 이 몸뚱이가 어찌 반응할지 알 수 없는데도.

그러나 그의 말에 해진은 한껏 당황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그건…….”

곤란한 듯 아래로 툭 떨어지는 그 시선을 따라 라일의 심장도 툭 떨어졌다. 이를 악문 그는 흙투성이가 된 심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짓밟고 싶었다. 멍청한 행동에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서둘러 수습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쉽지 않았다. 요동치는 페로몬을 겨우겨우 제어해 본다.

“아니, 이 질문은 잊어. 내가 너무 실례되는 질문을 했군.”

“……그게 아니고, 한 번도 안 해 봐서요.”

그러나 눈가를 찡그린 해진이 대답한 건 예상 이상의 답변이었다.

“……한 번도?”

“하필 제 졸업 파티 직전에 발현해서, 정작 제 파티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거예요.”

저번에 와인이 아니라 술 자체를 처음 먹는다고 했을 때 놀라움을 표현했던 라일이었다. 그래서 해진은 이번 질문도 그런 놀라움의 연장선이라고 여겼다.

형의 노력에도 여자친구는커녕 친구조차 제대로 사귀지 못했던 해진이었다. 애초에 친구라는 건 그런 식의 과보호로 생겨나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체구가 작은 편인 해진은 베타 여성에게는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괜히 변명이라도 하듯 말하고 나니 부끄러움이 뒤늦게 밀려왔다. 키스도 한 번 못 해 본 게 부끄러웠던 건지 괜한 변명이 부끄러운 건지 헷갈린다.

어쨌든 해진은 팩 고개를 돌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애썼다. 평소라면 그냥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라일이 형과 똑같은 말을 하는 바람에 욱하고 말았다.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갑작스러운 발현 때문에 일생에서 한 번뿐인 졸업 파티를 가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가족들은 많은 위로를 해 주려고 애썼다.

사고가 난 날의 외식도 그 위로의 연장선이었다.

“…….”

해진의 오해와는 다르게 라일이 그걸 재차 물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분명 해진이 약에 당해 겪었던 히트 사이클 때, 그들은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번도 경험이 없다니.

반사적으로 라일은 제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험한 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로 총으로 제 머리를 쏴야 이렇게 멍청하게 굴기를 그만둘 건지 의아했다.

아무래도 해진은 히트 사이클 때의 기억이 별로 없는 듯했다. 녀석의 페로몬에 취한 자신이 얼마나 짐승같이 녀석의 모든 곳에 입을 맞췄는지 라일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거다.

아니, 기억은 해도 저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건 녀석에게 낭만적인 키스 따위가 아니었을 테니 얼마든지 없는 일로 할 수 있다.

불쑥 튀어 오르는 가정에 라일은 피 대신 싸늘한 비가 몸에 흐르는 감각을 느꼈다. 아까 통증이 있던 가슴 부근에서는 재차 통증이 일었다. 그 욱신거리는 감각을 내버려 둔 라일은 계속 입을 가린 채 뻣뻣하게 굳어 있어야 했다.

그래. 녀석에게 그건 기억하고 있든 말든 전부 상관없는 일이리라.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한 경험이었을 테니.

“그렇군.”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그는 한참 뒤에나 겨우 덤덤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

긍정적인 페로몬이 효과적이라는 의사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어제 그렇게 제 목을 조르고 싶은 대화를 했는데도 몸 상태가 퍽 괜찮아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라일은 오전을 무리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어제 오후 일정이 통째로 사라진 덕에 밀린 일이 산적해 있었다. 비서실에서는 회장이 갑자기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사라진 일에 대해 의아해하는 눈초리였으나 적당히 무마해 두었다.

다만 하필 어제 그렇게 통증을 느끼기 직전에 다니엘 숙부와 약속을 잡아 둔 건 실책이었다. 라일은 어설프게 무언가를 변명하는 대신 그냥 빠르게 다시 일정을 잡는 걸 택했다. 귀찮게 그의 상태에 대해 냄새를 맡으면 곤란해진다.

통보에 가까운 연락에도 라일을 보러 와야 했던 다니엘 베르무스는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크흠. 어제는 왜 그렇게 갑자기 약속을 취소한 게냐.”

“더 중요한 일이 생겼을 뿐입니다. 자료는 준비해 오셨습니까?”

뭔가 낌새를 읽으려는 듯 눈치를 살피는 숙부를 그는 덤덤히 마주 보았다. 저렇게 탐색하는 눈으로 본다 한들 그의 상태를 짐작할 순 없으리라. 일단 겉보기에 라일은 늘 한결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실속 없는 실랑이를 한 끝에야 다니엘 숙부는 돌아갔다. 대체 언제 적 영광을 저리 못 잊고 설쳐 대는 건지 라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다니엘이 생각하는 ‘영광’이란 결국 그의 아버지가 죽으며 잽싸게 가로챈 것이 아니던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그가 씩씩대며 집무실을 나가는 걸 라일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조만간 베르무스의 성씨 하나 믿고 덤비는 이들은 전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안 그래도 해진의 일로 머리가 정신없는데 거슬리는 정도가 지나치다.

“후…….”

앉아 있던 소파에 길게 기대니 환한 조명을 켜 둔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라일은 빛나는 것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해진을 떠올렸다. 호수 표면의 반짝이는 파란이 녀석의 얼굴에서 일렁이던 순간이 자꾸 떠오른다.

출근 직후부터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어느덧 오후 시간이었다. 연말이 다가와서 온갖 결산 문제가 다 올라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야근을 하더라도 일을 처리했을 라일은 고민에 빠졌다.

저택에 돌아가고 싶어서.

다시 깨질 듯한 두통이 그를 엄습했다. 다니엘 숙부 앞에서는 아슬아슬하게 모면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에게 이런 고질적인 건강 문제가 있다는 건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니까.

잠깐 고개를 숙인 채 제 안의 통증을 다스리던 라일이 이내 마음을 굳혔다. 아무래도 오늘도 일찍 저택에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어제처럼 갑작스럽게 외부로 고통을 표출할 만한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말이다. 어디까지나 예방 차원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변명을 주워섬기면서 라일은 애써 외면했다. 그저, 해진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자신이 이리도 서두른다는 걸.

***

“윽…….”

“브라이트 씨. 처음부터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

해진은 안뜰에 마련된 작은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길을 깔았는지 발에 채는 것 하나 없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길이었다.

의사는 깁스를 풀었으니 이제 재활 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거창하게 할 건 없고 그저 조심스럽게 산책을 주기적으로 하라고 했다. 저택 건물 안이라도 걸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해진에게 마크가 이런 곳이 있다며 알려주었다.

마치 그가 이런 재활 운동이 필요할 걸 알고 만들어 두기라도 한 것 같은 길이었다. 안뜰을 여러 번 다녀갔는데 이런 곳이 있었나 생각하던 해진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지금 저택 내외부가 온통 번잡했다. 공사를 하는 김에 이런 길을 하나 더 만든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그렇게 한참 한 손에는 목발을 들고 걷는데 앞에서 구둣발 소리가 났다.

“도련님이 오셨군요.”

라일은 저택으로 돌아오는 동안 미리 연락을 주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돌아온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해진은 그 소식을 알려주는 마크에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가 집에 돌아오는 걸 이렇게 매번 저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은 의연하게 삼켜냈다. 매일 저녁 응접실에서 만나고 있으니 알아 두라는 차원인가 싶기도 했고.

안 그래도 발을 제대로 디디는 게 힘에 부쳐서 해진은 가만히 선 채로 다가오는 라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서두르는 걸음걸이로 곧장 해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