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온 건지 라일은 슈트 차림이었다. 역시 무언가 급한 용건이라도 있는 듯했다. 어제처럼 별로 좋지 않은 그의 안색에 해진의 시선이 잠깐 머무른다.
이상하게 그가 다가오는 모습이 느릿하게 보였다. 오늘따라 오후의 햇살이 따사로운 날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성급한 걸음을 따라 일렁이는 라일의 금발은 유난히 해를 잘 반사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바로 앞으로 다가온 라일과 눈을 마주하면서, 해진은 문득 그의 푸른 두 눈이 겨울 호수 같다는 감상을 받았다.
“진. 산책 중이었나.”
“네.”
“……그렇군.”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라일은 어딘가 낭패 어린 얼굴로 슬쩍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게 꼭 할 말도 준비하지 않고 서둘러 뛰어왔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일단 해진부터 보러 왔다는 것처럼.
그저 어려운 용건을 말하기 위한 망설임일 수도 있는데 묘한 감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순간 그의 페로몬이 미약하게 피부로 느껴졌다.
정말 급한 용건이 있어서 온 게 아니었나?
“진, 점심 식사는 어땠는지…….”
머뭇거리던 라일이 한참 뒤에나 내뱉은 건 정말이지 어이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슬쩍슬쩍 드러나는 페로몬에는 퍽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점심 식사 따위를 물으면서 어찌 저런 감정을 흘릴 수 있는 걸까.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그의 페로몬이었다. 숲 한가운데 와 있는 것 같은 감상을 주는 그의 감정은 자상하고 또 따듯했다.
어제 형 이야기를 한참이나 한 탓에 해진이 마음에 채워 둔 빗장은 헐거워진 상태였다. 꽁꽁 싸매고 있는 것보다는 툭툭 풀어내는 게 더 편하다는 걸 어렴풋하게 깨닫기도 했다.
바람을 따라 살랑이는 금실 같은 라일의 머리칼로 시선이 못 박혔다. 깎아 만든 듯한 그의 유려한 콧대나 깊은 눈매에도, 절뚝이는 제 다리처럼 더듬더듬 시선이 흘러갔다. 저렇게 완벽한 얼굴을 라일은 곤란하게 찡그리고 있었다. 해진의 반응이 못내 긴장된다는 듯이.
덕분에 해진은 안에 꼭꼭 숨겨 두었던 원망 하나가 툭 튀어 나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의 페로몬이 한겨울 공기를 뚫고 자상하게 피부를 파고들수록 더 그랬다.
“당신은 아직도 내 이름 부르기가 귀찮은가 봐.”
그렇게 자상한 얼굴을 하면서도, 왜 아직도.
“뭐……?”
녀석의 이상한 말에 라일은 눈을 크게 떴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해진이 있는 곳을 듣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일단 뛰어왔다. 그냥 절로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그런데 너무나 뜬금없는 말에 핑계를 댈 틈도 없이 속내가 비죽 솟아올랐다.
녀석의 이름이 부르기 귀찮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익숙하게 식은땀이 났다. 겨울바람이 휑하니 그의 등만 매만지고 가기라도 하는 듯 싸늘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녀석이 또 무슨 오해를 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때, 필사적으로 원인을 찾는 그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아프게 스쳐 지나갔다.
‘귀찮은 이름이군. 그냥 진으로 부르지.’
아, 오해 따위가 아니었구나.
그가 도착하자마자 자리를 피해 준 집사 덕에 두 사람은 단둘이 마주할 수 있었다. 오로지 해진 하나를 위해 만들어 둔 정원의 산책로 위에서, 겨울바람 같은 자신의 무심한 말이 마치 어제 일처럼 귓가에 들려온다.
라일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여야 했다. 숨을 지나치게 크게 들이켠 탓이다. 숨결을 따라 해진의 페로몬이 몸 안에 사정없이 침투했다.
가슴에서는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무척이나 격정적인 그 감정은 그의 갈비뼈를 하나하나 부러트릴 듯 거칠게 속을 헤집었다.
대체 자신은 왜 이따위 호칭을 줄곧 당연하게 부르고 있었던가. 그가 진이라고 부를 때마다 녀석이 매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불쑥 원망 서린 말을 툭 꺼내 놓을 때까지 얼마나 꾹꾹 내리누르고 있었을까.
그걸 알아차린 순간 그는 계속 범람하는 감정을 더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건 시작부터 어긋난 관계였다. 그가 아무리 과거의 과오를 지워 내려고 애써도 영원히 이 간극을 좁힐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정작 왜 녀석에게 다가가고 싶은지조차 숨기기 급급한 자신에겐 자격이 없었다.
다시 시작하려면 꼭 해야 하는 걸, 잊고 있었으니까.
이미 늦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좌절이 거대한 족쇄처럼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땅을 파고들 것처럼 라일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짐승이 잔뜩 웅크리듯 고개를 숙이니 이마에 해진의 어깨가 닿았다.
이렇게 맑은 날에도 비 내음을 품은 해진의 페로몬이 그를 감쌌다.
“미안해.”
“…….”
“내가, 미안해.”
해진은 가만히 어깨에 닿는 감촉을 관찰했다. 뜻밖의 상황이지만 그는 습윤한 느낌이 나는 어깨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깨에 간신히 닿은 라일의 이마는 놀라울 정도로 무게감이 없었다. 제 양팔을 쥐고 있는 그의 두 손은 힘을 거의 주지 않아 부드러웠다. 형편없이 계속 떨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전혀 제어하지 못한 라일의 페로몬이 해진을 잔뜩 둘러쌌다.
무저갱처럼 깊은 좌절과 사죄를 담은 페로몬은 해진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비를 맞으며 향했던 저택 뒤편의 숲이 생각났다. 결국 닿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아마 그곳에 도착했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가만히 그 모든 것에 감싸인 채로 해진은 눈을 감았다. 입 밖으로 원망이 튀어 나가자마자 경솔한 행동을 후회했다. 계속 흔적 없이 꼭꼭 움켜쥔 채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던가. 조금 흔들렸던 마음의 빗장을 다시 단호하게 점검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은 결과 아니던가.
조금 얼떨떨했으나 해진은 섣불리 그를 다독이지 않았다. 라일이 대신 지탱해 준 덕에 어느새 목발을 놓아 버린 두 팔은 슬며시 늘어진 그대로였다.
대신 해진은 계속해서 잘게 떨고 있는 그에게 덤덤히 말해 줄 뿐이었다.
“가족이 남겨 준 건 이제 제 이름밖에 없으니, 제대로 불러 주세요.”
사용인들이 그를 브라이트라고 부르는 게, 해진은 좋았다. 이제 이 도시에 브라이트는 그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친밀하게 다가오는 이들에게 굳이 해진이라는 이름을 불러 달라고 정정하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
그래도 한 명쯤은 가족들이 직접 지어 준 ‘해진’이라는 이름을 불러 주어도 될 듯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 라일의 페로몬이 거세게 요동쳤다. 제 어깨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일의 몸은 석상처럼 굳었는데도 말이다.
마치 자신이 하는 말 하나가 그에게 이토록 큰 의미가 있다는 것처럼 느껴져 신기했다. 매번 응접실에 앉아 그의 모든 말을 귀담아들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니 다른 이도 아닌 라일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면 좋겠다.
“……그래. 그럴게.”
한숨 같은 대답을 겨우 뱉은 라일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해진을 부여잡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
“후…….”
낯부끄러운 짓을 하고 말았다. 제 침실에 누운 라일은 오후에 있던 일을 그렇게 평가했다.
해진은 퍽 어색하게도 그에게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가까스로 제 방으로 돌아온 라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한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두통도 이런 그가 못났다는 듯 잠깐 물러난 채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 와중에 저에게 원망을 쏟아내던 해진이 편한 말투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염치도 없이 들떴다. 언젠가 딱 한 번 들었던 이름이 불리기라도 한 것처럼.
‘라일.’
이런 스스로가 너무 어리숙해 보여서 라일은 연거푸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습관적으로 각인 핑계를 대려던 그는 나쁜 짓이라도 한 양 입을 가렸다.
“…….”
홀로 어두운 방에 누운 뒤에야 머리가 조금 돌아간다. 일단 라일은 끝도 없이 자라나는 제 욕심을 다독였다. 무작정 해진을 붙잡기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다만 부드럽게 흘러나오던 비 내음을 떠올리면 심장이 마구 뛰었다. 아픔이 대부분이지만 그 맥동은 부드럽게 라일의 온몸을 진동시켰다. 생각해 보면 해진이 그에게 두려움을 품지 않게 된 지도 조금 되지 않았던가.
그를 아프게 만든 트렁크의 잔상은 여전했으나 남은 시간 동안 무언가 변화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어떻게든 조금 더 해진을 향해 다가가고 싶었다. 이 순간 라일은 변명 따윈 집어치운 채 솔직히 떠올렸다. 그러면 언젠가는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 또한 깨달을 수 있겠지.
그런데 녀석의 낡은 트렁크를 무심코 떠올리고 보니 한 가지 자연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해진의 짐은 왜 그렇게 적지?
진작 떠올렸어야 하는 의문이었다. 녀석이 떠날 거라는 사실에만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의문을 빼먹고 말았다.
아무리 라일이 주는 것들을 제 것이라 여기지 않는 건 알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해진이 가지고 있는 짐은 무척 적었다. 가족들이 소유하던 집 자체는 병원비 마련에 썼다 한들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이 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곰곰이 기억을 뒤져 보니 녀석이 맨 처음 이 저택에 들어올 때도 달랑 그 트렁크 하나만을 가지고 왔던 것이 생각났다. 요즘 들어 점점 과거에 해진과 있었던 기억이 선명해졌으나 라일은 큰 의문을 품지 못했다.
혹시 가족들의 물건을 따로 보관하는 곳이 있던가. 녀석의 재산 기록에 마땅히 빌린 창고 같은 건 없던 것 같았는데.
의아한 흔적들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원인까지 생각이 흘러 들어갔다. 애초에 해진이 이 괴로운 저택에 오게 된 최초의 원인이.
녀석을 불행하게 만든 그 사고는, 어떻게 처리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