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72화 (72/101)

#72

“…….”

사고가 있다면 그걸 일으킨 가해자가 있는 법이다. 라일이 지금 심혈을 기울여 죗값을 치르게 하고 있는 이전 사용인들처럼 말이다.

왜 녀석은 병원비조차 보상받지 못한 채 그렇게 절박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지?

벌떡 몸을 일으킨 라일은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의문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지금껏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으니 애써 회피해 오던 것들이었다.

새삼스럽게 해진의 파일에 담긴 내용을 반추하던 그는,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

낮엔 그렇게 맑더니, 그새 변덕을 부린 날씨가 구름 낀 밤하늘을 만들어 내었다. 달이 보고 싶어서 창가에 앉았던 해진은 아쉬운 대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점점 깊어지는 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못 하던 운동을 했는데도 퍽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상쾌한 기분 때문에 눈이 감기지 않는 거라서 해진은 그냥 이 밤을 흘려보내기로 했다. 불면증 같은 게 온 건 아니니까 말이다.

다만 분명 구름만 쳐다봤는데 어깨를 적시던 라일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조금 어색하고 얼떨떨한 기분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분명 뭔가 사과를 바라고 뱉은 원망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퍽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말았다.

일단 나쁜 기분은 아닌 것 같다. 한때는 라일이 사과를 해도 화가 날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더랬다. 그 예상과는 정반대의 무언가 홀가분하기까지 한 감정이 들어서 이상하다.

그래서 해진은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 다짐은 이리도 편리했다. 다만 어깨를 움직이자 옷을 갈아입었는데도 아직 한쪽이 젖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잠들면 며칠이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정작 잠은 계속 오지 않았다.

다시 하염없이 흘러가기만 하는 구름을 보면서 해진은 몸을 조금 움츠렸다. 창가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조금 쌀쌀했다.

이제 곧 올해도 다 지나가 버릴 것이다. 수그러드는 올 한 해를 떠올리면서 해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이 저택을 나갈 즈음엔 겨울도 끝자락이겠지.

***

다음 날 아침, 여느 때보다도 더 일찍 일어난 라일은 응접실을 서성였다.

어제는 그렇게 사과만 하염없이 되풀이하다 들어오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이름을 고쳐 부르지 못했다. 앞으로 행여 실수로라도 그러지 않기 위해 밤새 해진의 이름을 제대로 되뇄다. 그러자 그는 그 단어가 입술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오는 순간을 도무지 가만히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고작 이름을 고쳐 부르는 게 뭐 이리 큰일이라고 아침부터 옷까지 완벽하게 빼입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해진에게는 진작부터 일어났어야 하는 평범한 일일 텐데 말이다. 그러니 자신도 이렇게 큰 의미를 두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나무라면서도 계속 성마르게 녀석의 침실 쪽 인기척을 살핀다.

녀석의 과거를 다시 되짚어 가면서 라일은 묘한 기분에 시달렸다. 어제 쏟아낸 감정이 이리도 오래 영향을 미치는 걸까. 이상하게 해진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 생기를 되찾으며 머릿속에 떠올랐다.

퍽 기이한 심정으로 제 머릿속을 헤집던 라일이 어느 순간 번쩍 고개를 들었다. 침실 안쪽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 응접실까지 넘실대던 해진의 페로몬도 순간 미약하게 일렁였다.

홀린 듯이 녀석의 침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종을 울리는 손길은 성급하기만 했다. 녀석이 일어나서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는데, 더는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안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라일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고작 문 하나를 열었을 뿐인데 해진의 페로몬이 잔뜩 그를 덮쳤다. 꼭 산소 대신 비를 호흡하기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막 일어났는지 해진은 어딘가 멍한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저녁부터 시작된 흐린 하늘은 오늘도 여전했다. 아직 어둑어둑한 녀석의 방 안쪽이 못마땅해서 불을 켜도 되는지 고민에 빠졌다.

빤히 이쪽을 향하는 시선을 느끼면서 라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녀석을 부른다.

“해진.”

분명 불을 켜도 되는지 이어서 물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라일은 그 한마디만을 던져 놓고 그 자리에서 단단히 굳어 버렸다.

미미한 호선을 그린 해진의 입가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 그보다는 조금 더 휘어진 두 눈이 시야에 박힌 건 그다음이었다.

어둡다고만 생각했던 방 안이 더는 어둡지 않았다. 라일은 녀석의 찬란한 미소를 보며 또 멍청하게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깨달음의 순간이 라일을 뒤흔들었다. 왜 그는 이렇게 성마른 각인을 해 버렸을까. 의사는 왜 각인이 감정과 페로몬의 결합이라고 했을까.

해진의 웃는 얼굴을 보며 라일을 드디어 그 해답을 찾았다. 오래도록 녀석의 마른 몸이 그렇게나 신경 쓰였던 그 이유가.

각인 따위가 없었어도 그는 해진에게 마음을 품었을 터였다. 페로몬 따위가 저를 흔들지 않았어도 라일은 반드시 해진에게 다가가 그 손을 잡았으리라.

페로몬은 반 박자 빠르다.

이 모든 게 다 그저 시간문제였음을, 라일은 완벽하게 깨달았다.

<챕터 9>

그는 참 비겁했다.

의사에게 각인이 되는 원인을 직접 들었음에도 그간 라일은 감정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그것을 정의하려 애썼다. 어떨 땐 그럴 리 없다며 회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끝까지 페로몬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온몸의 세포가 녀석의 눈 깜빡임 하나에까지 집중하는 이유가, 단지 그것 때문이라고.

의사의 말은 정답이었다. 각인은 결국 감정이 결합한 결과였다. 그것도 상대를 깊이 애정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처음으로 해진이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았다. 그걸 바라보고 나서야 라일은 자신이 각인 따위를 하지 않았어도 녀석에게 반했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매번 보지도 못했던 그 미소를 환영처럼 꿈에서 찾아 헤맨 이유가 여기 있었다.

자신이 때 이른 각인을 한 건 아마 여러 이유가 있을 터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도 무지하고 오만했기 때문이리라. 그대로라면 해진을 영영 놓쳐 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녀석을 기껏 옆에 두고는 멍청한 짓만 반복했으니까.

본능은 이미 알아차린 걸 쓸데없이 굳어 있던 이성만 몰랐다. 그래서 선택지가 없었나 보다. 억지로라도 녀석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몸이 먼저 움직였던가.

모든 각인이 이렇게 기묘한 순서로 이루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라일은 이 각인이 해진을 잡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건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라일은 늘 형질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라 생각하며 자라났다. 모든 것을 타고났으니 그 어떤 것도 제 두 손으로 못 이룰 것도 없다고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유독 해진에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페로몬의 핑계가 잦았다. 다른 부분에서는 알파인 자신을 무시하면서 정작 해진에게 몸이 향할 땐 전부 알파인 탓으로만 치부하지 않았던가. 제 안에 자리 잡은 이 거대한 모순을 라일은 드디어 깨닫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비겁했다.

이제 라일은 어머니가 왜 그리도 아버지에게 각인하길 갈구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각인이 페로몬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증거라고는 어릴 적부터 생각했다. 그러나 사고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각인하고 나서야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이건 자신이 상대를 사랑한다고 내보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늦은 밤까지 저택의 서재에 앉아 이 충격을 반추하던 라일은 또 시작된 고통 때문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번 고통은 유독 길고 집요했다. 결국 명치에서부터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솟아나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제 입을 막았던 라일은 손바닥에 묻은 붉은 피를 발견했다.

“…….”

페로몬 해소를 제대로 한 지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해진이 잠깐 이 저택을 떠나 있을 때도 이 정도 기간은 버텨 냈던 라일이다. 그런데 피를 토하다니, 이전과는 확실히 무언가가 다르다.

아마 각인을 하고도 줄곧 멍청하게 군 대가겠지.

방금 피를 토한 사람답지 않게 라일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수건을 들어 흔적을 지워 나갔다. 물론 아팠다. 가까스로 허리를 펴고 앉아 있을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해진에게 이걸 숨겨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자신이 안 그래도 불안정한 해진의 다리에 또 다른 족쇄가 될 수는 없으니.

***

올해의 첫눈이 내렸다.

매번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것만 보다가 하얗게 물든 밖을 보니 생경하다. 이 도시는 겨울이 짧아서 눈이 무척 귀했다. 덕분에 해진은 온종일 창밖만 봐도 질리지 않았다.

“어느 쪽이 더 좋으십니까. 브라이트 씨.”

“둘 다 괜찮아요.”

마크가 손에 크리스마스 장신구 두 개를 들고 그의 의향을 물었다. 응접실에 트리를 꾸밀 거라고 했다. 한 손에는 커다란 별이, 다른 한 손에는 생뚱맞게 노란 오리가 들려 있었다.

해진은 최대한 정중하게 거리를 두고자 애썼으나 쉽지 않았다. 그가 얼굴을 굳히면 굳힐수록 사용인들은 멀어지는 게 아니라 더 다가오려고 노력해 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마음 한편에 자꾸만 죄책감이 쌓여 간다. 그때마다 곧 이 저택만 떠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위안하는 게 전부였다.

곧 크리스마스였다. 날짜를 매일 헤아리는 중이라 알고는 있었으나 저택 분위기가 들뜨는 게 눈에 보이니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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