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으음. 역시 전통을 따르면 별이겠지만, 저는 이 귀여운 오리가 더 좋군요.”
“……귀엽네요.”
애들 목욕 때나 쓰는 작은 오리는 정말 크리스마스트리에는 끔찍이도 안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귀여운 건 사실이라서 해진은 저도 모르게 감상을 슬쩍 내비치고 말았다. 사실 그는 크리스마스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보육원에 있을 적엔 싫어하는 날이었다. 일 년 중 물건과 사람이 가장 풍족해지는 날이었으나 그만큼 허무한 날이기도 했다. 보육원을 찾은 사람들은 이내 자기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산더미 같은 공허한 선물 사이에서 해진은 매년 부모님을 선물로 달라고 산타에게 빌었다.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기에 그는 보육원에서 가장 먼저 산타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아이였다.
그 생각을 바꿔 준 건 역시 어머니였다. 매년 트리 가장 위의 큰 별을 다는 건 해진의 몫이었다. 형은 의젓하게 그 역할을 하나뿐인 동생에게 양보해 주었다.
그가 오래도록 산타에게 빌었기에 천사 같은 가족들이 생긴 게 아니었을까.
“…….”
이렇게 따듯한 방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보육원으로 돌아간 기분이 이따금 들었다.
“해진.”
그러나 이 울적함은 금방 도망쳐 버렸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버틸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라일을 해진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마주했다. 무표정하게 있고 싶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라일이 한층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일 아침을 같이 먹었다. 해진이 오후 늦게 산책을 하면 일찍 돌아온 라일이 곁에서 같이 걸었다. 그러다가 저녁에는 한 시간가량 이 응접실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그때마다 페로몬 샤워를 위해 감정을 조금 내비쳐야 하는 해진이었다. 이래저래 그와의 거리가 그 걸음걸이처럼 성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함께 산책할 때는 그렇게 천천히 걷는 라일인데 말이다.
“오너먼트를 고르고 있었군.”
“도련님은 어느 쪽이 좋으십니까.”
“음. 난 정통파이긴 한데, 오리도 나쁘진 않아.”
“그럼 이번엔 둘 다 걸어 보죠.”
분명히 이 시기의 라일은 저택에 안 들어오는 날이 더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상했다. 연말이라 빠듯한 시간을 쪼개어 페로몬 해소만 한 뒤 휙 도로 나가 버리는 날도 왕왕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 번도 그런 연말을 보낸 적 없다는 듯이, 오늘도 일찍 돌아왔다. 진지하게 손바닥보다 작은 노란 오리를 내려다보는 라일의 얼굴을 해진은 곤혹스럽게 쳐다보았다. 끔찍하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여기 또 있지 않은가.
“왜 그러지, 해진.”
저 파란 눈이 언제부터 저렇게 따스한 온도를 담고 있었지.
“……아닙니다.”
괜히 목덜미를 쓸어내리면서 해진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엊그제 마크가 다듬어 준 덕에 까슬한 머리카락이 손등에 닿았다. 미루고 미루다가 마크가 먼저 제안했을 때 못 이기는 척 부탁해 버렸다.
매일 조금씩 후퇴하는 다짐이 퍽 한심하다. 그러나 이 온기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이따금 너무 불쑥 그를 지배해서 곤란했다.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필요한 건 없나.”
덩달아 침묵하던 라일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간 이렇게 직접 뭔가를 물어본 적은 없어서 해진은 놀라 그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또 뜻 모를 온기로 가득한 두 눈이 똑바로 해진을 향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크리스마스잖아. 작은 물건이라도 괜찮으니, 하나 선물할 수 있게 해 줘.”
고작 선물 하나를 하면서도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라일이 이상하면서도 익숙했다. 당황스러움에 자꾸 귓가로 열이 몰린다. 괜히 머리를 일찍 잘랐다고 해진은 후회했다.
“그럼 목도리를 하나 주세요.”
굳이 목도리를 말한 건 역시나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언젠가 라일이 직접 그에게 둘러 주었던 따스한 목도리가 문득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그래. 해진 네게 잘 어울리는 걸로 찾아볼게.”
“…….”
티 나지 않도록 입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아서.
해진, 하고 부르는 라일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엉겨 붙는 느낌이 들었다.
***
“내용이 많지는 않군.”
“네. 초반 조사 결과와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그 이상의 자료는 자원을 더 투입해야 합니다.”
해진의 신상 명세가 담긴 파일을 읽으며 라일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서류에는 녀석의 비극이 단 몇 줄로 정리되어 있었다.
음주 운전하던 트럭에 의한 추돌 사고. 탑승자 네 명 중 현장에서 한 명 사망, 두 명 중태. 유일하게 의식이 남아 있던 해진은 다리가 차 문 사이에 끼는 큰 부상.
예전에는 휙 지나가 버렸던 그 몇 줄을 라일은 읽고 또 읽었다. 얼핏 봐도 책임소재가 명확한 사건이었다. 그 사고가 일어났던 날짜를 신중하게 읽던 라일은 문득 미심쩍은 부분을 하나 발견했다.
역시 해진이 금전적으로 몰린 채 그의 저택으로 온 것이 너무 이르지 않나.
분명 마땅한 사고 보상금이 지급되었어야 했다. 특히나 해진은 가족들이 지내던 집마저 병원비를 위해 매각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병원비가 막대하다고 한들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자금이 수중에 있었으리라.
미심쩍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니 또 석연치 않은 사실이 보였다. 본래 라일이 예상한 시점보다 집을 매각한 타이밍도 조금 빨랐다. 그렇게나 빨리 목돈이 필요했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래저래 자금 상황이 몰릴 대로 몰려 라일의 손을 잡기까지의 기간이 퍽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예상대로 정말 사고 보상금을 전혀 받지 못한 걸까.
“해진이 당한 사고의 조사기록서가 필요해. 당시 재판과 관련한 사항까지 전부.”
“구해 보겠습니다. 법률 기록이라 시간이 좀 걸립니다.”
형사 사건에 대한 조사기록서는 본래 타인이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해진에게 직접 묻는 방법도 있었으나 라일이 진짜 알고 싶은 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정보들이었다. 가령 만약 해당 사건이 대충 무마되었다면, 누가 입김을 넣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보통은 불가능한 일을 지시받았음에도 비서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품에 들고 있던 것들을 라일의 앞에 하나씩 펼쳐 두었다.
“그리고 말씀하신 카탈로그입니다.”
카탈로그에는 수많은 목도리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그를 위해 온갖 명품 브랜드에서 직접 제작한 것들이었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해진이 처음으로 필요한 물건을 알려주었다. 매번 퍼스널 쇼퍼에게 저택의 옷가지를 알아서 채우도록 지시하고 있었으나 이번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직접 제 눈으로 해진의 목을 차지할 목도리를 고르고 싶었다.
다만 가격 따위는 적혀 있지 않은 카탈로그들을 내려다보며 라일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녀석의 검은 머리칼에는 뭐든 어울릴 것 같아서 큰일이다.
***
크리스마스 당일이 다가왔다. 아침부터 저택에는 은은한 캐럴이 흐르고 있었다. 본래라면 조용한 침묵만 흐르는 저택이 덕분에 통째로 들썩이는 기분마저 느껴진다.
뜬금없는 캐럴 소리에 해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깨어났다. 겨울답게 한껏 깊어진 추위 때문인지 이상하게 이불 속에서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다. 난방은 늘 최적 온도에 맞춰 두었을 텐데도 오늘따라 몸에 닿는 공기가 싸늘했다.
의욕이 없어 멍한 얼굴로 한참 침대에 있는데 종소리가 울렸다. 그의 대답을 듣고 들어온 마크는 특유의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브라이트 씨.”
“……메리 크리스마스.”
막 깨어나서 그런지 이상하게 목이 잠기는 기분이 든다.
“크리스마스 만찬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씻고 나오시겠습니까?”
“네.”
머리에는 우스꽝스러운 순록 머리띠를 한 그에게 해진은 한참이나 할 말을 골랐다. 시선이 제 머리 위에 닿는 걸 느낀 마크가 기대 서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어서 더욱 부담스러웠다.
“……멋진 머리띠네요.”
“하나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부디 제 대답이 무례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으로 해진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마크는 일부러 놀린 모양이었는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굴만 곤혹스럽게 찡그리자 마크는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방을 나섰다.
그 유쾌한 뒷모습을 보니 늘 장난기가 많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러나 오늘은 가족들을 떠올리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해진은 일부러 생각을 밀어내었다. 만찬도 솔직히 가고 싶지 않은데 거절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큰일이었다.
가까스로 미적거리다가 옷을 입고 응접실로 돌아가니 라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보다 몇 배나 오랜 시간을 끌었는데도 당연하다는 듯 그를 두고 식사하러 가지 않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해진.”
“……메리 크리스마스.”
씻는 동안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다시 목이 조금 멨다. 괜스레 시선을 피하면서 해진은 어색함에 초조하게 응접실 내부나 둘러봐야 했다.
응접실은 어제보다도 더 화려한 모습이었다. 그가 한사코 같이 꾸미는 걸 거절했던 트리는 완성되어 한쪽 구석에 웅장하게 서 있었다. 트리를 중심으로 방을 한 바퀴 두른 장식들이 일정한 리듬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는 포장지를 균일하게 맞춰서 장식처럼 보이는 선물 꾸러미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라일의 손에는 선물 꾸러미가 하나 들려 있었다. 유일하게 다른 포장지로 감싸인 것이었다. 그제야 해진은 자신이 목도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왜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