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다시 목적지 근처의 숙소를 검색하던 해진은 이 일을 라일과 의논하는 게 좋을지 고민에 잠겼다. 보상 문제도 정리하긴 해야 했다. 사실 그는 그 보상을 받을 생각이 없으므로 핑계를 대고 날짜를 더 미룰 작정이었다.
“…….”
그러나 이내 해진은 일단 저택을 나간 뒤로 이 고민을 미뤘다. 섣불리 의논하는 것도 보류한다.
그래도 혹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차는 예약해 달라고 해야겠네.”
나가는 날 필요한 차편은 마크에게 부탁하긴 해야겠다. 혼자 할 수 있으면 좋을 테지만 어차피 이 저택의 바깥까지 사유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이니 저택의 차를 빌릴 필요는 없겠지.
***
“……뭐?”
갑작스러운 전언에 라일은 반사적으로 달력을 쳐다보았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눈으로 그걸 다시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 보니 일시적인 외출도 아니신 것 같던데, 브라이트 씨가 계속 이곳에 머무르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해진의 거처가 앞으로도 이곳일 거로 생각하던 마크였다. 물론 계약 이야기는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라일의 행동을 보면 전혀 끝을 준비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래서 둘 사이에는 무언가 진전이 있지 않은가 여기고 있던 차였다.
“……일단, 일단, 나중에…….”
“네. 도련님.”
걱정스럽게 저를 쳐다보는 마크가 있었음에도 라일은 서재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계약이 끝나는 날, 해진이 나가는 차편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것도 저택의 차는 이용하지 않을 작정이라 했다.
아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작 이런 걸로 녀석이 저를 용서할 거로 생각하진 않았어도 그래도 그 마음에 비집고 들어갈 틈은 반드시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해진은 계약이 끝나는 날을 천천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홀로.
사실 그간 라일이 한 짓을 생각하면 해진의 반응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라는 점이 가장 문제였다. 제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 꼴을 보던 마크가 보다 못해 자리를 피해 줄 때까지 라일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민에 잠겼다.
이대로 보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각인은 차치하고서라도 마음을 깨달은 이 순간 녀석이 멀어지는 걸 견딜 수가 없다.
차라리 해진이 단순히 이 저택을 나서기만 하는 거라면 괜찮았으리라. 그러나 최근 묘하게 사용인들에게까지 거리를 두는 걸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영원한 이별을 전제로 계약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자신은 더는 해진을 잡아 둘 명분이 없었다. 다시 녀석이 원망 서린 얼굴을 하도록 강제로 잡아 두는 짓 따위 절대 할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절망적인 이 순간 라일은 돌연 거세게 허리를 꺾었다. 잠들기 전 갈아입은 편한 웃옷에 미처 막지 못한 피가 쏟아져 내렸다.
구역질하듯 피를 토해냈는데도 답답한 속은 풀리지가 않았다.
***
“도련님께서, 급한 일정이 생겨서 애석하지만 아침 식사에 함께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가요.”
말을 전하는 마크의 얼굴이 사뭇 심각해 보였다. 평소 온화한 그의 표정에 익숙해졌던 해진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릴 뻔했다. 어딘가 걱정하듯 저를 바라보는 따듯한 눈길이 아니었다면 화가 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해진이 잔뜩 굳어 있는 걸 알지만 마크는 지금 도무지 표정 관리를 하기가 힘들었다. 어제 심각하게 동요하는 라일을 위해 자리를 피해 주었던 그는 잊은 보고가 있다는 걸 깨닫고 고민하다가 다시 그의 침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피를 토하고 있는 라일을 보았을 땐 안 그래도 늙은 심장이 다 떨어져 내리는 줄 알았다. 당황해서 구급차를 부르려는데 라일은 그를 강하게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리고는 비서만 불러 은밀하게 병원에 간 것이다.
그러면서 해진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 한 마디로 마크는 그의 몸 상태가 해진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물론 그걸 안다고 해서 해진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는 없었다. 짧지만 가까이에서 모신 그에게도 그사이 정이 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매사 불만 한번 표하는 일 없는 해진이다. 저택의 모든 사람이 불편하고 거리를 두고 싶다는 기색을 하면서도 무례하게 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착한 청년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저 안타까운 마음만 품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정말, 함께하지 못해서 많이 아쉬워하셨습니다.”
재차 강조하는 마크에게 해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부터 간지럼이 느껴지던 가슴 부근이 오늘따라 더 삐죽삐죽하게 그를 자극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2개월 가까이 하루도 빠짐없이 라일과 함께 아침을 먹고 있었다. 이 사실을 상기하자 갑자기 묘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석연치가 않은데, 이게 뭐지.
사실 그간 라일이 매일 함께했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니 급한 일정이 생겼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오후에 또 돌아오거나 저녁을 함께하게 될 텐데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괜히 자신이 라일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는 것 같아서 해진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 저택에 있는 한 싫어도 얼굴 마주하게 될 텐데 과민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네.”
애써 굳은 얼굴로 대답을 주워섬기자 마크는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평소보다도 더 조심스러운 그의 행동이 의아했으나 해진은 습관처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늦은 밤까지 라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응접실에서 하는 페로몬 샤워에도 오지 못한다는 전언만을 남겼을 뿐이다. 마크나 사용인들은 계속 심각한 기색이었다. 괜히 위축된 해진은 저택에 흐르는 이 이상한 분위기가 무언지 알 길이 없어서 저녁을 조금 남겼다.
밤늦도록 잠을 설치고 나서야, 해진은 아까 스친 묘한 느낌이 바로 위화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
모처럼 두 사람은 아침 식탁에서 마주했다. 오늘도 홀로 먹겠거니 했는데 라일이 뒤늦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해진이 이상한 위화감을 느낀 이후, 며칠간 라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사실 그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기묘한 위화감은 그 뒤로도 계속 해진의 뒷덜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저택의 어수선한 공사는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얼추 마무리되긴 했다. 원래는 임시로 사용하는 곳이니 바로 사용하던 손님방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시기가 퍽 애매했다. 그때도 방을 옮기는 게 무척 여러 사람의 손을 탄다는 걸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고작 몇 주 남짓 사용하자고 방을 옮기자니 너무 과한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해진은 돌아가겠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사용인들이 이따금 퍽 심각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게 눈에 띄어서 더 그랬다. 여전히 해진에게는 친절한 얼굴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어른들의 분위기를 잘 살피는 아이로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태 라일의 침실과 무척 가까운 곳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기이할 정도로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해진에게 달라붙은 위화감이 퍽 끈질긴 이유였다. 이렇게까지 며칠이나 기척도 못 느낄 정도로 바쁜가.
차라리 아예 들어오지 못했다면 이해되었으리라. 그러나 침실 밖을 나올 때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라일의 페로몬은 그가 분명 이곳을 지나갔다는 걸 알려주었다.
사실 그간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일이 많았냐 하면 또 애매하긴 했다. 지나가다 마주친 적보다는 그가 해진을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 훨씬 많았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마주한 라일의 안색은 무척 나빴다. 페로몬 해소는 퍽 급해 보이는데도, 그 시간마저 그는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예전처럼, 라일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마주할 일이 없었다.
아, 그런 거구나. 해진은 진득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빵을 잘게 자르던 손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
애써 해진 쪽은 바라보지 않으려던 라일도 무심코 고개를 들 만큼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녀석은 곧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움직였으나 표정이 아까보다도 더 딱딱하게 굳은 것도 같았다.
자꾸 울컥거리는 제 속을 달래며 라일은 억지로 수프를 입에 넣었다. 그는 이제 제 안색이 숨길 수 없을 정도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거하게 피를 토하고 난 뒤에는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회사는 비상 체제로 들어갔다. 가급적 외부인의 방문은 지양하고 그간 밀린 서류만 미친 듯이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머릿속 한구석으로는 어떻게든 해진 생각을 떠올렸다. 녀석을 잡을 방도를.
해답을 찾은 뒤에 나타나고 싶었는데 보고 받는 해진의 식사량이 다시 줄기 시작했다. 홀로 먹는 식사 때문인지 다른 게 마음에 걸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또 녀석이 말라 가는 걸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라일은 뒤틀리는 속을 부여잡은 채 해진을 보러 나왔다.
사실 이건 다 핑계고, 그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살짝 숙인 고개를 따라 늘어진 녀석의 속눈썹을 저도 모르게 관찰했다. 조심스럽게 수프를 쥔 손은 볼 때마다 작아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실내라서 흰 목이 다 드러나는 것도 티 나지 않게 눈에 담았다.
이렇게 가까이 앉아 있는데도, 이렇게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