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76화 (76/101)

#76

“해진.”

“네.”

울컥 솟아나던 피처럼 라일은 발작하듯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부르고 나서야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질문을 하고 싶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곤혹스럽게 입을 막았다.

짐은 왜 그리도 일찍부터 싸 두었는지, 나간다는 소리를 하면 자신이 또 화를 낼 것으로 생각했는지.

안 가면 안 되는지.

그러나 이런 것들을 내뱉는 순간 해진이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다고 할까 두려웠다. 결국 고민 끝에 라일은 말을 멈추기로 했다.

게다가 이 저택을 떠나는 해진을 상기한 순간 다시 속이 울컥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녀석의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도 눈치채고 말 테니까.

“아니, 아니야. 미안, 먼저 실례하지.”

그 말을 끝으로 라일은 벌떡 일어나 식당 밖으로 향했다. 뒷말을 기다리고 있던 해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황급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라일의 앞에 놓여 있던 별 수프는 양이 거의 줄지 않았다.

***

대체 뭘까.

아침에 보인 라일의 이상한 행동이 오래도록 해진의 머릿속에 남았다. 하필이면 쓸데없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아 버린 탓도 있었다.

그에게 해진이 필요하지 않다면 만날 일이 없다는 사실이 왜 이리도 머릿속에 남는 걸까. 사실 그건 자신이 라일을 찾지 않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는데.

사슬을 둘러 꽁꽁 묶어 놨던 가슴속 상자가 다시 아우성을 쳤다. 그것이 몸을 들썩일 정도로 난폭하게 구는 꼴을 보던 해진은 멍하니 흘러나온 감정들을 흩어내려고 애썼다. 다만 허공을 오가는 손짓은 그 바보 같은 모습처럼 덧없기만 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는걸.

마법 같은 한마디에 겨우 진동이 일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덕분에 그는 낡은 제 휴대폰을 들고 멍하니 의미 없는 검색을 반복할 수 있었다.

숙소를 잡아야 할까. 가서 상황을 봐야 할까.

날씨 상황도 좀 알아보고 싶었는데 고물 휴대폰의 화면이 멈춘 채 움직이질 않았다. 남는 건 시간이니 기다리면 될 텐데 오늘따라 견디기가 버겁다.

자연스럽게 옷방 한쪽에 곱게 두고 나왔던 태블릿 생각이 났다. 잠깐만 쓰고 다시 돌려놓아도 되겠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응접실로 나가니 다행히 마주치는 사람이 없었다. 최근 그만 보면 습관적인 미소를 짓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옷방에 들어서 태블릿을 한참 매만지는데 복도 저편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바라보니 옷방에서 복도로 향하는 쪽의 작은 문이 조금 열려 있음을 발견한다. 사용인들이 오가다가 닫는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도련님께서 무척 걱정하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곧 브라이트 씨와의 계약 날짜가…….”

마크의 목소리에 해진은 반사적으로 숨을 죽이고 말았다.

“그렇죠. 참, 손님방은 준비해 두는 게 좋을까요.”

“네. 그건 먼저 준비를 마쳐 두도록 합시다. 새로 오시는 분이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죠.”

“네, 마크.”

다행스럽게도 몇 마디 말만 남긴 채 그들은 방 앞을 스쳐 지나갔다. 조금 떨어진 곳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해진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괜히 말을 엿듣는 것처럼 보일까 봐 곤란해질 뻔했다.

이곳에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침실로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 들고 있던 태블릿을 다시 얌전히 내려놓은 해진이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방금 태블릿으로 찾은 정보들 대신 엉뚱한 것이 머릿속을 차지한 채 나가질 않는다.

마크가 말하는 ‘새로 오는 사람’과 ‘손님방’이라는 단어가 자꾸 뇌리를 빙빙 맴돌았다. 사실 두 단어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안은 있었다.

새로운 오메가를, 구한 걸까?

기꺼운 일이었다. 라일은 그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계약이 끝난 뒤 저택을 무사히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리라. 아까부터 답답한 가슴을 습관처럼 톡톡 두드리면서 해진은 가까스로 침대에 몸을 뉠 수 있었다.

어쨌든 새로운 계약자를 구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라일은 왜 계약 날짜가 다가오는 걸 걱정하는 걸까.

고작 지나가는 단편적인 몇 마디로 이런 억측을 하면 안 된다. 그걸 잘 알면서도 해진은 멋대로 뛰어다니는 생각의 편린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라일이 걱정하는 이유까지 추측이 미친 순간 저도 모르게 스르륵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혹시 그는 해진이 계약 기간이 다가오는데도 나가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닐까. 미처 손님방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던 이 화려한 방처럼.

덕지덕지 기워 붙인 억측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해진은 멍하니 광활하기까지 한 침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정말,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

“받은 보상금이 고작 이 정도라고?”

“네. 그렇습니다.”

“……어쩐지.”

얼핏 보면 꽤 막대한 금액으로 보이지만 혼수상태에 빠진 부모를 봉양하기엔 턱없는 금액이었다. 숫자로 셈 쳐진 해진의 비극을 바라보던 라일은 빠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가해자 측의 보험사에서 적당히 무마한 수준의 보상금입니다. 제대로 권리를 찾으려면 소송을 걸었어야 할 텐데, 당시에는 브라이트 씨도 입원 중이라 여의치 않았을 겁니다.”

온 가족이 죽거나 병원에 있던 상황이었다. 해진은 마땅히 이런 일을 대신 처리해 줄 친척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녀석의 나이는 갓 성인이 되었을 시기다. 보험사가 제시하는 돈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으리라.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는데 선명히 눈앞에서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피가 거꾸로 도는 감각에 라일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었다.

“……가해자는, 지금 뭘 하고 있지.”

우려와는 다르게 가해자는 법적 처벌을 제대로 받았다. 딱히 인맥이 있어서 사건을 무마하거나 하지도 못했고 재판 과정도 특별히 잘못된 점이 없었다.

그저 딱 법이 정한 테두리만큼 처벌받은 채 재판은 마무리되었다. 어찌 보면 깔끔하기까지 한 과정이 서류에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니 더욱 허무하다. 남겨진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데 정작 원망할 대상이 없지 않은가.

“아직 복역 중입니다. 교도소 내부 사정도 일단은 알아보고 있습니다.”

“…….”

이 조사를 위해 라일은 직접 법조계에 있는 연줄을 동원했다. 고작 이 정도를 위해 만들어 둔 연줄은 아니지만 사용하는 데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마치 해진에 대해 알아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처럼 라일은 필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러나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해답은 보이지 않았고 컴컴하기만 했다.

이러니 도무지 해진에게 저택에 남아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역시 이상하지 않습니까?”

베르무스의 본 저택처럼 고풍스러운 방 안, 하나같이 금발인 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다만 라일만큼 선명한 금발을 가진 이는 없었다. 이들은 베르무스의 성을 달고 있는 방계들이었다.

그중 가장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다니엘 베르무스는 짐짓 우아한 손놀림으로 술을 따랐다. 이 방은 그가 선망하던 본 저택을 따라 가장 흡사하게 만든 곳이었다. 그래도 그는 늘 진짜를 손에 넣기를 갈망했다.

“허어, 정말 고작 열성 따위를 위해 그쪽에까지 연락을 넣었단 말입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후원하는 정당은 왜 바꾼 거랍니까?”

“그거야 이번 일과는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늘 라일의 근처를 주시하던 다니엘은 최근 이상한 부분을 많이 발견하곤 했다. 가령 얼마 전에 라일이 오메가가 당한 사고의 재판 기록을 빼냈다는 것과 같은 정보 말이다. 라일의 인맥에 직접 접근하진 못했으나 이런 일에는 눈과 귀가 많은 법이었다.

어쨌든 그건 표면적인 신상 정보를 넘어서는 정보였다. 오메가를 혐오해 마지않아 저택에 들이는 이들에게도 무심한 라일답지 않았다.

“역시 저택 인원들을 다 물갈이한 게, 정말로…….”

이 방 안의 인물들이 지금 베르무스 본 저택에 있는 유일한 오메가에게 신경을 쏟은 건 이미 한참 전이었다. 안에 사람을 심든 말든 그 저택을 방치하던 라일이 갑작스럽게 보안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호수에 갑작스럽게 나타났는데, 옆에 누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화두가 자연스럽게 라일과 함께 있을 오메가에 관한 것으로 빠져들었다. 매번 그 저택에 계약한 오메가가 들어갈 때마다 그들은 정보를 빼내려고 애썼다. 그러니 그곳에 있는 것이 해진이라는 열성 오메가라는 걸 이미 모두가 알고는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흐음, 가주의 오메가 혐오증이 조금 괜찮아진 걸까요?”

그러나 만약 라일의 혐오증이 변화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간 근처에 오메가를 밀어 넣기만 해도 경멸을 숨기지 않는 라일이었다. 그 저택에 새로 사람을 심고 싶어도 어려워졌는데, 만약 그의 지척에 제 사람을 밀어 넣을 수 있다면.

그리고 후계라도 덜컥 얻게 된다면.

“그게 중요한가요?”

그때 친족 회의에 참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가 어수룩하게 물었다. 특히나 탁한 그의 금발을 보면서 다니엘은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과거 달콤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럼요. 혹시라도 라일이 어린 후계를 낳고, ……선친처럼 일찍 가 버리기라도 한다면 말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휩싸였다. 다들 바쁘게 눈을 굴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으나 누구 하나 지적하는 이가 없었다.

분명 어려서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라일이 지나치게 성장해 버렸으니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