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그래도 열성 따위는 안 되겠죠.”
“역시, 새로운 오메가를 붙여 줘야.”
“제가 아는 집안 좋은 오메가가 있는데…….”
제각기 계산을 마친 그들이 애써 우아한 척 말을 뱉어냈다. 이 와중에도 서로를 견제하는 것도 잊지 않은 채.
“그럼 그건 어찌 떼어내어야 할까요.”
그때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뱉은 말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저택에 사람을 심기가 어려워졌기에 그들은 현재 라일과 해진의 정확한 관계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라일이 예상외로 아끼는 오메가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 정도만 추측할 뿐이다.
“그건 제가 한번 수를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만히 말을 듣던 다니엘이 술잔을 기울이며 말을 뱉었다. 다들 그가 주도권을 쥐는 듯한 이 상황이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또 직접 나섰다가는 라일의 심기를 정면으로 거스를까 우려되기도 했다.
눈치만 보고 몸을 사리는 그들을 보면서 다니엘을 코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과는 다르게 다니엘은 꾸준하게 라일의 근처에 사람을 심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최근 가까스로 만들어 낸 빈틈에서 뜻밖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어차피 그 오메가와의 계약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니 라일의 동태를 먼저 살핀 뒤, 직접 가서 일러 주는 걸로 오메가는 주제 파악을 하리라. 남들보다 한발 앞서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
“마크가 손님방의 준비도 끝났음을 알려 왔습니다. 의료 기기도 은밀하게 수급해 들여놓았습니다.”
“그래.”
피를 토하는 건 좀 가라앉았으나 몸 상태가 무거웠다. 머리가 꽉 막힌 듯한 증상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라일은 궁여지책으로 아예 주치의를 저택에 들이려고 손을 썼다. 마크가 맞이할 준비를 하던 새로운 손님은 기실 이 주치의를 뜻하는 것이었다.
급한 대로 페로몬을 억지로 해소하는 약이라도 투여할 생각이었다. 병원에 자주 들락거리면 너무 많은 이목을 끌게 되기에.
“정말 펜트하우스가 있는 건물을 전부 비우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그리고 라일은 끝내 해진을 저택에 머무르게 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대신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녀석에게 줄 펜트하우스였다.
적어도 그곳에 머물러 달라고 한 뒤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해진을 보러 갈 작정이었다. 그렇게 꾸준히 곁을 차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면 언젠가는 돌아봐 주리라, 애써 희망적으로 생각하면서.
다만 외부에서 라일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어떻게든 티가 날 것이 우려되었다. 해진이 가능한 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는 주변을 차근차근 다져 나갔다.
특히나 녀석이 살 건물에 있는 입주민들을 아예 내보내려고 작정했다. 일단 전부 공실로 만든 뒤 해진을 경호할 인력들이 아래층에 기거할 수 있도록 하려는 속셈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조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도심에 있는 그 건물은 위치가 좋아서 수요가 많은 실정이었으니 말이다.
“안나 님께서 곧 올라오신다고 합니다.”
“……이만 나가 봐.”
이 와중에 숙부의 아내인 안나 베르무스가 그를 만나야겠다고 끈질기게 연락을 취해 왔다. 그의 오메가 혐오증을 알기에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던 안나가 대체 왜 이러는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특히나 최근 그가 극도로 외부 손님을 꺼리는 바람에 건강 이상설이 돌고 있었다. 비서는 조심스럽게 안나 베르무스는 만나 봐야 할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친족들의 회동이 심상치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근 라일은 준비하는 것이 있기에 일단 평소처럼 친족들의 이목을 가려야 했다.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노력할 무렵, 안나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오랜만이구나, 라일.”
“이름을 멋대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그래, 조카님. 오랜만이야.”
대놓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그를 안나는 무척 불쾌하게 바라보았다. 베르무스의 성을 따르고는 있었으나 그녀 또한 유서 깊은 가문의 오메가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간 라일의 이런 성격을 싫어해 근처에도 오지 않았을 터다.
다니엘 숙부가 그녀를 이곳에 보냈다는 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저를 만나려면 용건이 명확해야 한다고, 다니엘 숙부께 듣지 못하셨습니까.”
“얘는. 조카를 보러 오는데 그렇게 딱딱하게 굴 것 뭐 있니.”
참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차라리 정말 조카 놀음을 하고 싶은 거라면 그의 저택으로 찾아오면 될 일이다. 물론 들여보내지 않겠지만, 그 문전박대가 자존심이 상한다고 업무를 방해할 생각을 하다니. 라일은 죽을 때까지 이들의 뻣뻣한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짓도 얼마 남지 않았다.
라일은 숙부를 빠르게 잘라내느라 어느 정도 용인했던 가문의 지분 문제를 최근 공격적으로 파헤치는 중이었다. 특히나 고작 베르무스의 성 하나를 믿고 그의 부하직원들을 핍박하는 짓거리를 막기 위해 더한 손을 쓸 용의도 있었다.
이런 문제는 시간이 생명이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놈들이 방심할 수 있도록 이 빌어먹을 연극에도 놀아나 줘야 했다.
덕분에 라일은 한참이나 일부러 페로몬을 쏘아 대는 숙모의 역겨운 짓거리를 감내해야 했다.
***
저택에 해진이 있어서 다행이다. 오늘만큼 그게 이리도 절실하게 느껴진 적이 또 있을까.
성적인 뉘앙스는 아니었지만 숙모의 오메가 페로몬은 퍽 역겹게도 그에게 들러붙었다. 어릴 적 그를 페로몬으로 공격했던 아버지의 정부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그때의 일을 짐작하고 있을 텐데 다분히 고의적이다.
결국 그가 반쯤 쫓아내다시피 그녀를 내보낼 때까지 숙모는 계속해서 라일을 떠보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쯤 그가 역겨움에 몸서리치는지 가늠하기라도 하는 듯이.
해진에게 페로몬 샤워를 받은 뒤로는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는 증상은 많이 나아졌다. 그게 아니었다면 숙모의 앞에서 대놓고 몸에 이상이 있다는 증거를 내보일 뻔했다.
구원 같은 녀석의 페로몬이 그리워서 라일은 성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페로몬 제거제를 뿌리긴 했는데 오늘따라 페로몬 제어도 시원찮아서 제대로 지워 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제 페로몬만 넘실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응접실에 들어선 라일은 문득 몸을 굳혔다.
“……아.”
“……아직 깨어 있었나.”
멍하니 응접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해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라일을 기다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침실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응접실에 들어선 라일이 저를 보고 얼굴을 굳히니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역시나 괜한 짓이었다. 대체 뭘 알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른 채 해진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그때, 코끝에 묘한 향이 스쳤다.
다른 오메가의 체향이었다.
숲속 한가운데에 달콤한 케이크가 떨어지기라도 한 듯 이질적인 페로몬이었다. 분명 라일의 페로몬이 더 강한데도 그 물과 기름처럼 동떨어진 특성 때문에 도드라졌다. 이 저택에는 라일과 해진 말고는 다른 형질들이 없어서 처음 맡는 페로몬이 더 피부에 와닿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뻣뻣하게 굳은 해진이 멍청하게 그런 라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움직였다.
“실례하지, 피곤해서.”
어딘가 어지럽게 일렁이는 해진의 페로몬을 느끼자마자 라일은 다시 급격하게 몸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색할 정도로 단호한 걸음으로 제 방으로 사라져야 했다.
달칵 문이 닫히고 나서야 해진은 뻣뻣한 고개를 돌려 라일의 자취를 바라보았다. 간지럽기만 하던 가슴 쪽이 이상하게 따끔거리는 것도 같았다. 이 묘한 감각을 가늠하느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쨌든 굳게 닫힌 문은 그대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억측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새 오메가를 구한 것이 맞나 보다.
***
“아이참, 이런 건 저희가 한다니까요.”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해진이 들고 이불을 냉큼 받아든 사용인이 자상하게 미소 지었다. 자고 일어난 흔적이 오늘따라 유난히 어질러진 기분이라 대충 구색이나 갖추려던 해진은 움츠러들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곧 다 걷어서 세탁할 텐데도 사용인은 보란 듯이 해진이 일어난 자리를 흔적도 없이 정돈해 주었다. 잠깐 그걸 바라보던 해진이 조용히 욕실로 몸을 돌렸다. 막 일어난 탓에 조금 비틀거리자 대번 뒤에 시선이 따라붙는다.
“괜찮으세요?”
“……네.”
욕실 문을 닫고 나서야 후, 미약한 한숨이 나왔다. 요 며칠 정말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선이 따라붙었다.
예전처럼 거북한 시선은 아니었다. 무언가 해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극도로 조심하는 기색들이었다. 덕분에 불편한 마음은 그 이상이었다.
라일에게서 묘한 향을 맡은 날 그냥 흘러가듯 생각했더랬다. 새로운 오메가 계약자를 찾았구나, 하고.
그런데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운 사용인들의 분위기 덕에 자꾸만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 오는 사람과 손님방, 그리고 라일이 걱정한다던 계약 날짜.
모든 것이 자꾸만 그가 억측이라며 애써 접어 두었던 생각으로 빗물처럼 달려들었다. 이들은 해진이 계약 기간이 지나도 나가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갑작스럽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라일의 태도를 보면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역시 진작 손님방으로 돌아갔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