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심지어 얼마 전에는 재활 겸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무심코 손님방이 몰린 곳으로 간 적이 있었다. 그러자 마크가 대번 달려와서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그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려고 했다.
눈치채지 못한 척 구는 건 쉬웠다. 그러나 뒤통수에는 끈질기게 의혹이 달라붙고 말았다. 혹시 새 오메가가 이미 들어온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그와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가슴팍에서 퍼석, 하고 무언가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의아하게 가슴을 내려다보던 해진은 다시 묵묵하게 물을 틀며 씻을 준비를 시작했다. 이상하게 구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그는 익숙한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라일조차 최근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변모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행여 해진이 그들의 자상함에 계속 기댈까 봐 걱정하는 것이리라. 보육원에서도 흔히 겪던 일이었다.
아직 덜 여문 아이들은 쉽게 접하지 못하는 온기에 금방 경도되곤 했다. 일시적이라는 전제하에 온정을 베풀러 온 사람들에게는 못내 부담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니 주어진 만큼의 온기만 탐하는 건 해진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그간 가족들이 보여준 끝없는 온기가 사라지니 다시 오랜 습관이 나온다.
그래서 해진은 세수를 시작했다. 이럴 때일수록 단정한 외양을 유지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손이 덜 가는 아이처럼 보이게 말이다. 그는 이제 아이가 아니었지만, 제대로 잘 자랐냐 누군가 묻는다면 대답할 자신이 솔직히 없었다.
다만 연거푸 차갑게 얼굴을 씻어내도 개운하지 않았다. 버석해져서 웃는 법도 잃어버린 얼굴에는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싱그러움이 맺히질 않았다.
“…….”
일부러 시간을 오래 들여 씻고 나오니 예상대로 침대의 시트가 전부 걷어져 있었다. 꼭 해진 또한 이렇게 자리를 비워 줘야 한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걸 묵묵히 내려다보면서 해진은 뚝뚝 떨어지는 물이 바닥에 흐르지 않도록 꼼꼼하게 닦아내었다.
다시 가슴이 따끔 존재를 알렸다. 그곳에 꾹꾹 눌러 둔 감정의 상자가 있다는 걸 잊지 말라는 듯.
이 기분은 그저 이 자상한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인 게 분명했다. 처음엔 나갈 일만 기다렸던 자신이 어느새 이곳을 따스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힘껏 부정하려고 애써 왔지만 이미 늦어 버렸음을 해진은 빈 침대를 보며 깨달았다.
라일이 갑자기 그를 피한다고 해서 의아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정확히는 계약의 끝만 바라던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확실하게 해야겠어.”
이들과 이렇게 어색한 이별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해진은 처음의 목표를 재차 상기했다. 없는 듯 있다가 나가고 싶다. 이런 식의 이별을 하면 울퉁불퉁한 흔적이 남게 마련이었다.
그러니 해진은 자신이 이 저택에 필요 이상으로 엉겨 붙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실하게 표현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
“임시 거처를 구하는 데 고민이라며, 마크의 의견을 물으셨다고 합니다.”
“…….”
“……어떻게 할까요.”
비서의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숨통이 훅 조여들었다. 분명 저보다 체구도 작은 해진이 그의 가슴을 콱 쥐어짜는 것처럼.
환상처럼 제 앞에 나타나 검은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해진에게 라일은 멍한 시선을 던졌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분명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느끼지 않도록 신경 써 달라고 했을 터다. 그는 마크의 상세한 보고를 들으며 사용인들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매일 같이 CCTV를 세심하게 직접 검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진에겐 그저 빨리 나가고 싶은 공간이던가.
“……펜트하우스 쪽은?”
“수월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주거 환경을 비우는 작업이라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아서…….”
송구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는 비서지만 라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라고 왜 모르겠는가.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단기간에 끝내기는 무리가 많은 일이었다.
“……오늘 말해야겠어.”
본래는 계약이 끝나는 날 해진에게 말할 작정이었다. 그 안에 펜트하우스 정리를 어떻게든 끝낸 뒤 그곳으로 직접 데려다주고 싶었다. 그런데 녀석이 금방이라도 저택을 떠날 것만 같아서 초조함에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저택에 연락을 넣어 놔. 저녁에, 아니, 오후에 찾아갈 거라고 해진에게 미리 말해 둬.”
“네.”
오늘 당장 찾아가서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애원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라일은 피가 조금씩 바짝바짝 말라 가는 심정을 더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제발 꼴사납게 피를 토하는 일만 없기를 비는 수밖에.
***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 도시에 자주 오곤 하는 무거운 비가 전부 하얗게 얼어버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라서 해진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요 며칠 사이 습관처럼 가슴 근처를 문지르게 된 그는 문득 벽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상하게 복도가 무척 소란스러웠다.
“…….”
무슨 일인지 궁금하긴 했으나 해진은 그를 어색하게 다른 곳으로 인도하던 마크가 생각나서 일부러 꾹 입을 다물었다. 오늘따라 사용인들도 기이할 정도로 눈에 띄질 않았다. 분위기가 괜히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재활 운동도 생략한 참이었다. 어차피 오늘처럼 큰 눈이 오는 날은 밖에 나가기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잠깐 존재를 죽이듯 숨을 죽이고 있으니 여러 명이 달리는 듯 울리던 복도가 잠잠해졌다.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이따금 걱정이 치밀어 올랐다. 마크에게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그러나 원한다면 미리 나갈 수도 있다는 말은,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이럴 때 괜히 그런 소리를 한다면 눈치 보고 있다는 걸 들키기 마련이니까.
다만 라일이 돌아올 거라는 소리를 들으니 덜컥 겁이 났다. 무언가 오해를 산 건 아니겠지. 그냥 때가 되었으니 계약의 마무리를 위한 자리일 것이다.
그때 이번엔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해진은 순간 너무 깜짝 놀라서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숨을 들이쉰 폐가 딱딱하게 굳을 무렵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해진이 심호흡을 하며 침실 문고리를 잡았다. 나갈 때가 되어서 그를 향한 배려가 하나둘 사라지는 중일 수도 있었다. 너무 놀란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문고리를 잡는 손이 미약하게 떨려 온다.
“…….”
다만 그의 두려움을 훅 날릴 만큼 이질적인 광경이 들어왔다. 응접실에는 묘하게 낯이 익은 사람이 서 있었을 뿐이다. 귀에 낀 인이어를 보면 경호팀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알파였다.
“어…….”
조절하고는 있다지만 미미하게 흘러나오는 페로몬은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의 까다로운 조절은 라일 같은 우성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일전에 라일에게 묻어 있던 오메가의 페로몬이 눈에 톡 튀어 오르는 이질감이었다면 이번엔 조금 느낌이 달랐다. 무언가 침범당한 것 같은 불쾌함에 해진은 조금 뒷걸음질 쳤다. 애초에 그는 알파의 페로몬을 맡으면서 괜찮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라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베르무스 씨께서 찾으십니다.”
그때 경호원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해진의 침실을 훅 파고들었다. 그 순간 해진은 기이한 예감을 느꼈다. 자신이 더는 이 공간을 침범당했다고 느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애초에 그의 공간이 아닌데 그렇게 느낀 게 우스운 일이었다.
다시 가슴에서 파삭 부스러지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움츠러들었던 몸이 덤덤하게 펴진 건 다행이었다.
앞서 나가는 경호원을 따라 해진은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 번도 벅찬 적 없던 걸음이 못내 힘겨웠다. 무언가 이상해서 앞을 보니 경호원은 그냥 평소 걸음걸이대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간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해진의 느린 걸음걸이에 맞춰 주었던 것처럼.
“…….”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 부러 더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무거운 다리가 오늘만큼 실감이 난 적이 없었지만 애써 고개를 앞으로 쳐들었다.
복도에 나가고 나서야 저택이 꽤 적막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까는 분명 우르르 소란이 일어났는데 이상한 일이다.
경호원은 그가 한 번도 간 적 없던 방으로 향했다. 구조를 보니 대충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인 것 같았다. 그동안은 저택을 그냥 지나가듯 생활하기만 해서 모든 방의 용도를 알진 못했다.
그렇게 어느 문 앞에 들어서자 경호원이 정중하게 노크를 했다. 반사적으로 움찔 놀랐던 해진은 이내 덤덤하게 무표정을 가장할 수 있었다.
“들어와.”
그런데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기이한 상황에 의아함을 내비치기도 전에 경호원은 문을 열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라는 듯이.
얼떨떨하게 들어서자 처음 보는 알파 하나가 상석에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왔군.”
“…….”
당황을 감추지 못한 해진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안내한 경호원은 제자리로 돌아갔는지 그사이 보이지 않았다.
문이 완전히 닫힌 뒤 해진은 어색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눈앞의 알파를 바라보았다. 방금 봤던 경호원과는 다르게 보란 듯이 페로몬으로 존재감을 알리고 있는 게 무척이나 거북했다.
당연히 라일이 저를 부른 거로 생각했는데. 앞에 있는 알파의 금발을 보던 해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베르무스 씨가 보내신 겁니까?”
그러나 그의 질문에 알파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오만하게 뱉었다.
“내가 바로 베르무스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