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79화 (79/101)

#79

“…….”

저택에 앉아 있으니 다니엘은 역시 이곳이 탐이 났다. 고작 열성에 동양인 따위가 뻣뻣하게 서 있는 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만 오메가의 반응을 보았을 때, 아무래도 라일이라고 생각하고 이곳에 순순히 온 모양이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일이 조금 더 쉬워질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니엘은 태연하게 거짓을 입에 담았다.

“다니엘 베르무스, 회장의 숙부 되는 사람일세. 조카 녀석이 보내서 온 것이냐 묻는다면, 그것도 맞지.”

“아…….”

라일을 이름이 아니라 회장이라고 부르는 게 조금 의아했지만, 해진은 수긍했다. 탁하긴 해도 금발인 그를 보니 친족인 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앉게.”

다니엘은 거만하게 앞쪽의 자리를 턱짓하며 말했다. 마치 이 저택의 주인이라도 된 것 같은 태도였다. 라일의 친족이라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리라.

페로몬이나 자세 모든 곳에서 해진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티가 났다. 해진은 쓴웃음을 가까스로 삼키며 그가 가리킨 곳에 얌전히 앉는다.

바싹 마른 심정으로 앉으면서 그의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천장에는 CCTV가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친족이라는 눈앞의 알파까지. 이 모든 게, 라일의 의도가 아니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남는 의문은 한 가지였다. 왜?

“그간 많은 수고를 해 주었다고 들었어.”

“……수고요?”

“그래. 어쨌든 섭섭하지 않은 보상은 받았을 터.”

왜 굳이 본인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보내서 해진을 마주하게 한 걸까. 파삭파삭 소리가 나던 심장 부근에서는 점점 소리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더는 부스러질 것도 없다는 듯이.

“그런데 이제, 곧 계약도 끝이니 말이야.”

“…….”

이 갑작스러운 상황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해진은 일단 침묵을 선택했다. 그런데 다니엘은 앞의 오메가가 유난할 정도로 말수가 없는 걸 의아하게 여겼다. 이미 뻣뻣하게 서 있는 꼴이 탐탁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그 꼴이 꼭 거부감이라도 나타내는 걸로 보였다.

게다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경호원 중 하나를 가까스로 매수해서 만들어 낸 틈이었으니 말이다. 슬쩍 두꺼운 손목에 끼워 둔 시계로 시선을 돌렸던 다니엘은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분수에 넘치는 걸 쥐려다가는 피를 보는 법이지. 게다가 고아라지? 뿌리도 모르는 유전자나 열성 따위의 형질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야.”

“…….”

“얌전히 계약 기간만 마치고 사라지라는 뜻이네. 알아들었나?”

귓가에서 이상하게 삐익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앞에서 다니엘이 뿜어대는 역겨운 페로몬이 꼭 가시가 되어 해진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나 했더니, 역시나 그가 걱정하던 게 맞나 보다. 마크에게 차라리 일찍 이 저택을 나설 의향도 있다고 좀 더 명확하게 전달했어야 했는데.

그러면 이렇게 이 저택에서 또 서러움을 삼킬 이유가 없었을 텐데.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파삭 하고 흩어지는 소리를 끝으로 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고개가 힘겹게 아래에 처박혔다가 위로 올라왔다.

괜찮다. 이제 정말 끝이니까.

“말귀는 잘 알아듣는군.”

의외로 선선한 반응에 다니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없는 것들은 대놓고 일러 줘야 제 분수를 깨닫는 법이었다.

“괜히 힘을……, 잠깐, 어디 가는 건가.”

그러나 그도 잠시, 한마디를 툭 뱉은 해진이 갑자기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보게.”

뒤에서 불쾌한 페로몬이 끼쳐 왔으나 해진은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유령처럼 터벅터벅 걸음을 움직여 응접실 밖으로 걸어 나간다.

올 때는 그리도 무거웠던 다리가 더는 아프지 않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니엘의 목소리도 아스라이 멀어진다.

홀린 듯이 걷다 보니 그가 빌려 쓰고 있던 방이 금방이었다. 반사적으로 라일의 침실을 한 번 바라봤던 해진은 머뭇거리는 일 없이 옷장으로 바로 들어섰다.

그가 준 옷은 전부 벗어 던지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자신의 낡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야 제게 맞는 걸 걸친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트렁크를 쥔 채로 나가려는데 파란색 목도리가 눈에 띄었다.

“…….”

다니엘의 앞을 떠난 후로 해진은 처음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없이 까만 눈동자로 그것을 내려다보는 그는 표정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끝내 돌아선 해진의 뒤에는 라일의 눈동자를 닮은 목도리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놓아둔 것이 많아 걸음이 가뿐했다. 바람처럼 저택을 빠져나가는 동안 이상할 정도로 마주치는 사용인이 하나도 없었다. 그 기이한 적막이 꼭 그를 나가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어딜 가십니까?”

차가 대기하는 저택 정문까지 나서자 아까 그를 안내했던 경호원이 말을 걸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택 밖으로요.”

덤덤하게 말하는 오메가를 보면서 경호원은 곤혹스럽게 인상을 찡그렸다. 걱정하던 차였는데, 얘기가 잘 된 건가?

알파인 그는 최근 갑작스럽게 외곽 경비로 밀려나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저택 안쪽이나 뒤쪽 숲 경비가 더 한직이어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꽤 높은 직책까지 받아 온 게 마음에 들었는데 한번 불만을 품으니 못내 짜증이 났다.

이직 권유를 받은 사람들이 죄다 알파라는 점이 그의 신경을 거슬렀다. 다들 이해한다는 식의 반응인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멀쩡히 잘 근무하던 곳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저택의 유일한 오메가 때문이라는 게 자명하지 않은가.

가뜩이나 이 저택으로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더 짜증이 솟구쳤다. 베르무스의 본사 쪽에서 다시 제시한 계약이 평균 이상의 무척 좋은 조건이라는 건 좋을 대로 무시했다. 그냥 동양인 오메가 하나 때문에 이러는 게 기분이 나빴으니까.

그러던 차에 다니엘이 그에게 접근해 왔다. 막대한 양의 뒷돈에 구미가 당겼다. 안 그래도 거슬리던 오메가를 처리해 주겠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어쨌든 다니엘은 이 저택의 가족 아니던가. 나중에 변명하기에도 좋아 보이는 건수였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저택을 나가 주는 걸 보면 이래저래 일이 잘 풀린 듯하다. 별다른 잡음 없이 다니엘이 이곳에 온 목적이 완수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일도 없겠지.

“차를 준비해 드리죠.”

해진의 다리가 불편한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트렁크 하나 달랑 들고 바로 나온 꼴이 조금 의아했지만, 빨리 사라지면 다니엘이 돈이라도 더 챙겨 주겠다고 했겠거니 싶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검은 머리칼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경호원은 부하직원을 시켜 차를 준비하게 했다. 다니엘은 시간 문제라는 듯 굴었으니 이 오메가를 빨리 치우면 더 좋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얌전히 차에 올라탄 해진은 그길로 사라졌다. 심지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하직원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말 그대로 도시에 닿자마자 해진이 차에서 내렸다고 한다. 다니엘이 염치도 모르는 오메가 취급을 했었는데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이제 일도 잘 해결되었는데 다니엘은 왜 저택을 떠나지 않는가 의아해하던 찰나였다. 저택 뒤쪽에서 마크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다급하게 뛰어오는 게 보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다니엘 씨가 이곳에 있다던데. 그리고 분명 브라이트 씨가 또 숲 쪽으로 갔다고 하지 않았어!”

다니엘이 마크가 거북하다고 하기에 경호원이 대충 거짓말을 해 둔 것이었다. 사실 그는 마크만 뒤쪽을 살피러 가겠거니 했는데, 사용인들이 난데없이 우르르 그곳으로 몰려가서 조금 놀라던 차였다.

그러나 이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변명을 내뱉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아, 그게. 제 부하가 잘못 봤나 봅니다.”

“뭐라고?”

“참, 그 오메가는 나갔습니다. 떠난다던데요.”

그러나 이 말을 뱉는 순간 마크의 얼굴이 상상 이상으로 해쓱해졌다. 뒤쪽에 몰려선 사용인들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

그 표정들을 마주하고 나서야, 경호원은 무언가 일이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

해진은 거리를 걸었다.

낡은 트렁크가 아스팔트의 모난 곳에 톡톡 튀어 오르는 둔탁한 소리가 길을 울렸다. 눈이 잔뜩 내리고 있어서 질척이는 소리도 이따금 들린다. 아무도 그런 그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괜히 더러운 소음을 내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트렁크를 아예 들어 올리는 건 힘에 부쳤다. 덕분에 하염없이 툭툭 바퀴 구르는 소리를 내며 도시 안으로 계속 걸어야 했다. 조금만 더 가서 버스를 탈 작정이었다. 바닥만 보며 걷는 내내 아슬아슬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라일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분명 그냥 이만 나가 달라고 해도 더 들러붙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오래 남게 된 건 해진의 의사가 아니라서 억울한 마음도 솟구쳤다.

그리고 이상하게, 무척 아팠다.

더는 아플 기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통증이 계속되었다. 쓸데없이 저를 가장 중요한 손님이라고 하던 라일의 음성도 머릿속을 울렸다.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에 오물을 털어내듯 그를 내보내야 했을까.

그제야 해진은 자신이 바로 온기에 경도되어 버린 아이 같았다는 걸 깨달았다. 거리를 잘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틀렸다. 어느새 그 따스한 저택이 저를 둘러싸는 게 익숙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리도 아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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