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80화 (80/101)

#80

억울하게도 그건 제 잘못이 아니었다. 그들의 온기는 마른 가뭄에 퍼부어지는 거센 비 같은 것이었다. 버석하게 말라 있던 해진이 흠뻑 젖어버리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어쨌든 이제 명확하게 깨달았으니 저도 모르게 탐하고 있던 온기들을 놓아주어야 한다. 하나둘 품어 두었던 감정을 놓아 버릴 때마다 해진의 뒤로는 눈 녹은 물이 길게 이어졌다. 실제로 그에게서 빗물이 쏟아져 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걸음 힘겹게 뗄수록 점점 이전의 자신으로 회귀한다. 말랑해진 마음이 다 거짓이었다는 듯 표정에서 점점 생기가 사라졌다. 몸이 말라비틀어져 다시 쪼그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오랜 가뭄으로 버석하게 마른 자신을, 해진은 다시 목도해야 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이미 벼랑 끝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한 번도 이곳을 벗어나질 못했다. 그저 저를 둘러싼 것들이 너무 따뜻해서 잠깐 잊고 있었을 뿐.

다니엘의 앞에서 더 듣지도 않고 떠나온 건 잘한 일이었다. 이미 발끝이 벼랑 밖으로 반쯤 밖으로 나와 있는 해진은 이런 일에 맞서거나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저 피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밖으로 툭 떠밀려 버리고 말 테니까.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얀 날. 그렇게 해진은 저택을 떠났다. 뒤로는 트렁크 바퀴가 만드는 검은 자국을, 눈물처럼 남기고.

***

“찾아와. 경호팀은 대체 뭘 하고 있어!”

“도시로 바로 인원이 투입되었는데, 그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시야 확보가 어렵습니다.”

“그 알파놈 말고도 매수된 새끼가 있는지 살펴. 본사 쪽의 인력도 다 투입해. 당장!”

“본사 쪽 인원을 전부 투입하면 본사 쪽의……, 알겠습니다.”

난색을 보이려던 비서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번복했다. 핏발이 선 눈을 형형하게 빛내는 라일의 상태를 보니 오금이 절로 저렸다.

그가 심어 둔 모든 인원이 활발하게 해진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도 라일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해진이 마지막으로 보였던 저택의 입구에서 그는 하염없이 초조하게 서성여야 했다. 실마리가 들린다면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기세였다.

낮에 뜬금없는 소식을 들었을 땐 비서는 의아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날 해진이 갑자기 숲 쪽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라일은 하필 중요한 화상 회의 중이었다. 최근에는 멀리 나가야 하는 모든 출장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어서 미룰 수가 없는 일정이었다.

이미 경호원에게 그 말을 듣자마자 마크와 사용인들이 놀라서 숲 쪽으로 달려갔기에, 비서는 차량을 준비했다. 라일이 바로 저택에 가겠다고 할 것 같아서.

그런데 한참을 찾아도 마크에게서는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걸 깨달은 비서는 이제 일도 다 미뤄 둔 채 저택의 CCTV를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 해진이 주로 가는 모든 곳을 살펴도 검은 머리칼은 흔적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잘 쓰지 않는 방들을 살필 때였다.

뜻밖의 인물이 응접실 중 한 곳에 앉아 있었다.

그 즉시 비서는 라일에게 신호를 보냈다.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하고 나온 라일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진이 사라졌다고.

다시 처음부터 찾은 녀석의 동선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고작 3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해진이 그 저택을 당장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사정을 몰랐다면 마치 다니엘만 기다렸다는 듯이 떠난 것으로 보였을 터다. 라일은 감히 다니엘이 그의 턱밑에서 이따위 수작을 부렸다는 것에 화가 났다. 그러나 이내 더 큰 절망에 빠져야 했다.

해진이 너무나도 머뭇거림 하나 없이 저택 밖으로 나서고 있어서.

심장의 통증이 미친 듯이 그의 허리를 꺾어 바닥으로 침몰시키려 하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도록 내리는 눈이 그대로 폐에 들어차기라도 한 것 같았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턱턱 막히는 꼴이 꼭 그랬다.

바로 오늘,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러나 라일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지금 그가 쓰러지면 해진을 되찾는 시간만 더 걸릴 뿐이니까. 예전에도 그는 흔적도 없이 다니는 녀석을 찾아낸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필시 그렇게 되리라. 그때와는 다르게 수색은 더 빨리 시작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해진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면 미쳐버릴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다. 분명 찾아낼 수 있으리라. 라일은 계속 주문이라도 걸듯 자신에게 되뇄다.

그런데 왜 이리도 소름 끼치게 불안한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막 버스에서 내린 해진의 앞에 익숙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한 번 돈을 뽑은 적이 있던 ATM 앞이었다. 멀리에는 그가 걷다 지쳐 머물렀던 낡은 모텔이 보였다. 라일이 해진을 찾겠다고 밤에 들이닥쳤던 바로 그곳이다.

모텔은 산 바로 밑 좁은 도로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이 아니었다면 이 외진 숲길에 차가 다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실제로 도로에는 오가는 차가 적어서 방금 버스가 지나간 바퀴 흔적만 선명했다.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한 숲 앞에서 해진은 고민에 빠졌다. 본래는 저 모텔에 다시 짐을 풀려고 했었다. 한번 해진의 정보를 라일에게 팔아 버렸던 곳이었으나 선택지가 없었다. 그의 목적지에서는 가장 가깝고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

시선이 다시 ATM으로 뚝 떨어진다. 발자국 하나 없이 하얗게 눈이 쌓인 기계 앞의 바닥을 보면서 해진은 묵묵히 생각을 이어 갔다.

원래는 여기서 조금 더 머무를 생각이었는데.

이번에는 지갑에 현금이 충분했다. 병원을 오가면서 찾아 둔 것들이었다. 준비는 단단히 할수록 좋으니 말이다. 그때처럼 짐은 단출했다.

그러나 앞으로 갈 듯 모텔 쪽을 바라보고 있던 해진은 끝내 등을 돌렸다. 눈이 오고 있지만 해가 지려면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서둘러 걸으면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겠지.

천천히 사박사박 눈을 밟았다. 불편한 다리는 눈길에서 극도로 불안정해졌으나 그는 용케 엎어지지 않았다. 손에 힘을 주어 트렁크로 중심을 잡았다. 덕분에 조금 삐뚤삐뚤하긴 해도 그의 발자국은 곧게 호수를 향해 나아갔다.

잊어버리고 싶지만 계속해서 의문이 그를 괴롭혔다. 여기까지 오면서 다시 건조한 머리로 생각하니 무언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의 라일을 생각하면 역시 직접 꺼지라고 말하는 편이 어울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친척까지 대신 보내며 경고를 할 것 없이 말이다.

물론 해진에게는 시간조차 내어줄 틈 없이 바쁠 수도 있겠다. 어쩌면 더 상성이 잘 맞는 오메가를 찾아내서 그럴 가치를 못 느꼈을 수도 있고.

그러나 행여 무언가 오해가 있었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미 해진은 충분히 너덜너덜했다. 모욕은 가시처럼 날아와 박혔는데 그걸 견디고 이해해야 할 책임이, 적어도 그에게는 없었다. 얇은 종이가 물에 젖은 것 같은 위태로움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그곳에서 찢어져 흩어지는 모습까지 보일 필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해진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걷기로 했다. 그러면 배신감마저 드는 이 기묘한 마음도 뒤로 훌훌 버리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라일은 이미 몇 번이나 해진을 찾아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라일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향하면 될 일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이제, 그곳까지 저를 데려다줄 약한 다리와 잠깐의 시간뿐이었다.

***

“으윽, 제발, 그게 아니라, 이게 다 다니엘이…….”

“닥쳐.”

해진을 침실 밖으로 불러낸 알파가 엉망진창인 얼굴로 라일의 앞에 널브러졌다. 경호원들이 저택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복도에 놈을 던져 놓는다. 몇몇은 조금 불편한 얼굴이었으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놈의 멍청한 행동 하나로 지금 저택의 모든 경호팀의 밥줄이 끊기게 생겼으니까.

심문이 끝나고 나서야 라일은 다니엘이 정확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감히 그의 저택에서, 감히 해진에게. 심지어 놈은 모두가 녀석이 숲에 갔다고 오해해 당황한 사이 재빨리 저택을 빠져나갔다.

곧 내장이 끊어질 것 같은 갈급함이 그를 덮친다. 해진이 무슨 오해를 했을지 눈에 훤해서.

‘저는 이제 더 떨어질 곳이 없어요.’

이 순간 다시 계약을 종용할 때 녀석이 한 말이 생각나는 건 이유가 있으리라. 어처구니없는 이 실수가 해진의 등을 툭 떠밀고 만 것이다. 녀석이 잠깐의 머뭇거림도 없이 단호하게 저택을 나선 이유를 라일은 똑똑히 알 것 같았다.

도무지 이 사태가 믿기지 않아서 라일은 무작정 방으로 올라갔었다. 그곳에는 정확히 해진과 녀석의 낡은 트렁크만 사라져 있었다. 이곳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흔적이 전혀 없는 것만 같았다.

덩그러니 놓여 있던 파란 목도리를 봤을 땐 그냥 딱 죽을 것만 같았다.

“해진의 소식은?”

“버스를 탄 것은 확인되었으나, 아직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라일은 제 입을 막았다. 울컥거리는 속이 제 안의 모든 걸 쏟아내고 싶어 했다. 갈비뼈가 하나하나 부러져 속으로 굽어 드는 기분이었다.

시야가 붉게 물든 채 돌아오지 않았다. 온 세상에 붉은 눈이 흩뿌려지는 이 광경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분명 해진을 찾는 건 시간문제이리라. 그런데도 자꾸만 늦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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