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본 회차에는 민감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니, 도서 감상에 참고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호수가 보고 싶어요.’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해진의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그건 해진이 유일하게 직접 가고 싶다고 말했던 장소였다. 왜 하필 호수였을까.
그러고 보니 그가 해진을 다시 데려왔을 때도 녀석은 어딘가로 꾸준히 향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해진이 남은 전 재산을 인출했던 장소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왜 하필 그때, 해진은 전 재산을 미련 없이 꺼내 들었을까.
“일전에 해진을 데려왔던 낡은 모텔.”
“네, 회장님.”
“그 근처에 호수가 있나?”
비서는 의아해하면서도 바로 확인을 위해 전화를 꺼내 들었다. 어두운 얼굴로 추이를 지켜보던 마크도 마찬가지였다. 숲이라는 소리에 행여 해진이 다칠까 봐 앞뒤 안 가리고 뛰어간 게 실책이었다. 방에 잘 있는지 먼저 확인을 해야 했는데. 그와 비슷하게 자책하는 사용인들의 소리도 저택을 음울하게 맴돌았다.
라일의 손아귀에는 아까부터 핏기가 없을 정도로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
도시 헤비레인은 겨울이 무척 짧았다.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온화한 기후가 내내 이어지다가 급작스러운 추위가 도시를 덮친다. 그렇게 잠깐 머물렀던 추위는 1월을 기점으로 흔적을 서서히 감췄다.
다만 비는 늘 곁에 있다는 듯이 겨울의 끝자락엔 종종 눈이 내리곤 했다. 무거운 비처럼 무거운 눈이.
한참이나 숲길을 헤맨 덕에 해진은 마침내 목표로 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수는 고요한 침묵에 감싸여 있었다. 사락사락 시나브로 쌓인 눈이 어느새 호수 근처를 온통 하얗게 물들여 놓았다. 이렇게 험한 날씨에 외진 곳의 볼품없는 호수에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해진을 제외하면.
잠깐 먹먹하게 호수의 전경을 눈에 담았던 그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다친 다리뿐만이 아니라 무릎 아래쪽에 거의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의 불안정한 다리는 훌륭히 그를 이곳까지 이끌어 주었으니 말이다.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그사이 익숙해졌다. 해진은 하필 오늘 이렇게 많은 눈이 오는 게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그의 마음처럼, 눈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덮어 주었으니까.
누구 하나 어딘가에 쓰러져도 눈이 그 처량한 모습을 가려 줄 테니까.
호수 너머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가족들은 저쪽에 앉아 찬란하게 빛나는 호수 표면을 바라보곤 했다. 관리되지 않은 들풀들이 바람에 나부꼈고 이따금 수면 아래로는 커다란 물고기의 그림자가 보였다.
꾸준히 걸음을 옮겼다. 위태롭지만 해진은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이 모여 앉아 있던 곳으로 가고 싶었다. 발밑에 닿는 눈의 감각이 조금 변화했다. 그사이 호수 가까이에 있는 잔디밭 위로 올라온 듯했다.
“……ㅈ……!”
해가 없는 게 아쉬웠다. 그러나 눈이 두껍게 쌓이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남기고 가는 더러운 발자국들도 전부 가려질 테니 말이다.
어느 순간 트렁크를 끌고 가는 게 무척 힘겨워졌다. 평평한 땅이 이어지는데도 이상하게 바퀴에 무언가가 엉겼다. 그게 제 미련이라고 생각한 해진은 추위에 곱아들어도 줄곧 쥐고 있던 손잡이를 탁 놓았다.
무겁게 뒤를 따라오던 트렁크가 호수의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진……!”
미련을 놓으니 한결 걸음이 가볍다. 이대로 곧장 호수를 가로지르면 가족들이 피크닉 매트를 펴던 자리에 당도할 수 있다. 발끝에는 감각이 하나도 없었다.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호수로 곧장 이어진 발걸음은 계속 같은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호수 건너편에 가기 위해 둘러 가는 일 없도록.
그렇게 점점이 이어진 그의 걸음이 호수에 가까워졌다. 얼음 아래에 자박거리며 요동치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디디려는 순간이었다.
“해진!”
멍하니 앞으로 앞으로만 걷던 그의 몸이 덜컥 멈추었다. 누군가 뒤에서 해진을 사정없이 끌어당겨 커다랗고 따듯한 품에 가두었다. 얼어 있는 발끝에 호수의 물이 스쳤는지는 감각이 없어서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앞으로, 한 걸음이었는데.
“해진, 멈춰!”
허리를 감싼 팔은 너무 단단해서 풀어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멍하니 호수 건너편을 보며 그는 서서히 땅으로 끌어 내려졌다. 뒤에 달린 온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해진을 계속 뒤로, 뒤로 잡아당겼다.
그는 저도 모르게 버둥거리며 앞으로 팔을 뻗었다. 잔뜩 헝클어진 라일의 페로몬이 호수 근처를 감싼 건 그때였다.
“가지 마.”
“…….”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귀 바로 근처에 닿았다. 그 뜨거운 입김이 살갗에 아프게 닿았다. 체념한 듯 팔을 땅으로 툭 떨어트린 해진은 시선만 계속 호수 건너편에 던져두었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라일은 전신이 덜덜 떨리는 감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페로몬은 제어하겠다는 의지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절망적인 감정이 여과 없이 밖으로 뿜어져 나간다. 평소 페로몬 갈무리를 결벽증처럼 해 오던 라일답지 않은 큰 동요였다.
무거운 비가 단단히 굳어 내려온 호숫가는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얗다. 그래서 해진의 검은 머리칼은 무척 파괴적으로 라일의 시야에 닿았다. 저 멀리서도 그곳에 해진이 있다는 걸 알 수 있게끔 말이다.
발견한 순간부터 라일은 미친 사람처럼 뛰었다. 해진의 걸음이, 위태롭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그 걸음이, 어딘가 이상해서.
호수는 하얗게 물든 탓에 어디가 어딘지 구분도 안 가는 모양이었다. 호수의 가장자리는 살얼음이 껴 하얀 눈을 모자처럼 덮어쓰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만큼은 우울하게 가라앉은 물이 똑똑히 보였다. 가운데까지 꽝꽝 얼 날씨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해진은 그걸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앞으로만 걸었다.
“내가 이런 말 할 자격 없다는 거 알지만, 이번엔 오해야. 그러니까, 제발…….”
그래서 라일은 처음으로 깊은 두려움을 느꼈다. 해진이 어디에 있든 종래에는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마음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알 수 있었다.
멀리 아무것도 없는 호수 건너편을 보고 있는 녀석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언제든지 그가 절대 쫓을 수 없는 곳으로 갈 준비가 된 것처럼.
그 모든 동요는 해진에게도 똑똑히 전해졌다. 그의 몸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팔은 사정없이 진동을 전해 주었다. 페로몬은 끝도 없는 절망을 담은 채 해진에게 절실하게 달라붙었다.
그걸 호숫가의 살얼음 보듯 무심히 바라보던 해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베르무스 씨.”
“……말해.”
이내 버석하게 흘러나오는 해진의 옅은 페로몬은 말과 함께 라일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그곳에 담겨 있는 게 아플 정도로 아무것도 없어서.
“제가 그걸 알아야 합니까?”
라일은 이제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해진을 붙잡고 있어도 잡은 것 같지가 않았다. 저 위험한 호수에서 뒤로 물러나고 싶은데, 그냥 서 있는 녀석이 너무나도 두려워서 잡아당길 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이렇게 붙들고 애원하는 것뿐이었다.
언제든지 라일의 손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해진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끝없는 좌절이 그의 어깨를 누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이 라일의 온몸을 질타하듯이 내리눌렀다. 그 운명이 너무나도 무겁고 무서워서 라일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뒤돌아 있는 해진의 배를 양팔로 끌어안는다. 당장이라도 뒤돌아보는 일 하나 없이 앞으로 갈 것만 같았다. 그를 홀로 이곳에 두고.
양 무릎에 차가운 눈이 닿았다.
“제발, 가지 마.”
“…….”
그는 각인을 깨달은 이후 해진이 하겠다는 그 무엇도 거부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순간, 라일은 꼴사납게 피를 토하더라도 해야 하는 게 있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녀석을 차가운 호수로 보낼 수가 없었다. 녀석이 원망을 엉뚱한 곳에 흘리고 있지 않은가.
“네게 각인했어.”
차라리 나를 쏴 버리지 그랬어. 이렇게 스스로를 차가운 물에 내던질 게 아니라.
“…….”
언제든 앞으로 내디딜 준비를 하던 해진이 순간 몸을 굳혔다.
양팔로 매달려 있던 라일은 그걸 똑똑히 느꼈다. 천천히 얼굴을 숙여 해진의 등에 이마를 맞붙였다. 계속 눈을 맞아 차가운 녀석의 몸이 아팠다.
이기적인 말로 들려도 어쩔 수 없었다. 라일은 이 순간 도박을 해야 했다.
“……이제 계약 따위 하자는 소리는 하지 않아. 그냥 내 곁에 있어 줘.”
해진의 이런 행동을 걱정하고 만류할 자격이, 라일에겐 없었다. 그러니 아직도 멍하니 호수 건너편만 보는 해진의 정신을 일깨워야 했다. 잔인하게도 이기적인 소리로, 해진이 모든 걸 훌훌 털고 저곳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설령 영영 미움받게 되더라도.
“각인 상대를 잃은 사람은 그대로 죽게 돼.”
“…….”
“……제발…….”
라일의 말에 그는 서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숲 쪽에서는 뒤늦게 그들을 따라잡은 경호원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몸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던 라일의 팔이 해진이 방향을 돌리니 거짓말처럼 풀린다. 다만 완전히 라일을 마주 보고 나자 다시 족쇄처럼 그의 허리를 잡았다. 못내 불안하다는 듯이.
해진은 고개를 서서히 숙였다.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라일의 자세가 영 어색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익숙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페로몬은 늘 이렇게 그에게 다가왔다.
지금 호수를 저로 대신 채우겠다는 듯 들이치는 라일의 페로몬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