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82화 (82/101)

#82

“……뭐라고요.”

각인이라니. 누가, 누구에게.

해진은 이제 가슴속에 꾹꾹 눌러 두었던 감정들을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절대 가족들의 곁에 갈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지금 라일이 알려주었으니까.

당장 눈앞에서 그가 죽어 나갈까 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해진은 자신이 이미 오래전에 본능으로 이를 알아차렸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해진이 마치 거대한 불이라도 된 것처럼 마냥 조심스러웠던 라일의 페로몬이 그걸 증명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지 허탈하다.

그리고 못내 화가 났다.

한번 치솟은 화는 끝도 없이 자라나기만 했다. 그저 표현할 줄 몰라서 꾹꾹 눌러 두었던 감정들은 그곳에서 곪고 병들어 까만 고름처럼 쌓여 있었으니까.

주삿바늘이 무서우면서도 해진은 끝까지 임신 사실을 확실히 알고 싶었다. 그래야 애먼 목숨을 데려가지 않을 테니 말이다.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그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각인이라니. 각인 상대가 없으면 각인한 사람도 죽어 버리는 걸 해진도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데, 알아 버렸다. 단순히 알고 있던 지식을 넘어서 라일의 페로몬이 절실하게 그걸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해진 네게, ……각인했어.”

그 순간 짝 하고 살 부딪히는 소리가 호수를 울렸다. 사락사락 눈이 수줍게 쌓이는 소리만 있던 적막한 곳을 찢어발기며.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라일은 고개를 홱 꺾고 말았다. 발갛게 달아오르는 그의 뺨을 바라보며 해진은 땅으로 끌려 내려온 것이 그의 몸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해라는 소리에 그도 무언가 사정이 있음을 짐작했다. 그러나 아까 떠올렸던 것처럼,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그간 보여준 자상한 태도가 진짜였다면, 그따위 모욕이 다시는 해진의 눈앞에 닥쳐서는 안 되었을 일이다. 거기에 각인까지 했다면 더더욱.

지나간 그의 서러운 5년처럼, 다시는 그러면 안 되었을 일이다.

“왜 내 목숨조차, 마음대로 못 하게 해.”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가 고요한 호숫가에 번졌다. 저 멀리 다가오던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곤 더 다가오지 못하고 멈춰 섰다.

알싸한 아픔이 손끝에서 시작되었다. 이내 그 아픔은 심장을 꾹꾹 누르듯 거대해졌다. 그 라일이 이 눈밭에서 무릎까지 꿇다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이미 삐죽하게 날 서 버린 해진의 마음이 온 사방으로 날뛰었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그가 재차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라일의 덤덤한 고해가 흘러나온 건.

“맞아. 내 탓이야.”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맥이 탁 풀렸다.

허탈한 심정이 불시에 몸을 훅 빠져나간다. 지금까지 척추를 꼿꼿하게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가 날숨과 함께 통째로 공기 중에 흩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아서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도 라일은 해진의 얼굴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해진은 끝내 하늘에 있는 가족들 곁으로 가지 못하고 차가운 땅으로 끌어 내려졌다. 그 허탈한 추락을 라일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눈치를 살피던 라일은 조심스럽게 제 뺨을 올려붙였던 해진의 손을 잡았다. 차갑게 얼어 있던 손은 갑작스러운 충돌에 아주 새빨개진 상태였다. 라일은 맞은 제 뺨이 아니라 빨갛게 곱은 해진의 손바닥이 못내 아프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곤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들었다.

양손에 따스한 장갑을 억지로 끼워 주고 나서야 라일은 다시 해진을 곧게 올려다보았다. 호수를 닮은 파란 눈동자가 절실함을 품은 채 그를 향한다.

그간 해진이 애써 외면하고 외면하던 감정이 그 속에 호수처럼 가득 들어 있었다. 각인했다며 제게 이기적으로 내뱉던 말과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

거대한 분노를 대신해 자리한 허탈함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그의 몸을 짓눌렀다. 아까부터 감각이 없던 두 다리는 이제 그를 앞으로 끌고 갈 힘이 없었다. 차가워서 감각이 없던 손은 하필 온기 따위로 감싸는 바람에 너무 아팠다.

몰라도 되는 아픔이었을 텐데.

그 순간 몸에서 훅 힘이 빠져나갔다.

겨우겨우 지탱하고 있던 무릎이 풀썩 꺾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갑작스럽게 바닥으로 쓰러지는 해진을 라일은 조금의 틈도 없이 받아냈다. 그의 모든 것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람처럼.

축 늘어진 해진이 라일의 품에 안겨 들렸다.

“집으로 가자.”

속삭이듯 라일은 귓가에 말을 걸었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그의 금빛 속눈썹이 보였다. 오래도록 밖을 헤맸다는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눈이 속눈썹에 맺혀 있었다. 이내 녹아버린 그것이 꼭 눈물처럼 라일의 눈가를 맴돌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집이라는 소리에 그의 저택을 쉽게 떠올리는 자신이 낯설었다.

***

눈을 한 번 감을 때마다 차창 밖에 보이는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축 늘어진 해진은 차 안에서조차 저를 내려 주지 않는 라일에게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온몸에 들러붙는 온기가 이제는 온몸에 통증을 짜내고 있었다.

그렇게 잠깐 눈을 뜨니 저택의 입구였다. 마크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잔뜩 긴장한 경호원들의 굳은 몸도 이따금 눈에 띄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니 그가 오래도록 머무르던 방이었다. 라일은 그가 줄곧 쓰던 침실 쪽이 아니라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늘어진 해진은 그가 하는 꼴을 보고만 있었다.

미리 지시했는지, 라일의 침실에 딸린 욕실에는 따스한 물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욕실에 어울리지 않는 푹신한 소파도 놓여 있었다. 그곳에 해진을 앉힌 라일은 조심스럽게 그의 신발을 벗기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그리곤 뜨거운 물을 덜어내어 그의 다리를 천천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

“…….”

라일은 줄곧 말이 없었다. 발가락에 닿는 물이 무척 뜨거울 줄 알았는데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아픔을 느낄세라 라일이 쉴 새 없이 주물러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발목을 오가는 손길은 무척 조심스러워서 간지러울 정도였다.

그 짓을 묵묵히 내려다보면서 해진이 불쑥 질문을 뱉었다.

“왜 각인했어요?”

왜 하필 나야.

발작처럼 묻는 그 질문에, 무릎을 꿇은 채 분주하게 손을 놀리던 라일이 우뚝 멈추었다.

다리를 잡은 그의 손이 벌벌 떨려 온다. 그는 차마 고개를 들어 해진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아까 해진이 허탈함에 무너져 내리는 꼴을 똑똑히 보고 말았으니까.

욕실을 가득 채운 훈훈한 수증기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습윤한 공기를 한 번씩 들이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질책과도 같은 저 말에 라일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

그래서 재차 물었을 땐 그저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해진의 차가운 무릎 위에 라일은 천천히 얼굴을 숙였다. 언젠가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말았던 그날처럼.

“미안해. 내가, ……미안해.”

습윤한 공기보다 더 축축한 감각이 해진의 무릎을 천천히 녹여 나갔다. 그게 기다리던 대답이었다는 듯이 해진은 말없이 그런 라일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미안해.”

널 놓아줄 수가 없어서 미안해.

그리고 널 놓지 않아도 될 핑계가 생겨 기쁜 나를, 용서해.

<챕터 10>

해진은 며칠을 내리 앓았다.

너무 아팠다. 온몸이 불덩이가 된 채로 혼몽한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고만 있었다. 마치 그동안 애써 미루고 외면하던 아픔이 일시에 달려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제 살아가야 하는구나.

아픔에 더운 숨을 색색 내쉬면서도 해진은 힘겹게 깨달았다. 그냥 다 등지고 갈 거니까, 다 놓고 갈 거니까 편하게 그 자리에 버려둘 수 있었다. 어차피 스쳐 지나갈 곳이니까 가볍게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해진, 조금만 더. 어서.”

무척이나 애절한 목소리가 그를 재촉했다. 껌뻑껌뻑 뜨거운 눈꺼풀에 힘을 주니 앞에는 수프를 조금 담은 스푼이 들이 밀어져 있었다. 해진은 무의식중에 입을 슬쩍 벌렸다. 조심스럽게 입 안으로 들어온 스푼은 곧 빠져나갔다. 무슨 맛인지도 모를 수프가 목으로 넘어갔다. 물컹한 감각이 거북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스푼이 다가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몸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데 이상하게 목 가누기가 쉬웠다. 의아함에 뻑뻑한 눈알을 조금 돌리니 너른 어깨가 보였다. 그제야 해진은 라일이 자신을 앉힌 채로 뒤에서 끌어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손수 밥을 먹이고 있었나 보다.

“이번엔 약이야.”

소곤소곤 작은 소리가 귓가에 들러붙는다. 마치 크게 말하면 해진이 파스스 부서져 흩어질까 두려워하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옷자락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와 사람들이 숨을 죽이는 소리도 너른 공간을 울렸다. 여기가 어디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해진은 무심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대번에 그를 감싸고 있던 몸이 바짝 굳었다.

“제발, 이것만 넘겨 봐. 응?”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절박해서 해진은 다시 무심코 입을 벌렸다. 외면하기도 힘들게 절절한 감각이 피부까지 파고들었다. 귀찮은 일이다.

이번엔 확연한 쓴맛이 나는 액체가 목으로 넘어갔다. 그게 싫어서 목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다만 실제로 소리가 흘러나갔는지 그냥 생각에만 울렸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한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이 손길에 도리질을 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따금 푸른 호수 같은 눈길이 절박하게도 애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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