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열이 오르는 바람에 정신까지 혼미한 해진은 그냥 흘러가는 빗물처럼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냥 버려두기조차 어렵도록 무겁게 자기주장을 하는 파란 눈이었다. 다행인 건 몸을 가눌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해지긴 했다는 점이다.
그때 몸이 위로 치솟는 느낌이 든다. 웅웅 머리가 울렸다.
“조금만 있다가 잠들어야 해, 해진.”
뺨이 단단하고 따듯한 어깨에 잔뜩 눌렸다. 그러나 저항하는 대신 해진은 파고들 듯 한층 고개를 늘어트리고 말았다. 일정한 진동이 둥둥 몸을 울렸다. 울렁이던 머리가 천천히 바닥으로 눌어붙었다.
무거운 머리로도 해진은 자신이 라일의 품에 코알라처럼 안긴 채 방을 맴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일은 한참이나 스푼을 들고 애원하고 나면 꼭 이 일을 반복했다. 그가 열이 올라 누워 있는 내내 몇 번이나.
이러니 꼭 거대한 신생아가 되기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해진, 잠깐만 눈을 떠 봐. 그렇지.”
너무 졸린데 라일은 이따금 그를 추어올리며 눈을 뜰 것을 종용했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는데 실제로는 미미하게 꿈틀거리기나 한 것 같았다. 볼에 부드러운 천이 스쳤다.
지금까지는 약을 먹어도 누우면 곧 토해내곤 했는데 이렇게 라일이 저를 안고 방을 걷기 시작한 뒤로는 나아졌다. 바로 토해내거나 위장이 뒤틀리는 기분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먹은 것도 없는데 끔찍하게 명치가 뒤틀리는 기분은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고통스러웠다.
“이제 자도 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라일이 깨우는 통에 멍하니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지던 해진은 드디어 스르륵 눈을 감았다. 무겁고 서러운 잠이 다시 그를 감쌌다.
그래도 어느새 이 너른 품이 퍽 익숙해졌다.
***
고요함이 모두에게 날개를 늘어트린 밤, 해진은 깨어났다.
정신이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꼭 끈끈한 물속에 잠겨 있다가 몸을 밖으로 빼내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 핑 도는 머리 때문에 길게 눈을 감았다 뜨니 제 옆에 웅크리고 있는 커다란 누군가가 잘 보였다.
“…….”
베개에 흩어진 라일의 머리칼이 은은하게 비쳐드는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별이라도 내려온 것 같은 그 장면을 홀린 듯 본다.
자신이 여기 왜 이러고 있었는지 의문을 품자마자 멍한 머리로 아픈 기억이 지나간다. 꼭 누군가가 녹화해 둔 영상을 무감각하게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방을 둘러보니 라일의 침실이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묘한 감각이 해진을 덮친다. 그러다 문득 충동이 일었다. 모처럼 달이 이렇게 밝으니 어머니가 읽어 주신 동화책이 보고 싶었다.
거의 반쯤 꿈을 헤매면서 해진은 가족의 흔적을 따라 움직였다. 함께했던 호수로는 갈 수가 없어졌으니 이렇게라도 추억을 더듬어야 숨을 쉴 자격이 생길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자 제 위에 놓여 있던 묵직한 것이 툭 떨어진다. 지금까지 저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던 라일의 팔이었다. 무척 깊게 잠들었는지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해진은 그 팔을 얌전히 내려놓아 주었다.
침대 밑으로 내려서자마자 풀썩 다리가 풀린다. 다만 거의 이불에 가까운 두툼한 러그가 깔려 있던 덕분에 아프지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비틀거리며 일어난 해진은 다시 앞으로 걸었다. 잠깐 눈을 깜빡인 것 같은데 어느새 복도였다.
싸늘한 감각이 피부에 들러붙었다. 자신이 간단한 옷차림인 걸 그제야 깨닫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서재가 그리 먼 건 아니었으니까. 다만 다친 다리가 묘하게 둔한 느낌이 들긴 했다.
한참을 더듬더듬 움직였는데도 복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방은 그리도 빠르게 빠져나온 기분이었는데 퍽 이상한 일이다.
그때 뒤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해진!”
문이 거칠게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연거푸 났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해진이 멍하니 뒤를 돌아봤다. 곧 라일이 그가 있는 복도로 다급하게 나왔다.
마침 다리가 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서 해진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저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크게 뜬 라일이 정신없이 달려오는 게 생경하게 보였다. 빠르게 가까워진 라일의 품이 시야를 가리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몸이 붕 떠오르며 머리칼이 뒤로 조금 흩날렸다. 그 틈을 타서 절박한 라일의 페로몬이 머리칼 사이사이를 채우며 지나갔다. 꼭 단번에 숲에 내던져지기라도 한 듯한 감각이라 잠이 깼다.
그를 품에 가득 끌어안은 라일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넘어질 틈도 없이 단단하게 안아 든 주제에 온몸이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렇게 해진을 끌어안은 채 숨을 겨우 내쉬던 라일이 가까스로 입을 뗐다.
“어디를, ……어디를 가려 했어.”
파르르 떨리는 말끝을 해진은 덤덤히 귀에 담았다. 더는 흘려들을 수 없을 정도로 제게 매달리는 두 팔에도 시선을 주었다.
“서재에…….”
짤막한 그의 말에 라일은 잠깐 침묵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불쑥 해진을 번쩍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라일의 품에 얼굴을 묻었던 해진은 이 익숙한 자세에 곤혹스럽게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무어라 말할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은 서재에 다다랐다. 그렇게도 길고 춥기만 하던 복도가 이리도 쉽게 끝이 났다.
“…….”
라일은 퍽 익숙한 몸놀림으로 해진을 소파에 앉혀 주었다. 몸이 푹신한 쿠션에 파묻히기가 무섭게 곁에 있던 담요로 꼼꼼하게 그를 두른다. 그러는 한편 반대쪽에 있던 스툴까지 끌어온 그가 해진의 다리를 그곳에 올려 두었다. 계속 무감각하던 다리는 편한 자세가 되니 이제야 통증을 호소했다.
따듯한 기운에 해진을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빼고 말았다. 그런 그를 잠시 살피던 라일이 이번엔 책장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해진이 보곤 하던 동화책을 든 그가 거침없이 다시 다가왔다.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 들자 라일이 이번엔 소파와 해진 사이에 큰 몸을 밀어 넣었다.
“……불편해요.”
이제는 아프지도 않은데 밥을 먹이듯 저를 뒤에서 끌어안는 자세가 편할 리가 없었다. 서슴없이 그 사실을 지적하는데도 라일은 막무가내였다. 기어코 제 품에 해진을 가득 욱여넣고 나서야 그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에 닿는 머리가 이번엔 꽤 묵직했다.
“제발.”
잔뜩 웅얼거리는 소리에 어깨가 다 징징 울렸다. 해진은 아직도 저를 끌어안은 라일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
결국 폭 한숨을 조금 내신 뒤 무릎에 올라온 책을 집어 들었다. 아직 몸이 조금 으슬으슬하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사실, 라일의 품이 혼자 앉는 것보다 더 포근하긴 했다.
***
한참 앓고 일어났더니 무언가 바짝 타서 말라버린 재가 된 것 같았다. 분노로 태우려고 한 게 제 몸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어지럽게 머리를 떠다니는 생각은 여전히 부옇긴 해도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라일은 서재를 나온 뒤로는 막무가내로 굴진 않았다. 그저 눈을 떴는데 또 해진이 사라져서 무척 놀랐다는 것처럼.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변해 버렸다.
“다리가 너무 조이지는 않나?”
발목까지 올라오는 푹신한 양말을 신겨 주면서 라일이 물었다. 침대 아래에 꿇어앉아서 조심스럽게 해진의 발을 매만지는 모습이 익숙하기까지 했다.
포근하게 감싸는 양말을 신으니 발목의 통증이 좀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해진은 어쩔 수 없이 괜찮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힘없이 눈으로 웃어 보인 라일이 이번엔 겉옷을 들고 와서는 입혀 주기 시작한다. 역시 불편한 노릇이었다.
“이러지 마세요.”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라일은 해진을 직접 보살피지 않으면 앉은 자리에서 말라 죽을 식물처럼 대했다. 얼어붙은 호숫가에 뿌리내리고 싶었는데 그걸 달랑 뽑아서 저택의 화분에 옮겨 온 격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일단 라일이 하는 짓을 두고만 보았다. 아픈 내내 해진을 직접 보살핀 것도 라일이라고 했다. 덕분에 이 손길이 익숙해서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능숙하게 옷을 골라 와 입히는 그를 보면서 그간 옷방에 그날 입을 옷을 놓았던 것도 라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밖에서 마크가 건네주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해진이 깨어난 이후엔 침실에 연결된 응접실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마치 누가 해진을 훔쳐 가기라도 할 것처럼.
대체 각인이 뭐기에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각인이 정확히 뭐죠?”
“…….”
섬세하게 해진의 옷깃을 정리하던 라일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긴장하기 시작하는 그의 페로몬이 차분하게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다가 이내 가까스로 동요를 수습하듯 흔적을 지워 나간다. 해진은 라일이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그 궤적을 눈에 똑똑히 담았다.
“곧 자료를 정리해서 가져올게. 가급적이면 서적으로 출판된 자료로.”
“왜요?”
“……그게 더 믿기 쉬울 테니까.”
일리 있는 말이기에 해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멈칫했던 라일은 이내 한쪽에 있던 물을 떠 와 해진에게 건네주었다. 목이 그렇게 마르지는 않았으나 일단 손에 잔을 쥐니 또 마시고 싶어진다.
천천히 물을 넘기는 그를 보면서 라일은 쓰게 웃었다. 그리곤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 앞으로 나는 영원히 너를 해칠 수 없을 거야. 그러니 안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