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84화 (84/101)

#84

마치 지금까지 해진이 라일을 두려워해 피했다는 듯한 말이었다. 그 가정에 무심코 동조하던 해진은 이내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두려움이 멀게 느껴졌던 게.

오히려 두려움은 라일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지금도. 간간이 발작하듯 몸에서 빠져나오는 페로몬은 하나같이 그런 짙은 두려움을 품은 채 해진의 곁을 맴돌았다.

“…….”

라일은 묵묵히 해진이 다 비운 물잔을 받아 들었다. 그 자연스러운 행동이 이상하게 톡톡 눈에 걸린다.

무언가 시기를 놓쳐 버렸다. 호수에서 겨우 끌어 올린 분노가 다시 갈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이곳에 돌아온 뒤로 일주일이 넘게 앓아누운 탓에 더 그랬다.

아픈 아이처럼 다가오는 온기를 미처 놓지 못한 사이 라일은 한층 더 그에게 스며들었다. 어쩔 수 없다는 변명까지 대신 한가득 쥔 채로.

덕분에 해진은 이 묘한 상황이 석연치가 않았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간 쌓인 울분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옅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화는 어떻게 내는 거였던가.

해진이 시기를 놓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사용인들이 그에게 무례하게 굴었을 때, 처음 계약에 명시된 식사가 제때 나오지 않았을 때. 처음 라일이 그에게 모진 말을 했을 때.

그 모든 순간에 해진은 화낼 시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꾹꾹 눌러 둔 가슴의 상자는 터져 나갔으나 정작 그것들을 어디로 어떻게 그러모아야 하는지 길을 잃었다.

잠깐 응접실에서 업무를 보고 오겠다며 라일이 방 밖으로 나가는 순간까지, 해진은 계속 감정의 자취만 더듬어야 했다.

***

달칵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라일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직까지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기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해진이 다른 이의 손을 타게 둘 수가 없었다.

성치도 않은 다리로 오래 눈밭을 헤맨 탓에 해진의 몸 상태는 다시 말이 아니었다.

일주일이나 엄청난 고열에 몸부림치는 해진을 보면서 라일은 거대한 불구덩이에서 밤을 지새우는 기분마저 느껴야 했다. 병원으로 향해 봐야 당장은 방도가 없다는 소리에는 의사의 목을 조를 뻔했다. 행여 녀석이 다시 제 팔에 꽂힌 링거에 심력을 쏟을까 라일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심지어 해진은 위가 약해서 약도 제대로 소화하질 못했다. 오래도록 불규칙한 식사를 한 데다가 스트레스가 많았을 테니 만성적인 문제가 된 것도 당연했다. 심혈을 기울여 식단을 신경 쓸 때는 드러나지 않던 문제가 몸의 균형이 무너지니 이리도 티가 났다.

라일은 절실히도 해진을 부여잡고 입에 음식을 흘려 넣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를 거부하는 몸짓에는 바짝바짝 입이 말랐다. 열이 오른 몸이 바르작거리면 내장이 끊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애원 끝에 잘 먹여도 바로 누우면 반드시 구역질을 했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삼십 분이 넘게 해진을 안고 방을 걸었다. 조금이라도 위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해진이 앓는 일주일간 라일은 거의 잠들지 못했다. 녀석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고 나서는 습관처럼 불면증이 찾아왔으나 이렇게 오래 깨어 있는 건 처음이었다.

잠깐 눈을 뗐는데 또 해진이 사라졌을까 봐 두려웠다.

우성 알파인 그의 괴물 같은 체력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버티고 버티다가 녀석이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하니 긴장이 탁 풀렸다. 라일은 버틸 재간도 없이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눈을 뜨니 다시 옆이 비어 있었다.

그 순간의 섬뜩함을 생각하던 라일은 주저앉듯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때 뚝 떨어진 심장이 아직도 절반쯤 뭉개져 있는 기분이었다.

“…….”

핏발 선 눈동자로 휴대폰을 들어 밖으로 지시를 보낸 라일이 다시 고민에 잠겼다. 이리도 심혈을 기울여 노력했는데도 결국 빈틈이 있었다.

절박하게 해진의 모든 것을 챙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고작 거슬리는 알파를 저택에서 치우려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다. 이러니 한시도 해진의 곁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라일은 해진을 다시 데려온 날부터 이렇게 짬을 내어 응접실에서 업무처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곁에서 조금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또 있었다.

“…….”

단호하게 앞으로만 걷던 해진의 걸음을 떠올리니 두려움이 치솟았다. 제 입가를 틀어막으면서 라일은 두려움으로 점철된 페로몬이 흘러 나가는 걸 미처 막지 못했다.

지금 이 응접실을 비롯해 주변의 모든 방은 무척 되다 만 모양이었다. 라일이 방 안에서 위험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치우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해진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녀석이 정신을 잃은 사이 지금 그들이 사용하는 침실까지 모든 정리가 끝났다.

화장실의 거울부터 물컵 하나까지 전부 유리가 아닌 것으로 바꾸었다. 넥타이 종류는 전부 치워 버렸고 창문은 아예 열리지 못하도록 해 놨다.

그러나 손을 대고 또 대어도 불안하기만 하다. 이미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해진을 놓쳐 버리지 않았던가.

분명 다음 기회는 없으리라.

라일이 끝없는 절망에 빠진 사이 밖에서 종이 울렸다. 지금 그는 이 근처로 아무도 못 오게 사방을 경계 중이었다.

“들어와.”

“여기 검토하셔야 할 서류들입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급한 출장이 있는 것으로 꾸며 두었습니다.”

“잘했어.”

가까스로 허리를 펴고 안은 라일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당연하지만 그가 저택에 틀어박히면서 많은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급한 의사결정을 마무리한 라일은 제일 시급한 명령을 내려야 했다.

“정신과 의사를 알아봐.”

“……회장님의 전담 전문의를 바꿀 계획이십니까.”

어릴 적의 사고 탓에 그에게는 이미 정신과 전문의가 하나 붙어 있긴 했다. 그러나 라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분야에서 최고인 전문의는 안타깝게도 알파였다.

“아니, 해진이 치료받을 거야. 그러니 알파가 아닌 자로 알아봐.”

이렇게 일 처리를 하면서도 그의 신경은 온통 등 뒤에 있을 침실에 쏠려 있었다. 해진의 속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제 뺨을 때리며 화를 낼 때는 차라리 괜찮았는데, 아프고 일어난 뒤가 너무 이상했다.

왜 이런 저를 가만두고 보는 걸까. 조금은 편해진 녀석의 말투가 기꺼우면서도 라일은 못내 무서웠다.

“네. 그리고 매수된 경호원 문제는 지시하신 대로 해결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더는 이 시꺼먼 집착을 숨길 수가 없었다. 꾹꾹 눌러 두었던 이 절박함을 에둘러서 표현하는 게 그의 최선이었다.

고작 돈 따위에 매수된 경호원은 합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리고, 감히 해진에게 모욕을 쏟아낸 다니엘 또한.

이게 다 어중간하게 주변을 밟아 온 그의 탓이었다. 그냥 전부, 눈앞에서 치워 버리면 되는 것을.

그의 핏발선 눈에서 형형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

날뛰는 페로몬을 겨우 진정시키고 나서야 라일은 해진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종을 울리고 침실 문을 열자마자 창가에 서 있는 해진이 눈에 들어왔다.

“……해진.”

애써 침착을 가장했으나 해진에게 닿을 때 즈음엔 뛰는 것과 다름없는 걸음걸이였다.

“창가에, ……이렇게,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안 돼.”

“어차피 안 열리던데요.”

“……안 돼.”

그냥 답답해서 환기하고 싶다는 뜻인 건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라일은 창문 근처에 있는 해진의 모습을 버틸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녀석을 끌어안은 손이 결국 형편없이 떨렸다.

아픈 녀석이 1층의 손님방에 있다가 사라졌던 날, 그는 똑똑히 기억했다. 창문으로 향하던 해진의 페로몬이 퍽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는 사실을.

다 이유가 있는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원래처럼 2층에 녀석을 눕혀 두었다면 어땠을지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고통스러웠다.

억지나 다름없는 짓인데도 해진은 선선히 그가 이끄는 대로 침대로 돌아왔다. 그 미적거리는 걸음걸이 하나에도 라일은 쉬이 두려움을 느꼈다. 예전처럼 단순히 녀석의 페로몬이 몸에 옮은 게 아니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짜내어 올린 오롯한 그의 두려움이었다.

“전 계속 이 방에 있어야 합니까?”

그들은 줄곧 라일의 침실에 있었다. 물론 해진은 아직 조금만 움직여도 이마가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욱신거리던 다리도 뜨거워졌다 마비된 듯 무감각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조금 전부터는 시큰거리는 감각마저 더해졌다.

답답한 기분이 몸을 틀어쥐어서 해진은 무심코 창문을 열려고 했다. 자물쇠까지 걸려 있는 걸 보고 조금 당황했지만 말이다.

기어코 감금까지 당하는 걸까.

“저쪽 침실이 더 마음에 들면 옮기면 돼. 준비는 마쳐 두었어. 혹시 이 저택이 아닌 다른 곳이 좋다면 그것도 괜찮아. 시간만 조금 준다면 준비해 두도록 할게.”

그러나 라일은 덤덤하게 해진의 의혹을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허리 근처에 쿠션을 쌓더니 다친 다리의 무릎 뒤에도 푹신한 것을 깔아 주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수발이었다.

그 손길을 보며 한 가지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해진은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으리라. 다만 그 곁에는 이렇게 계속 라일이 있을 뿐.

“…….”

애매한 기분이 들어서 또 곤혹스럽게 눈가를 찌푸렸다. 아직도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었고 라일을 보면 이따금 기이한 충동이 들었다.

그러는 한편 이 따스한 손길이 더없이 익숙했다. 포근하게 저를 감싸는 침구에서 나는 섬유유연제의 내음조차 따사롭게 느껴진다.

밖이 저리도 흐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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