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85화 (85/101)

#85

“왜 불편하게 여기서 업무를 보는 거죠. 출근은요.”

“…….”

울렁이는 감각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혼자 진득하니 내면을 조금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라일은 한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자연스럽게 기대면서도 해진은 계속 혼란을 느꼈다.

그래서 가볍게 물었다. 그러자 그에게 이불을 덮어 주던 라일이 우뚝 멈추었다. 잠깐 거세게 숨을 들이쉬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똑바로 시선이 마주친다.

“내가 출근하면, 뭐 하게.”

새파란 눈이 피로를 덕지덕지 매단 채 그를 향하고 있었다. 어딘가 기이한 감정으로 번들거리는 그 눈길은 광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해진은 더욱 제 상태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눈앞의 라일이 도무지 무섭지 않아서.

그의 페로몬이 이토록 절박하게 해진에게 손을 내밀고 있어서.

“라일.”

무심코 이름을 불렀다. 혀를 넘어가는 단어가 너무 낯설어서 오돌토돌했다. 요철 같은 그 감촉을 매만지며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해진이 앞으로도 그를 베르무스 씨라 부를 일은 없어졌다는 걸.

“응.”

제게 아무렇지도 않게 온순하게 대답하는 라일이 너무 이상하다. 저렇게 당장이라도 해진을 잡아 가두고 싶다는 눈길을 하고도 끝내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 주는 저 손이.

“발목이 아파요.”

“응.”

툭 튀어 나간 말은 무척이나 생뚱맞았다. 아까부터 시큰거리는 발목이 신경이 쓰였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정답이었다는 듯 라일은 대번 형형하게 뜨고 있던 눈매를 내리누른 채 침대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해진의 다친 발목을 주물렀다. 해진이 평생 스스로 발목을 매만진 것보다 그가 최근 만진 횟수가 아득하게 더 많을 지경이었다.

가까스로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한 해진은 지금 가장 필요한 걸 떠올렸다. 역시 이 답답함을 해결할 방법이 필요했다.

***

며칠간 해진은 대체로 멍하니 시간을 죽이기만 했다. 그래도 때로는 갑갑한 기분이 치솟는 게 변화라면 변화였다. 라일이 그야말로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줄곧 이래 왔다는 듯 태연하게 해진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아파서 의식이 없을 때는 상관없었으나 멀쩡히 눈을 뜨고 있으니 영 부담스럽다.

게다가 해진이 미열이라도 날라치면 라일은 금방이라도 목이 매달린 사람처럼 굴었다. 침대 근처를 벗어날 수도 없게 하는 바람에 온몸이 말랑한 솜이라도 된 것 같다.

가끔은 그 솜이 비를 잔뜩 머금었지만.

“내려 주세요.”

“안 돼.”

“…….”

식당에서 방으로 돌아오는 길, 라일은 꿋꿋하게 해진을 품에 안아 든 채 걸었다. 해진이 미간을 찌푸리자 맞닿은 몸이 바짝 굳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라일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뜬금없이 발목이 아프다는 말도 하지 말 걸 그랬다. 그날 이후로는 발목이 아플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한 번도 제 다리로 걸어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의 다리가 땅에 닿는 순간 부러지기라도 할 듯이 라일은 극성이었다.

결국 침대에 해진을 올려 둔 그는 세심하게 이번엔 열을 재었다. 어제보다는 정상에 가까운 체온이 체온계에 표시되었다.

물끄러미 같이 그걸 바라보던 해진이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라일의 페로몬이 범람하듯 쏟아져 나왔다가 다시 사라진다.

몇 번을 봐도 경이로운 페로몬 컨트롤이었다. 본다고 한들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우성은 우성이구나 해진은 멍하니 생각했다.

모처럼 밥을 먹어도 속이 불편하지 않은 날이었다. 그동안 해진은 무서울 정도로 관리되는 식단 덕분에 상했던 위장을 많이 회복한 상태였다. 다리는 여전히 아픈 것 같지만 일단은 체력을 보존하는 게 먼저라고 라일은 설명했다.

어쨌든 배가 부르니 나른한 감각이 들었다. 열이 없다더니 미약하게 기운이 솟는 것 같기도 하고, 모처럼 의욕이 드는 날이다. 그러니 목욕을 좀 해야겠다.

“어디 가려고.”

“목욕을 할 겁니다.”

다시 페로몬이 불쑥 코끝을 스친 뒤 사라진다. 라일은 이따금 페로몬 조절이 힘들어진 사람처럼 굴었다. 생각해 보면 그의 페로몬을 자연스럽게 느낀 지 좀 되지 않았던가.

“준비를 해 둘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다리가 불안해서 안 돼.”

그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말은 다리 핑계를 대고 있지만, 흡사 당장이라도 해진이 목욕물에 빠져 죽겠다고 선언이라도 한 것처럼.

정말이지 곤란하고 또 곤란하다.

해진은 또 미약한 한숨이 뻗어 나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라일의 몸이 움찔 굳는 게 보였다. 답답한 심정이 이따금 가슴을 찢을 듯 구는데도 방법을 모르겠다.

“알아서 하세요.”

“응.”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몸이 번쩍 들렸다. 저를 인형처럼 이리저리 들고 나르는 라일의 행동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평생 이래 왔던 사람처럼.

그나저나 기다려 달라고 해 놓고 왜 갑자기.

어리둥절하게 보고만 있으니 라일은 그를 욕조가 있는 욕실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해진의 다리를 닦아 주느라 놓았던 푹신한 소파가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에 해진을 앉힌 그는 곧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

물소리를 들으며 해진은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았다. 호수에 가는 길을 들킨 여파가 퍽 길게 이어질 모양이었다.

가만히 서슴없이 내딛던 제 걸음을 해진도 똑똑히 기억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 왔던 정리가 그런 의미였다는 것도. 당장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면 그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가물가물 수증기가 차오르는 욕실에서 상념에 잠기자 꼭 눈 오는 그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분명 살짝 샘솟았던 의욕은 금방 온데간데없었다. 최근 들어 기분이 이리저리 극심하게 왔다 갔다 했다.

때로는 이 갑갑함에 당장이라도 창문을 깨고 싶었다. 그러나 또 가끔은 라일이 뭘 하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삽시간에 추욱 늘어진 해진에게 라일이 다가왔다. 그는 가만히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해진의 몸을 펴 의자에 길게 늘어트린다. 해진은 마치 인형처럼 순순히 몸을 펴고 푹 기댔다.

잠옷 단추에 닿는 라일의 손끝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

“…….”

그냥 준비만 도와주는 줄 알았는데 퍽 섬세한 행동이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에도 라일이 앓아누운 그의 몸을 몇 번이나 직접 닦아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각인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제 앞에 무릎까지 꿇은 채 옷을 벗겨내는 라일을 보며 그는 흐르듯 생각했다.

각인에 관한 자료를 준비해 준다고 했으나 그건 해진이 몸을 좀 추스른 뒤로 미뤄졌다. 정보를 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 그저 부담될까 봐 미룬 것이라고, 라일은 꼼꼼하게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로의 숨이 느껴질 것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 해진은 멍하니 라일의 손끝에만 집중했다. 톡톡 단추가 하나둘 풀려 감에 따라 맨살에 축축한 공기가 닿는 게 느껴졌다.

풀어져 속을 내보이는 옷가지를 무심히 바라보던 해진은 이번엔 라일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내리깔고 있는 그의 금빛 속눈썹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저곳에 눈송이가 눈물처럼 고여 있던 장면도 덩달아 기억을 침범한다.

“춥진 않아?”

“네.”

단추를 다 풀어낸 라일의 손끝이 미약하게 배꼽 근처를 스쳤다. 몸이 묘하게 달아오르는 기분마저 들었다. 다시 열이 오르나 보다, 해진은 무심히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상의를 다 벗긴 라일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번엔 해진의 바지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는 해진이 영 이상하다는 듯 손길이 어색해졌다.

이상하게 제지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진은 그저 가늠이라도 하듯 사르륵 빛을 반사하는 라일의 머리칼을 보고만 있었을 뿐이다. 습윤한 공기 때문에 살짝 젖은 그의 금발이 몇 가닥 흘러 내려와 있었다.

허리 부분이 밴딩으로 된 바지가 내려가니 최근 더 볼품없어진 허벅지가 드러난다. 왼쪽 종아리에는 차 문에 찢긴 흉터가 있었다. 천 자락이 바닥에 풀썩 내려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습관적으로 해진의 발목을 건드리진 않았는지 두 손으로 그의 발을 쥐었던 라일이 다시 손을 뻗었다. 속옷도 저항 없이 전부 내려갔다.

옷을 다 벗기고 나서야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라일은 답을 구하듯 한참이나 해진의 얼굴을 살폈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니 한참이나 허공에서 페로몬이 얽혔다. 무방비한 나체가 되었는데도 위급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크게 울렁이는 라일의 목울대를 보며 해진은 자신이 참으로 오랜만에 그에게 나신을 내보이고 있다는 걸 상기했다. 정신없이 앓아누웠을 때를 제외하면.

시험이라도 하듯 한참을 그렇게 라일을 내려다보았지만, 이전에 겪었던 난폭한 행동들은 역시 온데간데없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렇게나 그의 페로몬은 무얼 원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욕조로 옮겨 줄게.”

“네.”

아까보다도 더 조심스러워진 라일의 손길이 해진을 들어 올렸다. 맨살에 와 닿는 뜨거운 손바닥에 슬쩍 몸을 움츠린다. 이번엔 크게 마른침을 삼키는 라일의 목이 시선에 똑똑히 들어왔다. 안기고 나니 치부까지 다 내보이는 자세였지만 이제 와서 내외할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해진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이 언제 이렇게 길어졌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할 동안 따듯한 물이 피부에 닿았다. 욕조로 푹 가라앉으니 차르륵 물 쏟아지는 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라일은 아예 의자 하나를 가지고 와서는 그의 곁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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