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86화 (86/101)

#86

“계속 거기 그러고 있을 겁니까.”

“응.”

그냥 어깨를 한번 으쓱한 해진은 길게 욕조에 기대는 걸 택했다. 살다 살다 라일이 목욕 시중을 다 들어 주고 현실감이 영 없었다.

욕조에는 입욕제가 풀어져 있었다. 마크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이리 물 낭비를 할 때면 항상 애용하던 바로 그 향이었다. 그간 라일의 무심함이 조금은 남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이 저택에서 자신이 먹고 입는 모든 것들에 라일이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건 각인 사실을 들은 지금도 퍽 의외였다.

“……이거.”

그때 라일이 욕실 한쪽을 뒤적이더니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가져다가 해진의 앞에 동동 띄워 주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달기도 했던 노란 오리였다.

“…….”

늘어져 있던 해진조차 무심코 허리를 세우고 일어나게 할 만한 행동이었다. 아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손이 이상하게 오리를 향해 다가갔다. 마크가 보여줄 땐 애써 만져 볼 생각도 안 했는데, 손바닥에 꽉 차는 고무 오리의 촉감이 신기했다. 몰랑몰랑 구겨지는 오리의 얼굴이 꼭 생글생글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니 손바닥이 홀린 듯이 오리를 마구 매만지고 있었다.

“……몇 개 더 가져다줄까.”

“제가 애인 줄 아십니까.”

“…….”

퉁명스럽게 말하고 나서야 해진은 손을 멈추었다. 고개를 슬쩍 숙인 채 연한 분홍빛 수면에 비치는 라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라지 말고 들어.”

“네.”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는지 라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뜬금없는 서두에도 해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의 각인 소식보다 더 놀랄 만한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어차피 손에 댄 것, 오리를 양손으로 쥔 해진이 다시 욕조에 길게 기댔다.

“곧, 병원에 가 봤으면 해. 다리도 다시 검진을 받아야 하고.”

“네.”

몇 번이나 다리 검진을 받아 본 끝에 얻은 묘한 예감이 있었다. 이번에도 의사의 조심하라는 잔소리가 들리겠지. 어쩌면 또 깁스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정신과 상담을, 받았으면 하는데.”

이번엔 섣불리 성의 없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손안의 오리를 빙그르르 꾹꾹 눌러 가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라일은 재촉하지 않고 물을 조금 떠서 해진의 어깨에 뿌려 주었다. 간헐적인 따듯함이 자꾸만 움츠러들려는 해진의 어깨를 다독였다.

오리의 까만 눈이 오므라들었다 펴지기를 반복한다. 아픈 와중에 그가 느꼈던 가장 강렬한 감정이 떠올랐다.

살아가야 하는 건가.

갑갑한 마음은 여전했다. 이대로 이렇게 저택에서 라일에게 온몸을 맡긴 채 살아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영원히 이렇게 그를 곁에 두는 걸 버텨 낼 수는 있을까. 방법이 필요한데 병원에 가면 그걸 찾을 수 있나.

다리처럼 마음도 이리 아프니 병원에 가면 되는 걸까.

“네.”

한참이나 침묵한 끝에 해진은 다시 툭 대답을 던졌다. 그걸로도 충분하다는 듯 라일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뜨거운 물을 해진의 어깨에 부어 주기를 반복했다.

사르륵 몸을 타고 내려가는 목욕물이 안에 머금은 입욕제의 향을 남기며 흩어졌다. 이 향기가 썩 마음에 들어서 애용하던 것이었다. 분홍색으로 물드는 물 색깔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말이다.

그러다 문득, 이 입욕제의 향이 라일의 페로몬과 조금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

다리에 매달린 깁스를 보며 해진은 가만히 다리를 까딱까딱 움직여 보았다. 마음처럼 움직일 리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이 솟았다.

“후…….”

결국 이 무거운 깁스를 또 하게 되었다. 벌써부터 갑갑함이 느껴져서 곤란하다. 씻는 게 제일 고역이었다는 회상을 하자마자 몸이 바짝 굳었다. 이번에야말로 라일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게 뻔히 보여서 한층 곤란해졌다.

“이쪽입니다. 브라이트 씨.”

“네.”

“회장님은 빠르게 일 처리를 하고 돌아오실 겁니다.”

“……네.”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라일의 비서는 일정을 알려주었다. 정말 본사에 들어가 급한 일만 딱 하고 나올 작정인 듯했다. 그런데 비서는 왜 이곳에 남겨 두고 간 걸까.

“휠체어에 타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괜찮아요. 마크.”

마크도 일정에 따라붙었다. 이대로라면 영영 걷는 방법을 잊어버릴까 봐 무서울 정도였기에 해진은 목발을 짚으면서도 불편하게 걷는 쪽을 택했다.

같은 저택에 있는데도 해진은 마크의 얼굴을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았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라일은 해진의 근처에 사람들이 아예 오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대로 세상에서 자신을 고립시킬 작정은 아닌지 덜컥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인상이라도 한 번 쓰면 금방 바닥에 깔려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는 라일의 페로몬을 떠올리니 걱정은 금세 잊혔다. 각인이 얼마나 무서운 현상인지 해진은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을 보내다가 드디어 병원에 왔다. 예상대로 다리는 엉망이었다. 차가운 눈밭을 오래 걸은 게 치명적이었던 것 같았다. 너무 오랜만에 침대 위를 벗어나는 거라 그런지 병원인데도 무서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정신과 상담만 남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분야 최고라서 추천해 드린 거긴 하지만, 다른 의사도 알아보고는 있습니다.”

“괜찮아요.”

만나야 할 의사가 알파라고 했다. 막연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해진이지만 라일이나 비서가 권하는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환자의 거부감을 고려한 의사는 억제제를 먹은 뒤 그의 상담을 하겠다고 해 주었다.

덕분에 이곳에 그를 데려다준 라일은 마지막까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회사로 떠났다. 입으로는 알파를 만나게 하는 게 불안하다고는 말했다. 그러나 실상 제 곁에서 멀어지는 게 불안하다는 건 얼핏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느끼면 알 수 있었다.

“그럼 이걸 손에 꼭 쥐고 상담을 받으세요.”

“이게 뭐죠.”

“휴대용 호출기입니다. 위급상황에 누르시기만 하면 밖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이 상담실로 뛰어 들어갈 겁니다.”

“…….”

비서의 안내에 따라 줄곧 옆에 따라붙었던 경호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얼떨결에 마주 인사하면서 해진은 티 나지 않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저택의 경호원 중 하나가 매수된 이후로 해진에게 개인 경호를 붙였다고 라일은 설명해 주었다. 덕분에 몸에 맞지도 않는 비싼 목걸이를 몇 개나 칭칭 감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도련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저택 사람들도요.”

상담실의 앞에 다다르자 마크가 걱정스럽게 눈가의 주름을 보이며 말을 걸었다. 걱정이라는 소리에 귀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해진은 무심코 제 귓불을 매만졌다.

“그러니 상담 잘 받고 나오세요.”

“네.”

고작 문 하나 밖에서 기다릴 거면서 같이 온 이들은 마치 그가 멀리 가기라도 하는 듯 굴었다. 해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손에는 비서가 건네준 호출기를 꼭 쥔 채로.

부모님이 독감에 걸린 저를 안고 야밤에 응급실로 뛰었을 때도, 이런 야단스러운 관심은 받지 못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상담실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단정한 옷을 입은 채 소파에 앉은 의사와 마주하는 순간 해진은 제 뒤에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상담실 안으로 내딛는 한 발은 그가 호수에서 앞으로 내딛던 걸음과는 사뭇 달랐다.

무언가가 바뀔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

“네놈이 어찌 이럴 수가 있어!”

“시끄럽군요.”

길길이 날뛰는 다니엘을 앞에 두고도 라일은 태연했다. 그는 저택을 빠져나간 다니엘을 그 뒤로 애써 찾지 않았다. 이렇게 절박하게 제 발로 뛰쳐나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친족들을 다 쳐낸 게야! 감히!”

“감히?”

“이익……!”

그렇다고 해서 이 개소리를 길게 들어 줄 생각은 아니었다. 오늘 놈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도록 한 건 다름이 아니었다. 직접 눈앞에서 밟아 주기 위해서였다.

자제 없이 매서운 페로몬을 내보내니 다니엘의 얼굴이 금방 숨도 못 쉬는 사람처럼 변했다. 이대로 짓눌러 터트리고 싶은 흉포한 심정이 라일을 뒤흔들었다.

오늘 아침 그는 회사 주식의 과반수를 손에 넣었다. 그동안은 견제 차원에서 친족들과 라일의 지분을 합쳐야 과반수가 될 수 있는 구조였다.

만약 섣불리 지분을 늘리려고 한다면 매서운 견제가 들어오곤 했다. 베르무스 사에 영향력을 뻗치고 싶어 하는 주주들은 섣불리 그걸 내놓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라일은 오래도록 차근하게 준비해 오던 계획을 과감히 실행시켰다.

“으윽.”

그 뒤로는 출근하자마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모든 친족의 해임 명령을 보냈다. 시간이 다소 걸리겠으나 끝내 그의 의사는 관철되리라.

그의 복수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목이 뻣뻣하게 살던 놈들이 바닥을 기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듯하다.

해진이 그 아픈 다리로 호수까지 가도록 만들었으니까.

“감히라니. 숙부님. 대체 베르무스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베르무스의 친족회는 원래 이렇게까지 힘이 있는 모임이 아니었다. 적당히 구실을 붙여 가주에게 기생하는 놈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단체였다. 그런데도 감히 머리를 넘본다면 박멸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쯤 다니엘을 비롯해 주요 권력을 쥐고 있는 놈들은 경찰의 소환장을 받았으리라. 오래도록 놈들의 범죄와 비리를 캐내 온 라일이었다. 섣불리 무마되지 않도록 경찰과도 단단히 논의를 마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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