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본래는 이렇게까지 뿌리를 뽑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힘겨루기에 쓰려고 천천히 모으던 것들이다.
그런데 해진이 앓는 와중에도 이리 서럽게 말하니까, 참을 수가 없었다.
‘나, 난……, 고아가, 흐윽, 아닌데…….’
정작 열이 올라 눈물도 못 흘리면서 해진은 서럽게도 이 말을 반복했다. 무언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감각이 들어서 라일은 다니엘이 해진과 마주하던 영상을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안타깝게도 녹음이 되는 CCTV가 아니라서 경찰 관계자의 협조까지 얻어야 했다. 놈의 더러운 입 모양을 분석한 결과 해진에게 가한 모욕이 대충 예상이 되었다.
그게 못내 가슴에 박혔을까. 단번에 호수로 뛰어가 가족을 찾을 만큼.
알아차린 뒤로는 이 거대한 분노를 자제할 수가 없었다. 비서의 만류에도 라일은 그간 준비해 온 모든 힘을 모아 친족들을 쳐내기로 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주제 파악이 부족한 다니엘에게는 더한 복수를 해 줄 작정이었다.
“아니지. 이제는 숙부님이라고도 불러 드리지 못하겠군요.”
“뭐, 뭐……?”
“곧 친족회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그러게, 왜 그리 함부로 입을 놀리고 다니셨습니까.”
명목이나마 친족회는 존속하게 될 것이다. 작당한 놈들은 대부분 합당한 벌을 받겠으나 아직 필요한 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 가문을 뿌리로 둔 탓에 베르무스가에는 괜찮은 법적 절차가 남아 있었다. 바로 베르무스라는 성에 오물을 끼얹은 자는 합법적으로 추방할 수 있는 가족법이었다.
현대로 넘어온 이후 생겨난 호적까지는 어찌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다니엘이 평생을 가져온 저 말도 안 되는 자부심을 깨부술 훌륭한 방법이었다는 점이다.
“나, 나를, 대체…….”
“녀석의 성은 브라이트입니다.”
“……뭐?”
“감히 고아라느니 뿌리도 모른다느니 헛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대가로 이제, 숙부님이 그리도 좋아하는 베르무스라는 뿌리를 없애 드리지요.”
뜬금없는 소리에 역정을 내던 다니엘이 돼지 같은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는 이내 이 모든 짓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깨닫고는 턱살을 떨며 분노했다.
“너, 너……! 그깟 열성 따위 때문에 지금……!”
감히 해진을 또 모욕하는 행태에 라일은 참을 수 없었다. 진짜 목을 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절로 페로몬으로 표출된다.
지금까지 내리누르던 위압감은 거짓이라는 듯 다니엘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천천히 바닥으로 추락했다. 한 번도 이리 과하게 페로몬을 운용한 적은 없었다. 예상보다 우성의 힘은 참 많은 짓을 할 수 있었다. 마치 짐승들의 서열 싸움이라도 된 듯이. 라일은 이제 형질을 마음껏 활용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바닥으로 추락한 다니엘의 앞까지 걸어간 그는 슬쩍 허리를 숙였다. 새파란 두 눈을 바라보는 다니엘의 눈에는 공포가 어려 있었다.
그걸 바라보며 라일은 작게 속삭였다. 밖에서 이 소란을 주시하는 비서진들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의 정부 말입니다. 감히 제게 페로몬을 쏟아부었던.”
“커, 컥…….”
공포만 어려 있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진다. 그걸 보며 라일은 줄곧 품고 있던 합리적인 의심이 해결되는 걸 느꼈다.
어머니가 그리도 큰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그 오메가는 어떻게 감히 라일을 건드릴 생각을 했을까.
그 해답이 여기 있었다. 애초에 아버지에게 정부를 붙이며 충동질을 해 오던 인물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제, 제발…….”
라일이 그 일로 뿌리 깊은 두통에 시달리는 걸 다니엘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그 정부로 인해 그가 정신적인 고통을 받은 건 분명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를 잃고 직접 그의 후견인으로 활동했던 건 다니엘이었으니까.
눈이 조금씩 뒤집히는 놈의 얼굴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라일은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짓씹듯 내뱉었다. 이제 바닥까지 추락한 숙부의 얼굴은 다시는 볼 일이 없으리라.
“다시는 해진을 건드리지 마.”
행여 자그마한 바람이라도 녀석에게 닿을까 봐, 라일은 주변의 모든 걸 풀포기 하나 남기지 않고 뽑아내기로 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기이한 광기마저 품은 채 일렁였다.
***
“상담은 어땠지?”
“음…….”
오자마자 해진의 깁스를 요리조리 살피는 라일이었다. 떨어져 있던 건 고작 몇 시간이었는데 그는 다급하게도 저택에 돌아와 해진을 찾았다. 마크에게 상세하게 진료 결과를 듣는 걸로도 모자라 직접 다리를 살피지 못해 안달이었다.
해진은 무심코, 차라리 제 다리가 영영 망가지는 편이 그에게는 더 이득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도망가지 못할 텐데.
다만 그 의문을 밖으로 내뱉는 대신 숨을 크게 들이쉬며 할 말을 골랐다. 사실 상담이라고는 했으나 별다른 걸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어요.”
여러 장이나 되는 설문지를 정신없이 작성했다. 그러고 나서 의사는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았다. 심지어 해진에게 편한 자세로 길게 누워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오늘은 일단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라고 했을 뿐이다. 당연히 해진은 당황해서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나마 약 처방을 받아 온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원래 처음은 그래.”
라일은 꼭 자신도 치료를 받아 봤던 것처럼 말을 붙였다. 예민한 부분을 묻는 대신 해진은 침묵을 택했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했다. 그걸 알면서도 해진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지 의아할 따름이다.
“움직이는 게 불편할 테니, 당분간은 의사를 이곳으로 불러야겠군. 어때?”
“네.”
깁스를 하고 그 먼 병원까지 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하던 차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해진은 이상하게 이곳을 진짜 집으로라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이건, 얼마 전에 말했던 자료야.”
짧게 의사와 상담한 끝에 해진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알려주는 게 좋을 거라는 소견을 받았다. 덕분에 라일은 진작부터 준비했던 각인에 대한 자료를 녀석에게 건넸다.
해진에게 붙여 준 의사는 분명 실력이 좋았다. 다만 알파라는 사실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그는 더 이상 녀석의 핑계를 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단순히 해진의 근처에 알파가 있는 게 못내 참기 힘들었다.
다만 비서는 급박한 상황이니 이 분야에서 가장 좋은 의사를 붙이는 게 합리적이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해진의 상황을 어느 정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일은 자신이 불안함을 감내하기로 했다. 녀석이 이렇게 인형처럼 아무 의욕 없이 있는 모습을 하루빨리 바꿔 주고 싶었다. 그 욕망을 앗아간 건 라일 자신이었다. 그러니 되찾아 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작정이었다.
해진은 건네는 서류를 얌전히 받아 들었다. 예전에 받아 들었던 계약서처럼 다 읽지도 않고 덮어버릴까 봐, 라일은 두려웠다.
그러나 머뭇거리면서도 그는 꼼꼼하게 종이를 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도 반 불안 반인 심정이 된 라일은 밖으로 명령을 보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간단히 다과라도 준비할 작정이었다.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아…….”
한참 더듬더듬 가족 이야기를 쏟아내던 해진은 안도의 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심정인지 안다는 듯 의사는 옅게 웃으며 서류를 정리했다.
상담하면서 해진이 가장 많이 느낀 건 자신이 텅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무얼 했는지, 뭐가 하고 싶은지 하는 질문이 갑자기 들어오면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동안은 해야 할 일만 있었지,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꼭 뇌가 밟히고 밟혀서 납작한 모양이 된 것만 같았다.
이러니 벌써 몇 번이나 진행된 상담에도 영 적응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다고 뭐가 해결될까 싶은 의심도 들긴 했다.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라일의 덕이었다. 페로몬 샤워를 하면서 주절주절 입을 열었던 버릇이 이렇게 도움이 되었다.
마침 그의 생각을 하는데 종이 울렸다. 미미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페로몬 덕에 밖에 있는 것이 라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해진. 데리러 왔어.”
고작 본관에 있다가 외관에 왔을 뿐인데 그는 늘 저렇게 말하며 해진의 상담이 끝나길 기다렸다. 게다가 꼭 상담이 끝날 때만 유독 저렇게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하고 내비치곤 했다.
옆에서 의사가 끙 앓는 소리가 들린다. 매번 억제제를 먹고 와서 못 느꼈는데 알파이긴 하다는 듯이 말이다.
“……혼자 갈 수 있다니까요.”
“알아.”
그렇게 말하면서 라일은 자연스럽게 그를 안아 들었다. 그간 몇 번이나 실랑이를 벌였으나 해진이 깁스를 떼는 순간까지는 이 짓을 그만두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결국 팔을 얌전히 늘어트리는 걸로 해진은 미미한 반항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막상 그의 품에 안긴 다음엔 너무 편하게 자리 잡은 자신을 발견한다.
“…….”
이건 꼭 쇠구슬 같은 오묘한 느낌이었다.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걸 붙잡고 비가 오는 밖을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상담을 하면서 의사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어떤 감정이라도 좋으니 솔직하게 표현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일을 보니 떠오르는 게 너무 많아서 정작 무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