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헤비 레인-88화 (88/101)

#88

쿨럭거리는 소리가 온실을 울렸다. 곁에서 그런 해진을 보던 라일은 끝내 참지 못하고 담요를 하나 더 그의 어깨에 둘렀다.

“갑갑해요.”

“……조금만 있다가. 차도 좀 마셔 봐.”

방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매일 같이 식사를 꼬박꼬박 하고 있다 보니 더 그랬다. 견디질 못하고 온실이라도 가야겠다고 나섰더니 당연하다는 듯 라일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막상 훈훈한 방을 벗어나 오는 길에 덜컥 잔기침이 생겼다. 해진은 이제 몸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걸 실감하고 말았다.

덕분에 라일은 딱 돌아버리고 싶다는 눈을 하고는 그의 곁을 보살폈다. 뜨거운 차를 내오게 하고 여기서 캠핑을 해도 될 만큼 담요를 가져왔다.

몇 번이나 방으로 돌아갈 것도 권유했으나 오늘따라 갑갑함이 거세다. 다시는 그러지 말자 다짐했는데 어느새 또 무언가를 꾹꾹 눌러 왔다는 것처럼.

“해진. 방으로 가고, 나중에…….”

“나중에 언제요.”

“……몸이 나아지면.”

그 소리에 불쑥 삐죽하게 불만이 솟았다.

앞으로도 그는 영영 활발하게 걸어 다니지 못하리라. 한번 붙어 버린 잔기침은 겨울만 되면 그를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아픈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돌아다닌 해진의 잘못이지만 갑작스럽게 툭 굴러온 불만이 점점 자라나기만 한다.

아니지. 이게 정말 해진의 잘못이었을까.

“……자몽차에 꿀을 많이 넣어 오라고 했어. 조금만 더 따듯하게 마시고, 들어가지.”

그때 라일이 그의 손에 따듯한 차를 쥐여 주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너무 뜨거운 걸 못 먹는 해진을 위해 적당히 식힌, 그가 이따금 즐겨 먹곤 했던 자몽차였다.

손에 들린 라일의 자상한 배려가 무거웠다. 분명 적당히 식힌 온도인 걸 알지만 손바닥만 한 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숨이 거칠어진다. 간질간질한 이 감각이, 해진은 싫었다. 사소한 것 하나를 다 기억해서 맞춰 주려 드는 라일이 버겁다. 어쩔 수 없이 끌려 내려온 몸은 늘 무거웠고 잘 걷지 못했다.

갑갑함의 원인이 갑자기 눈에 보였다.

“해진, 숨쉬기가 불편한가? 숨소리가…….”

이렇게 숨이라도 조금 거세게 내쉴 때면 귀신같이 알고 걱정하는 라일이 거슬렸다. 뾰족하게 날 선 마음을 그대로 눈매에 옮긴 해진이 그 걱정스러운 파란 눈을 마주한다.

갑갑함이 끝까지 차오르고 나서야 제 근처에 마구 떨어져 있는 감정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바라볼 수 있었다.

왜 자신은 이 꼴이 되었을까. 어쩌다가 이렇게, 아파졌을까.

시선의 끝에 해답이 있었다. 어딘가 긴장한 듯 해진을 세심하게 살피는 파란 눈이 잘게 떨린다. 고작 잔기침 좀 몇 번 더 했다고 큰일이 난 것처럼.

어느 날 의지와는 다르게 무너졌던 그의 삶처럼, 감정이 터져 나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해진은 들고 있던 잔을 거칠게 바닥에 던져 버렸다. 뜨겁고 무거워서 약해빠진 몸으로는 도무지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따듯한 담요도 거칠게 바닥으로 패대기를 쳤다. 그런데도 갑갑한 마음이 영 해소되질 않는다.

“괜찮아. 그러니까…….”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구는 제가 이상할 법도 한데 라일은 침착하게 여분으로 두고 있던 담요를 펼칠 뿐이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하는 말이 너무 우습다.

“뭐가 괜찮죠.”

“……화내도 괜찮아. 대신 몸은 따듯하게 하고.”

그제야 해진은 자신이 드디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벌떡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난다. 기껏 다시 어깨를 두르려던 라일의 두 팔이 멀어졌다. 깁스 때문에 뛰쳐나갈 수가 없어서 더 화가 났다.

이 갈 길 잃은 분노를 그러모아 끌어당긴 건 계속 괜찮다고 말해 주던 라일이었다. 해진에 관한 건 그게 무엇이든 놓치지 않고 제 품에 끌어안겠다는 듯이.

“다리에 무리가 가. 조심해야지.”

아플 정도로 자상한 말이었다. 이쯤 되니 해진은 자기가 대체 무엇에 더 화가 났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토록 저를 아프게 했던 라일이, 멋대로 각인까지 한 점에 화가 났는지. 아니면 각인까지 해 놓고 다시 그를 아프게 만들어 화가 났는지.

‘고아라지?’

자연스럽게 가장 최근에 있었던 기억으로 서러움이 달려들었다. 무의식중에 안전하다고 여겼던 이 저택까지 찾아와 저따위 모욕을 한 다니엘의 금발이 라일에게 겹쳐 보였다.

바뀐 그의 자상한 태도에 안심하고 말았다. 어느새 끔찍하기만 했던 이 저택을 포근하게 느끼고 말았다. 자상한 이들의 태도에 해진은 한껏 경도되었다.

그런데도 또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해진은 다시 고아가 되고 말았다. 분명 천사 같은 부모님이 있었는데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내동댕이쳐지는 아픔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의 친척이라는 놈은 이렇게 찾아와 그를 한마디로 정의했다.

그게 너무 아팠다.

나중에야 그게 라일의 뜻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전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할까. 이렇게 화가 나는데.

“왜 그냥, 그냥……. 원망하게 내버려 두지 않아.”

“…….”

“그냥 미워만 할 수 있게 해 줬어야지!”

서러움을 삼키며 원망할 대상이 명확할 땐 그나마 편했다. 그가 끝까지 무심했으면 이런 복잡한 고뇌를 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매일 같이 뭐가 잘못된 건지 고민하면서, 어디를 향해 소리를 질러야 하는지 헤맬 필요도 없었으리라.

“왜 나를 가만두지 않는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온실의 청량한 초록빛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빛나고 있는 라일의 금발도 뭉개지듯 흐려졌다.

그런데도 해진은 그곳에 라일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환하게 빛나는 모습은 뭉개졌음에도 시야를 뚫고 들어왔으니까.

줄곧 해진에게 닿곤 했던 그의 온기처럼.

“미안해.”

천천히 다가온 라일은 다시 해진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었다. 조금 서늘하던 어깨가 온기에 감싸였다. 귓가에 속삭이는 사과는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겠다고 다짐한 날처럼 잔잔하게 와닿았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토록 애써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괜찮아. 계속 나를 원망해.”

머뭇거리던 그는 이 정도 온기로는 부족하다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해진을 그러안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해진은 한층 더 서러워졌다.

그렇게 한참이나 해진은 숲을 닮은 온실에서 서러움을 흘려보냈다. 매번 꽁꽁 속으로만 쌓고 있던 그것을.

그는 라일의 자상함을 마치 독인 양 들이마셨다.

***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라일을 보면서 비서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 데도 좋은 일이 있냐고 묻지 않은 건 당황스러워서 그랬다. 입가를 제외하면 라일의 눈은 서류를 죽일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제발 떨어지라는 해진의 요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근길에 나선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회장의 머리가 기어코 망가진 건 아닐까.

“해진이, 화를 냈어.”

“……그렇군요.”

비서의 혼란스러운 대답에 라일의 미소는 한층 진해졌다. 설핏 눈이 접히는 것도 같았는데 착각일까.

그러나 비서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라일의 기쁨은 진짜였다. 해진이 제게 화를 내서.

무관심보다는 분노가 낫다. 라일은 그 무심한 태도를 죽도록 겪어 봤으니 그걸 잘 알았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녀석이 다시 감정을 되찾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더는 근처에 있는 것들을 마냥 외면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증거였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건 그만큼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동안은 있어도 없는 척, 봐도 못 본 척하며 저택에 있었으리라. 마치 아픈 직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라일의 손길을 받았던 것처럼.

그동안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해진의 식단을 챙긴 보람이 있었다. 해진을 제외하면 저택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라일의 서슬 퍼런 감시에 살이 빠지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좀 더 화를 내 주면 좋을 텐데.”

급기야 이렇게 읊조리는 라일을 보면서 비서는 결국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말았다. 그의 고용주가 최근 들어 조금 더 미친놈 같다는 불경한 생각을 미처 떨쳐낼 수가 없어서.

***

왜 그랬지.

오후가 다 되어가는 시간 해진은 침대에 웅크린 채 후회를 거듭했다. 벌써 며칠째 이어지는 고뇌였다.

다행스럽게도 라일은 해진의 오랜 거부 끝에 다시 출근하고 있었다.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겨우 확보된 것이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오긴 했지만 말이다. 이상하게 화를 내면 낼수록 그 손길이 더 자상해지는 것만 같아서 곤란했다.

처음으로 한껏 화를 쏟아붓고 나서야 해진은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자신이 밖으로 던진 분노가 어딘가 조금 비뚤어졌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라일에게 왜 그리 자상하냐고 화를 낸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걸 깨달은 뒤로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당황이 그를 맴돌았다. 그 속도 모르고 의사는 감정을 표출했다는 소리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기만 했다. 이러니 꼭 저도 모르고 있던 속마음을 내뱉어버린 기분마저 들었다.

정말일까.

이 저택에는 이제 손 닿는 모든 곳에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쉽게도 잡을 수 있는 이 온기들은 진짜로 그를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쥐어서는 안 될 것이라 여기며 긴 빗물을 남긴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저 당황스러웠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맹목적이던 라일의 페로몬이 쫓던 게 정말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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